제134화
그날 밤, 추길은 진씨의 손에 들어간 태자비의 초대장을 생각하느라 한숨도 자지 못했다.
‘진씨가 아가씨를 괴롭히며 초대장을 돌려주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이튿날 아침, 눈 밑에 그늘이 짙게 깔린 추길이 엽연채의 머리를 빗겼다.
“이게 무슨 일이래? 이 눈 좀 봐. 웅묘熊猫(판다)라고 해도 믿겠는걸.”
화장대에 앉아 있는 엽연채가 거울에 비친 추길의 눈을 보더니 웃으며 이렇게 놀렸다.
“아가씨, 태자비 마마께서 저희에게 언제 오라고 하셨죠? 날짜가 지나 못 가면 어떡해요?”
그 말을 들은 엽연채의 눈에 순간 찬웃음이 어렸다.
“급할 게 뭐가 있니. 그쪽이 우리보다 더 마음 졸이고 있을걸. 때가 되면 알아서 사람을 보낼 게다.”
“하지만…….”
추길이 미간을 잔뜩 찌푸렸으나 엽연채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꾸했다.
“됐고, 어서 머리나 마저 단장해 줘!”
* * *
그 시각, 일상원.
엽연채가 말한 대로 진씨와 주묘서는 입에서 게거품이 나올 지경이었다.
진씨는 침상 위에 앉아 있었고, 흐릿한 봉황 문양 금박이 붙은 초대장은 그녀 곁에 놓인 항탁 위에 있었다. 초대장은 얼마나 만졌는지 보풀이 일어날 지경이었다.
주묘서는 안달복달하며 또다시 초대장을 집어 펼쳐 보더니 간절한 눈빛으로 진씨를 쳐다보며 강조했다.
“어머니, 초대장에 칠월 엿새라고 적혀 있어요. 바로 내일이라고요!”
옆에 있던 강심설이 경멸하는 눈빛으로 주묘서를 쳐다봤다. 진씨도 인내심 없고 변변치 않은 딸에게 화가 나 그녀를 쏘아보았다.
“내가 그걸 몰라서 이러느냐?”
진씨는 엽연채가 찾아와 초대장을 달라고 부탁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직접 와서 고개를 숙이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아직 시간이 좀 있으니 좀 더 기다려 보자꾸나. 올 게다.”
진씨가 입을 오므리며 말을 덧붙였다. 주묘서는 초조한 마음에 입술을 잘끈 깨물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엽연채에게 달려가고 싶은 마음이었다.
“어머님, 아침 식사가 준비되었습니다.”
강심설이 말했다.
“그래. 우선 아침부터 먹자꾸나.”
진씨가 주묘서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주묘서는 그제야 손에서 한시도 떼어 놓고 싶지 않은 초대장을 마지못해 내려두고 식사를 하러 갔다.
세 사람은 식사를 마친 후 다시 서차간으로 돌아와 자수를 두었지만 정신은 당연히 딴 데 팔려 있었다. 점심이 다 되어 가는데도 엽연채는 오지 않았다.
점심을 먹은 주묘서는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작은 새언니가 초대장에 어떤 내용이 적혀 있는지 모르나 봐요. 내일이 바로 태자부에 가는 날인지 모르는 거죠.”
강심설은 그녀의 말을 듣고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어제만 해도 주묘서는 엽연채를 ‘엽씨’라고 칭했는데, 지금은 또 ‘작은 새언니’라고 그녀를 친근하게 부르고 있었다.
‘집안의 적장녀라는 사람이 어떻게 저리 염치도 없을까?’
“제가 가서 작은 새언니에게 시간을 알려 줄게요!”
주묘서는 초대장을 집어 들고 밖으로 나갔다. 이에 진씨는 화가 나 눈앞이 새카매졌다.
“묘서야, 돌아오너라!”
그러나 주묘서는 이미 뛰쳐나간 후였다. 진씨의 낯빛은 새파랗게 변했다. 엽연채가 찾아와 애원하기를 바랐는데, 이렇게 딸이 먼저 찾아가면 이쪽에서 굽히고 들어가는 셈 아닌가. 그러나 그럼에도 진씨는 호통만 칠 뿐 자리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여종을 시켜 그녀를 붙잡게 하지도 않았다.
강심설은 그 모습을 보더니 속이 메스꺼웠다.
