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3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이때 밖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백 이낭이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좀 전에 보니 셋째 도련님께서 셋째 부인을 데리고 급히 일상원을 나서던데, 무슨 일이라도 있었습니까?”
백 이낭은 안으로 들어오더니 어두운 낯빛의 진씨와 강심설을 보고는 어리둥절해하며 다시 물었다.
“마님, 큰마님. 무슨 일입니까?”
“엽씨 이 망할 것이 또 수작을 부리고 있구나.”
진씨는 방금 일을 백 이낭에게 들려주었다. 백 이낭 역시 깜짝 놀라고 말았다. 엽씨가 태자비한테까지 들러붙었다는 말인가?
“셋째 그 불효막심한 놈이 글쎄, 내가 그 아이의 얼굴을 망가뜨리려고 찻잔을 던졌다고 몰아세우더구나.”
진씨는 씩씩거리며 분통을 터트렸으나 말끝에서는 조금 찔리는 듯한 기색이 느껴졌다. 진씨는 그 차가 얼마나 뜨거운지 잘 알았기에 엽연채의 얼굴에 찻잔을 집어 던졌던 것이다. 그러나 그저 이참에 단단히 혼쭐을 내려고 했지, 얼굴을 아예 망가뜨려야겠다는 악독한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한창 좋을 때 아닙니까? 얼마나 아내가 사랑스럽겠어요.”
백 이낭이 권의에 앉으며 좋게 말했다.
그 말을 들은 강심설은 마음이 아팠다. 그녀와 주비양은 혼례식을 올린 후 꿀 같은 신혼 생활은 고사하고 한 번도 달콤하게 지낸 기억이 없었다.
“모자란 놈. 부처님 모시듯 해 봤자 다 소용없는 짓이지. 방에도 못 들어가는 주제에.”
진씨가 조롱했다.
“어머님, 셋째 도련님께서 하는 말을 들어 보니 도련님께서는 동서가 태자부에 방문했던 사실을 이미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강심설이 노여워하며 기름을 붓자 진씨의 낯빛은 더욱 어두워졌다.
“분명 일부러 숨겼을 거예요. 엽씨는 태자비 마마의 비위를 맞추며 지내다가 때가 되면 분명 셋째 도련님께 말단관직이라도 안겨 주고 잇속을 차릴 방법을 강구할 거예요. 그럼 셋째 도련님이 집안에서 가장 잘나가게 되겠죠.”
말을 하면 할수록 강심설의 목소리는 점점 더 차가워졌다.
“그, 그 녀석이 무엇을 하려고 하겠느냐? 분명 큰아이의 세자 자리를 노리려 할 것이다!”
진씨가 노기 어린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마님, 지나친 생각이십니다!”
백 이낭이 그녀를 안심시키려 하자 강심설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쓱 쳐다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백 이낭은 아들이 없으니 초조하지 않겠지.”
백 이낭은 기분이 상했지만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지금 중요한 건 셋째 도련님과 셋째 부인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가 아닙니다. 두 사람이 이미 태자비 쪽에 붙었다면 저희가 뭘 어찌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중요한 건 두 사람이 저희에게 적의를 품고 있는지 아닌지가 아닙니다. 기왕 이런 기회가 생겼으니 큰아가씨도 함께 태자부에 보내셔야죠.
그리하면 첫째, 세상 경험을 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러다가 태자비 마마께서 눈여겨보시게 되면 기회와 인연이 생길지도 모르지요. 둘째, 만약 두 사람이 정말로 적의를 품고 있을 경우 큰아가씨께서 그들의 동태를 주시할 수 있죠.”
“맞아요.”
주묘서는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엽연채가 태자비와 교류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뒤로 어떻게든 그 사이에 끼지 못해 안달이 나 있었다.
진씨도 본래 그렇게 할 생각이었다. 지난번 묘씨의 생일 축하연에 참석했던 진씨는 정안후부의 수준을 알게 되고 실망을 금치 못했다. 그곳에 왔던 사람들은 격이 너무 떨어져 주묘서에게 어울리지 않았다. 태자비가 알고 지내는 황제의 친척이나 귀족의 자제는 되어야 수준을 높여 시집을 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진씨는 우선 엽연채를 불러와 따끔하게 야단을 친 뒤 주묘서를 데리고 태자부를 방문하게 하려고 했다. 그런데 몇 마디 하지도 않았는데 셋째 그 빌어먹을 놈이 나타나는 바람에 상황이 뜻대로 풀리지 않은 것이었다.
