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132화 (132/858)

제132화

엽연채가 물었다.

“공자님은 어떤 형태의 옷을 좋아하세요?”

“지금 입고 있는 거요.”

“아, 도포를 좋아하는군요.”

그러더니 엽연채는 뒤돌아서 걸어갔다. 주운환이 어리둥절해하며 고개를 들어 보니 그녀의 가녀린 몸이 나비처럼 나풀거리며 멀어져 갔다.

마침 가을바람이 불어오자 해당화 문양이 촘촘히 짜인 옅은 붉은색 치맛자락이 살랑거렸고 피백披帛(여성들이 두 팔에 감고 다니던 얇은 견직물)은 바람에 돌돌 말려 올라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저 멀리 보이는 미인의 자태는 한 떨기 연꽃과 같고, 티 하나 없이 깨끗한 피백은 바람에 휘날리고 있구나.’라는 구절이 주운환의 머릿속에 절로 떠올랐다.

궁명헌으로 잽싸게 돌아온 엽연채는 혜연의 줄자를 들고선 다시 냅다 뛰어나갔다.

“아가씨…….”

혜연이 이맛살을 찌푸리며 엽연채를 쫓아가려 했으나 그녀는 이미 궁명헌 밖으로 사라진 후였다.

“아가씨가 뭘 들고 가신 거야?”

추길이 물었다.

“내 줄자.”

혜연은 눈썹을 잔뜩 찡그리며 대답했다.

주운환은 돌아갔다고 생각한 엽연채가 다시 걸어오자 다소 의아해했다. 엽연채가 그 표정을 보고 의문을 풀어 줬다.

“셋째 공자님이 치수를 모르실 것 같아서요. 이게 있으면 굳이 번거롭게 밖에서 사람을 불러올 필요가 없죠.”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안으로 들어와 줄자를 들었다.

“제가 공자님 치수를 재 드릴게요.”

주운환은 하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서서 양팔을 벌렸다. 엽연채가 앞으로 다가서자 그녀의 정수리가 그의 입 부분에 닿았다. 은은한 향기가 주운환의 코끝에서 감돌았고 그녀의 아담한 몸은 금방이라도 그의 품에 폭 안길 것만 같았다.

그러자 주운환은 저도 모르게 그녀가 다쳤던 그날 밤 일이 떠올랐다. 외딴 산비탈 아래 가녀린 소녀가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는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기억을 누르려 했지만 그럴수록 자꾸만 더 생각이 나면서 호흡이 조금 불안정해졌다.

엽연채는 허리 치수를 재더니 뒤쪽으로 가 그의 팔과 어깨, 등 치수를 잰 다음 다리의 치수도 쟀다.

“다 됐어요.”

얼마 지나지 않아 엽연채는 탁자로 걸어가더니 그의 치수를 조그만 수첩 위에 기록했다. 주운환은 ‘네.’ 하고 대꾸하더니 의자에 앉았고 더는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저 때문에 번거로우셨죠?”

“별일 아닌걸요.”

주운환의 담담한 대꾸에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수첩을 챙겨 밖으로 나갔다. 주운환은 창문을 통해 그녀의 뒷모습이 문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바라보고 나서야 눈길을 거두었다.

궁명헌으로 돌아온 엽연채는 탁자 앞에 몸을 숙였다. 그녀는 치수를 들여다보면서 주운환의 옷에 어떤 것을 더해야 좋을지 곰곰이 고민했다.

엽연채가 도안을 그릴 때, 혜연과 추길은 파초나무 아래에 숨어 둘이서 속닥거리고 있었다.

“아가씨가 셋째 공자님께 너무 잘해 주시는데. 무슨 일이 있든 셋째 공자님을 생각하시잖아.”

혜연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며 추길의 말을 받았다.

“셋째 공자님은 아가씨의 은인이잖아! 저번에 인신매매범에게 붙잡혀 갔을 때 공자님이 구하러 가지 않았다면 아마……. 그러니 이런 게 뭐 대수라고.”

“하지만 부부로 지내지 않기로 했는데 이렇게 가까이 지내는 건 좀 아니지.”

추길이 작은 목소리로 반박했다. 혜연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진지한 얼굴로 대꾸했다.