‘모녀가 똑같이 뻔뻔하기 짝이 없구나!’
게다가 엽연채는 대체 무슨 복을 타고났기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간에 매번 자신들의 체면을 깎고 머리 꼭대기에 올라서는 건가!
일상원을 나선 주묘서는 엽연채가 외출이라도 했을까 봐 애를 태우며 쏜살같이 궁명헌으로 달려갔다.
엽연채는 궁명헌 서차간에서 녹나무로 만든 기다란 탁자 앞에 몸을 숙인 채 혜연과 수본繡本(자수 도안)을 그리고 있었다.
추길은 한쪽에 서서 그들을 돕고 있었는데 마음이 초조해 영 집중이 되지 않았다. 진씨가 초대장을 주지 않겠다고 생떼를 쓸까 봐 어떤 일도 손에 잡히지가 않았다.
그런데 이때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작은 새언니.”
추길이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들 때, 주묘서는 이미 안으로 들어와 있었다. 그녀는 세 사람이 수본을 그리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군색한 표정으로 그들 쪽으로 걸어갔다.
“작은 새언니.”
엽연채는 고개도 들지 않고 계속해서 수본을 그리며 대꾸했다.
“오셨어요, 큰아가씨.”
“작은 새언니, 수본을 그리고 있었어요?”
주묘서가 엽연채 곁에 서서 물었다.
추길은 주묘서가 손에 쥐고 있는 금박 초대장을 보더니 기쁜 표정을 지었다. 어쩐지 주묘서도 전보다 사근사근하게 행동하고 있었다. 이에 추길은 옻칠한 배나무 수돈을 탁자 옆에 가져다 놓으며 그녀에게 앉길 권했다.
“큰아가씨, 앉으세요.”
주묘서는 엽연채 옆에 앉더니 초대장을 한 번 더 움켜쥐다가 결국 마지못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작은 새언니, 어머니가 저에게 이 서신을 새언니에게 전해 주고 오라고 하셨어요.”
추길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었다. 그녀는 진씨가 정말로 초대장을 끝까지 내어 주지 않을까 봐, 그래서 태자부에 가지 못하는 불상사가 생길까 봐 전전긍긍하던 참이었다.
엽연채는 해당화 수본을 다 그리고 나서야 고개를 들고 붓을 내려놓았다.
“고마워요, 아가씨. 이건 태자비 마마께서 세 번째로 보내신 초대장이에요.”
‘벌써 세 번째라고?’
주묘서는 대번에 낯빛이 어두워졌으나 꾹 참고 좋게 질문했다.
“작은 새언니, 태자비 마마와는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지난번 신양 공주부에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갔을 때 마침 태자비 마마도 그곳에 계셨어요. 공주 마마께 감사한 마음을 전하려고 작약 문양이 들어간 도자기병 두 개와 말린 꽃을 선물해 드렸죠.
그런데 며칠 후에 태자비 마마께서 제가 만든 말린 꽃이 아주 마음에 드니 태자부에 와서 말린 꽃을 만들어 달라며 초대장을 보내오신 거예요. 그때 마마의 초대장을 태자부 시녀가 직접 저에게 가져다주었어요. 귀인들의 생각은 헤아리기 어려우니 저도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했지요. 그래서 경솔하게 아가씨를 데려갈 수는 없었던 겁니다.
그런데 뵙고 나니 마마께서는 인자하고 도량이 넓으신 분이더라고요. 마마께서 또 초대해 주셨으니 지금 답장을 드려야겠네요. 아가씨를 데려가도 되는지도 여쭤볼게요.”
주묘서의 낯빛이 한층 어두워졌다.
‘데려가도 되는지 여쭤본다? 아직도 데려가겠다고 확답을 주지 않겠다는 건가.’
“추길아, 서간지를 가져오너라.”
“예.”
엽연채의 명에 추길은 얼른 돌아서서 침실로 가 뒤적거리더니, 잠시 후 해당화 문양이 들어간 종이 한 장을 들고 왔다.
엽연채는 종이 위에 부탁드린다는 글자까지 적은 뒤 추길에게 다시 건넸다.
“태자부에 전달하고 오너라.”
“예.”
종이를 받아 든 추길은 황급히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미 오시午時가 지났는데 당장 내일이 초대일이니 서둘러 전달해야 했다.