진씨는 다시금 화가 치밀어 가슴을 움켜잡았다. 지금 다시 엽연채를 불러오면 자신의 체면이 뭐가 된다는 말인가?
“어머니, 초대장이 여기 있으니 엽씨 없이 저 혼자 가도 돼요.”
주묘서가 조급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녀는 태자부로 한달음에 달려가고 싶었다.
“그건 안 된다!”
진씨가 단박에 그녀의 말을 자르자 백 이낭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을 보탰다.
“큰아가씨, 조급해하실 것 없습니다. 저흰 셋째 부인이 태자비 마마와 어떻게 사귀었는지 아직 모릅니다. 그리고 이 초대장에는 셋째 부인을 초대했음이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셋째 부인이 안 가시면 저희도 사람을 시켜 셋째 부인이 시간이 없다고 전할 수밖에 없는데, 그리하면 태자비 마마의 노여움을 살지도 모릅니다. 셋째 부인이 태자비 마마의 눈 밖에 나면 더 이상 왕래할 수 없을 겁니다.”
주묘서가 미간을 찌푸리자 백 이낭이 얼른 설명을 더했다.
“셋째 부인이 아가씨를 모시고 태자부에 드나들다 보면 아가씨와 태자비 마마도 자연히 친해지겠죠. 그리되면 혼자 다니셔도 될 거예요.”
진씨는 분해서 이를 악물었다. 주운환이 마지막에 뱉은 ‘어머니, 마음에 드시면 가지세요.’라는 말이 다시 떠오르자 가슴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주운환이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아 애간장이 타는 자신을 깔본 것이었다. 하나 진씨는 체면이 더 깎일까 봐 어두운 표정만 지을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백 이낭은 두 눈을 살짝 깜빡이다가 화제를 돌렸다. 주묘서가 좋은 곳에 시집을 가야 주묘화도 혼처를 고를 때 지금보다 눈을 높일 수 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변변치 않은 사람에게 시집을 가게 될 것이다.
* * *
주운환은 오는 내내 엽연채를 끌고 빠르게 걸었다. 두 사람이 연못 근처에 이르자 엽연채는 그만 돌멩이를 밟고 미끄러져 비틀거리다가 그의 오른팔에 얼굴을 부딪혔다.
그제야 주운환이 발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니 그녀는 코를 움켜쥐고 있었다. 꽤 아픈 모양이었다.
“공자, 괜찮아요?”
엽연채가 코를 문지르며 고개를 들었다. 주운환은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난 그녀의 모습을 보곤 조금 귀엽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기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전 괜찮습니다.”
“발갛게 부었는데요.”
엽연채는 그의 목에 생긴 붉은 자국을 가리켰다. 물집까지 잡힌 것 같아 엽연채는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제가 좀 볼게요.”
주운환이 엽연채를 끌고 하도 빠르게 걸은 탓에 추길과 혜연은 이제서야 그들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멀리서 보니 주운환은 엽연채의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고, 엽연채는 거의 그의 품에 기대다시피한 자세로 그의 목 언저리를 쳐다보며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추길과 혜연은 안색이 변했다. 추길이 황급히 앞으로 달려오며 물었다.
“셋째 공자님, 다치신 거예요? 아가씨, 손 떼세요. 제가 볼게요!”
그녀는 재빨리 다가오다가 그만 동그란 돌멩이를 밟았고, 발이 삐끗하면서 그대로 엽연채를 덮치고 말았다. ‘풍덩’ 소리와 함께 엽연채는 그녀에게 밀려 물에 빠지고 말았다.
“읍… 사람 살려……! 어푸어푸……!”
엽연채는 물속에서 허우적대며 발버둥을 쳤다. 아연실색한 주운환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물에 풍덩 뛰어들더니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 뭍으로 나왔다. 그저 가까이 붙어 있기만 했던 두 사람은 이제 완전히 한 몸이 되어 버렸다.
더욱이 엽연채는 온몸이 물에 흠뻑 젖은 탓에 앞섶이 좌우로 교차하는 유군이 몸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풍만하면서도 날렵하고 아리따운 선이 그대로 드러났다.
주운환은 처음으로 두 여종이 미덥지 못한 아이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쌀쌀한 가을바람에 엽연채가 감기라도 들까 봐 그녀를 안은 채 곧장 서과원으로 향했다.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던 혜연이 매서운 눈으로 추길을 쏘아보며 한마디 했다.