“셋째 공자님께 잘해 드리는 건 나도 찬성하는 바야. 사실 우리가 아가씨보다 셋째 공자님께 더 잘해 드려야 해. 하지만 치수를 재는 것처럼 가까이 붙어야 하는 일은 앞으로 우리가 하겠다고 하자.”

“응응.”

추길이 고개를 힘껏 끄덕였다.

“너희 거기서 뭐라고 속닥거리는 거니?”

갑자기 누군가가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소리쳤다. 추길과 혜연이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녹지가 음흉한 표정으로 대문 앞에 서 있었다.

“누가 여기서 소란을 피우는 게냐.”

엽연채도 그 목소리를 듣고 이리 말하더니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계단에 서서 눈썹을 살짝 추켜세웠다.

“아, 녹지가 왔구나. 그래, 무슨 일로 왔느냐?”

녹지가 둥근 얼굴에 냉소를 띤 채 말을 전했다.

“마님께서 셋째 마님을 부르십니다.”

그러고는 휙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부르면 부른 거지, 왜 저렇게 떽떽거려?”

추길은 그녀를 쏘아보며 작게 볼멘소리를 했다.

눈을 가늘게 뜬 엽연채는 진씨가 무슨 일로 자신을 부르는지 대번에 짐작하고는 걸음을 내디뎠다.

“가자꾸나!”

추길과 혜연은 진씨가 또 무슨 소란을 피우려나 궁금해하며 대문을 걸어 잠그고 엽연채와 함께 문을 나섰다.

세 사람은 수양버들이 심긴 오솔길을 따라 금세 일상원에 도착했다.

일상원 서차간의 분위기는 대단히 무거웠다. 진씨는 굳은 표정으로 침상에 앉아 있었고 강심설은 그녀를 보더니 질투 어린 눈빛으로 그녀를 흘겨보았다. 그리고 주묘서도 진씨 바로 옆에 놓인 수돈 위에 앉아 있었는데 눈시울을 붉힌 채였다.

“어머님.”

엽연채가 인사를 올리자마자 진씨는 싸늘한 목소리로 호통을 쳤다.

“이 시어머니가 네 안중에 있기는 한 게냐?”

엽연채는 냉담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어머님, 무슨 일로 이러시는 겁니까?”

“지금 무슨 일로 이러느냐고 물었느냐?”

‘탁’ 소리가 나더니 흐릿한 봉황 문양 금박이 붙어 있는 초대장이 찻상 위로 던져졌다.

“이게 무엇인 줄 아느냐?”

엽연채는 평온한 얼굴로 답했다.

“태자비 마마께서 보내신 초대장입니다.”

진씨는 화가 머리끝까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네가 무슨 수로 사람들의 눈을 피해 태자비 마마께 들러붙게 됐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까지 속이려 드는 것이냐!”

그러더니 손에 든 찻잔을 엽연채의 얼굴로 홱 던져 버렸다.

엽연채는 진씨가 갑자기 이런 행동을 할 거라곤 생각지도 못해 그만 얼어붙어 버렸다. 미처 손으로 막을 새도 없이 찻잔이 날아들었는데, 그 순간 사람 그림자가 휙 나타나더니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촥’ 소리와 함께 찻물이 그 사람 몸으로 쏟아졌다.

엽연채가 얼빠진 표정으로 고개를 드니 자신의 앞을 가로막고 있는 주운환이 보였다.

“셋째 공자…….”

차에 흠뻑 젖은 그의 상반신과 목에 생긴 붉은 자국도 눈에 들어왔다.

주운환은 흥건히 젖은 가슴 앞부분에서 화끈거리는 통증이 느껴졌다. 이렇게 뜨거운 차를 얼굴로 집어 던지다니!

주운환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노를 느껴 낯빛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어머니, 어떻게 이렇게 뜨거운 차를 이 사람의 얼굴에 뿌리실 수가 있습니까. 이 사람의 얼굴을 망가뜨리고 싶어 그러신 겁니까?”

진씨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자신의 시커먼 속내를 낱낱이 드러내고 있다는 생각이 든 것이었다.

“이런 불효막심한 것! 지금 무슨 망발을 하는 게냐? 네 내자가 한 짓은 생각도 안 하는 게냐?”

“이 사람이 무슨 짓을 했는지요?”