“답장을 전달했으니 이제 마마의 답변을 기다려야겠네요!”
엽연채는 미소를 짓더니 다시 고개를 숙여 수본을 그리기 시작했다.
주묘서는 엽연채가 대충 얼버무리려 하는 것처럼 느껴져 상당히 불만스러웠다. 그녀는 손에 든 비단 손수건을 꽉 움켜쥐었지만 감히 소란을 피울 수는 없었다. 태자부에 갈 수 있는 기회가 눈앞에 온 지금, 괜히 엽연채에게 밉보였다가 기회를 영영 놓쳐서는 안 될 일이었다.
주묘서는 더 정확하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엽연채가 탁자 앞에 앉아 수본을 그리는 데 집중하고 있으니 결국 입을 떼지 못했다.
“새언니, 초대장도 전달했으니 전 이만 돌아가 볼게요.”
“네.”
주묘서는 입을 살짝 오므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뜰을 걷던 그녀는 뭔가 찝찝했는지 다시 고개를 돌려 궁명헌을 쳐다봤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이 어리석은 짓을 한 것 같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더니 손수건을 홱 휘두르며 걸음을 재촉했다.
주묘서가 궁명헌을 나오니 수양버들이 심긴 오솔길에서 녹지가 머리를 내밀고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주묘서를 보더니 냉큼 달려오며 말을 전했다.
“아가씨, 마님께서 속히 돌아오시랍니다!”
주묘서의 안색이 새파랗게 변했다. 다시 진씨를 보러 갈 생각이 없었으나 녹지가 잡아끄니 가지 않을 수도 없었다. 더군다나 그녀는 지금 마음이 너무 불안해져 진씨를 찾아가 의논하고 싶기도 했다.
두 사람이 속히 일상원으로 돌아가 응접실로 향하니 그새 찾아온 백 이낭이 권의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어찌 됐느냐?”
진씨의 목소리에는 변변치 않은 딸을 향한 한스러움과 조급한 심정이 함께 묻어났다.
주묘서는 고개를 숙인 채 엽연채가 어떻게 태자비를 알게 되었는지 이야기해 주었다.
“흥!”
진씨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냉랭한 목소리로 욕했다.
“그것 봐라. 지난번에 신양 공주부에 갔다가 그런 인연을 맺게 된 게 아니냐! 그런데 윗사람들에게 빌붙는 게 아니라고? 이제 보니 빌붙는 걸 좋아하는 건 그 애 같구나!
그런데 우리가 잘되는 꼴은 못 보겠으니 막는 게지. 지난번에 혼자 신양 공주부에 가지 않고 우리와 함께 갔다면 지금 태자비 마마의 초대장을 받은 사람이 걔가 아니라 너일 수도 있다.”
주묘서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이 억울해 손수건을 꽉 비틀었다.
차를 마시고 있던 백 이낭은 진씨의 말을 듣더니 사레가 들어 캑캑거리며 기침했다. 그러더니 고개를 숙이곤 손수건으로 살며시 입가를 닦았다.
셋째 부인이 분명 경위를 밝히지 않았던가? 태자비 마마께서 그녀가 만든 말린 꽃이 마음에 들어 초대한 거라고 말이다. 주묘서는 아무 장기도 없으니 그저 멀뚱멀뚱 옆에 앉아 있기만 할 텐데, 태자비 마마가 뭐가 마음에 들어 이쪽에 초대장을 보내겠는가?
“그래서 어찌 됐느냐? 태자부에 널 데리고 간다고 하더냐?”
진씨가 물었다.
“그게…….”
주묘서의 표정이 굳었다.
“새언니가 서신을 한 장 쓴 다음… 추길이를 시켜 보냈어요. 태자비 마마께 절 데려가도 되는지 여쭤보겠다고 했어요…….”
“뭐라? 그리했는데도 확답을 주지 않았다는 게냐?”
진씨는 씩씩거리며 숨을 몰아쉬더니 기가 찬지 헛웃음을 흘렸다.
“대충 얼버무리려는 거구나! 태자비 마마께 여쭤보겠다고 하는 건 그저 핑계일 뿐이다. 아마 추길이한테 밖에서 좀 돌아다닌 다음 태자부에 갔다 왔다고 말하라고 했을 게다. 돌아오면 분명 데려갈 수 없다고 말할 셈이겠지!”
주묘서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