“이 맹추야!”
추길은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곤 훌쩍거렸다.
“일부러 그런 게 아니야.”
그러거나 말거나 혜연은 서둘러 궁명헌으로 뒤쫓아 갔다. 방 안에 들어서니 주운환이 이미 엽연채를 나한상 위에 내려놓은 후였다.
“아가씨, 괜찮으세요! 어서 옷을 갈아입으시죠!”
혜연은 급히 옷장으로 가 옷을 뒤적거렸고 주운환은 혜연이 돌아온 모습을 보고서야 방을 나섰다.
난죽거로 돌아온 주운환은 여양과 여한에게 돈을 주며 주방에 가서 생강탕을 만들어 따뜻한 물과 함께 가져오라고 분부했다.
혜연은 한참을 바쁘게 움직였고, 덕분에 따뜻한 물로 목욕을 마친 엽연채는 보송보송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한상 위에 앉아 생강탕을 마셨다. 추길은 파초나무 아래에 쭈그린 채 흙 위에 자책의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었다.
“추길아, 거기서 뭐 하니?”
엽연채가 그녀를 찾자 그제야 추길은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사죄했다.
“아가씨, 죄송해요. 저 때문에 물에 빠지셨잖아요.”
추길은 코를 훌쩍대며 자신을 책망했다.
엽연채는 지금까지 말로만 들었지, 남이 사람을 물에 빠뜨리는 상황을 겪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런데 그녀를 처음으로 물에 밀어 넣은 사람이 뜻밖에도 영민한 추길이었다.
“됐어. 내가 널 나무라겠니?”
생강탕을 다 마시고 나니 엽연채의 온몸에 따뜻한 기운이 돌았다.
“아가씨, 태자비 마마께서 보내신 초대장이 어떻게 마님 손에 들어갔을까요?”
혜연의 궁금증에 대답하는 엽연채의 눈에 비웃음이 어렸다.
“언젠가는 알게 되겠지. 그리고 뭐… 떳떳하지 못한 일도 아니니까.”
태자비가 떳떳하지 못한 수작을 부리려 하니 자신은 이렇게 다 드러내고 당당하게 왕래를 해야 했다.
태자비는 전에 두 번은 자신이 지내는 서쪽 측문으로만 초대장을 보내왔는데, 이는 탐색을 하기 위해서라고 해석할 수 있었다. 그런데 이젠 동쪽으로 접근했으니, 앞으로 ‘정식 경로’를 통하겠다는 의미였다. 즉, 일부러 진씨 손에 초대장이 들어가도록 한 것이다.
엽연채는 고개를 숙인 채 텅 빈 그릇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셋째 공자께서는 생강탕을 드셨니?”
“드셨을 거예요. 제가 가서 드셨는지 보고 올게요.”
혜연은 그리 말한 후 문밖을 나서려 했다.
“잠시 기다려 보거라.”
엽연채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화상 연고를 가져다드리렴.”
혜연은 얼른 침실로 가서 화상 연고를 챙겼다.
난죽거의 주운환은 진작에 옷을 갈아입은 후였다. 그는 서재에서 서책을 읽으며 아직 덜 마른 머리카락을 오른쪽 어깨로 쓸어 넘기고 있었다.
혜연이 서재로 들어가며 물었다.
“셋째 공자, 생강탕은 드셨어요?”
“마셨다.”
주운환은 고개도 들지 않고 책장을 넘기며 대꾸했다.
“공자, 이건 화상 연고에요. 데인 부분에 바르시면 돼요. 그렇긴 해도 의원을 불러 진찰을 받는 게 제일 좋을 겁니다.”
“별것 아니다.”
주운환이 무덤덤하게 대꾸하자 혜연은 더 무어라 말하기가 그랬다. 그녀는 화상 연고를 한쪽에 놓인 조그만 원탁 위에 올려둔 후 밖으로 나갔다.
주운환이 원탁 위를 힐끗 쳐다보니 오색 빛깔 꽃송이 모양의 조그만 구리 상자가 놓여 있었다. 아주 정교하고 깜찍한 모양새였다.
주운환은 원탁으로 걸어가 구리 상자를 집어 들었다. 뚜껑을 열어 보니 안에는 살짝 패인 담황색 연고가 들어 있었다. 그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연고를 살짝 덜어내 화상을 입은 목 부위에 발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