주운환은 대놓고 입꼬리를 올려 비웃음을 날렸다. 그러곤 주묘서를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혼담 이야기를 꺼내고 싶으냐?”

그 말에 진씨와 주묘서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들이 반박할 새도 없이 주운환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사람이 묘서를 데리고 밖에 돌아다니기를 바라십니까? 부탁할 게 있으시면 예의를 갖춰 행동하셔야죠. 이 사람을 통해 이익을 취하려 하시면서도 이 사람의 체면을 구기려 하시다니요.”

주운환이 냉랭한 목소리로 정곡을 찔렀다.

진씨는 화가 치밀어 올라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쳤다.

“부탁을 해? 어? 내가 네 내자에게 사정이라도 해야 한다는 말인 게냐?”

“부탁할 게 없으셨나 보군요. 그럼 전 이 사람과 이만 물러나겠습니다.”

그러더니 주운환은 엽연채의 부드럽고 작은 손을 잡아끌며 밖으로 나가려 했다. 진씨는 그만 뒤로 넘어갈 뻔했으나 이를 악물고 태자부에서 보낸 초대장을 집어 들었다. 그녀는 비웃듯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

“흥, 이 초대장이…….”

그녀는 엽연채와 주운환이 불안해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주운환은 뜻밖에도 이렇게 말했다.

“어머니, 마음에 드시면 가지세요.”

그러더니 엽연채와 함께 그대로 밖으로 나갔다.

두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주렴만 흔들리고 있었다. 진씨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두 눈을 부릅뜬 채였다. 주묘서는 이 상황이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배꽃 문양이 들어간 비단 손수건을 꽉 움켜쥐었다. 그 곁의 강심설도 넋이 나간 모습이었다.

세 사람은 멀거니 서로의 얼굴만 쳐다보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정신을 차렸다.

진씨가 벌컥 성을 내며 호통을 쳤다.

“셋째 이 불효막심한 놈! 감히 나에게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셋째 도련님이 전에는 그러지 않았는데 말이죠.”

강심설의 말에는 시샘과 미움이 섞여 있었다.

“엽씨를 아내로 맞이하더니 제대로 홀려서 저렇게 불효를 저지르네요.”

강심설은 원래 엽연채가 출신, 외모, 혼수 등 여러 부분에서 자신을 능가하는 데 질투를 느꼈었다. 그런데 오늘 주운환이 엽연채를 보호하는 모습을 보니 더욱 질투심이 타올랐다. 그녀와 주비양은 늘 서로 격을 두고 대했으니 남편의 보호를 받는 엽연채가 눈꼴사나웠던 것이다.

“어머니, 이제 어떡하죠?”

주묘서는 태자부에서 초대장을 보낸 일로 안달이 나 있었다. 그녀는 두 눈을 부릅뜨고 흐릿한 봉황 문양 금박이 붙어 있는 초대장을 뚫어져라 쳐다봤다.

“빌어먹을 계집애가 무슨 수로 태자비에게 들러붙었는지 모르겠구나.”

진씨가 노기 어린 목소리로 욕했다.

방금 전 그녀는 주묘서, 강심설과 함께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런데 녹엽이 초대장 한 장을 가지고 들어오더니 누군가가 엽연채에게 전달한 것이라고 알렸다. 이 초대장은 동쪽 측문으로 보내온 것이니 녹엽이 제 맘대로 엽연채에게 전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 우선 진씨에게 살펴보라고 건넸던 것이다.

초대장을 열어 본 진씨는 그만 아연실색하고 말았다. 태자비가 보낸 초대장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떡하니 쓰여 있는 ‘또 들르시게.’라는 글귀를 보니 엽연채가 태자부를 전에도 방문한 게 틀림없었다.

진씨는 놀라우면서도 화가 치밀어 올라 당장 엽연채를 불러와 자초지종을 캐물으려고 했다. 그런데 입을 떼기도 전에 주운환이 그녀를 데려가 버렸다.

‘빌어먹을 계집애, 비열한 것!’

분명 묘서를 데리고 밖을 돌아다니며 혼처를 구해 준다고 했으면서 태자비의 일을 감쪽같이 숨겼던 것이다.

더군다나 이리 행동한 게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지난번 신양 공주부에 감사 인사를 전하러 갔을 때도 그랬다. 거듭 이렇게 행동하는데, 대체 저의가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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