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1화
“아버지, 상부에 보고해 주십시오.”
주운환이 담담한 어조로 재차 청했다.
“그래요. 그럼 응시하세요. 못 하게 하려는 게 아니라 망신당하고 헛고생할까 봐 그러는 거죠.”
비 이낭은 끝까지 이죽거렸다. 이 집안에서 누가 자신의 아들과 비교가 가능하며 누가 자신의 아들만큼 능력을 보여 줬는가? 설사 이번에 아들이 낙방한다 하더라도 더 못난 놈들 덕분에 그는 상대적으로 돋보일 것이었다.
진씨는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자신의 아들은 가망이 없으니 그저 씨앗이나 까먹으며 저들이 실랑이를 벌이는 모습을 지켜볼 뿐이었다.
* * *
외출했던 태자가 자신의 서재로 돌아왔을 때 날은 이미 저물어 있었다. 오늘은 백여언과 배를 타기 위해 외출한 것이었는데, 점심에 엽연채를 보고 나서 백여언을 만나니 태자는 별다른 감흥을 느낄 수가 없었다.
차를 내오던 이계는 태자의 표정을 보더니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읽어 내고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태자비 마마 처소에서 보았던 그 어린 부인이 참 곱게 생겼죠.”
“그래, 하지만 안타깝게도 임자가 있는 몸이더구나.”
태자가 미간을 찌푸리며 대꾸했다. 혼인 전의 여인이었다면 백여언을 물리고 어떻게 해서든지 그녀를 측비로 삼았을 것이다. 백여언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급이 다른 절세가인이 눈앞에 나타나니 아무리 생각해도 백여언이 전처럼 달갑지가 않았다.
“소인이 알아보니 그 부인이 이름은 엽연채이고 주씨 가문 셋재 부인이라 합니다.”
이계는 엽연채의 배경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태자는 미소를 지으며 안타깝다는 듯 평했다.
“그런 사람이 몰락한 가문에 시집을 가다니. 더군다나 서자에게 시집을 갔단 말이지. 그것 참…….”
“그분도 그 혼인을 달가워하지 않아 줄곧 서자인 부군과 따로 지내고 있다고 합니다.”
이에 태자는 ‘오’ 하고 감탄하더니 반드시 그녀를 손에 넣겠다는 야욕이 가득한 눈빛을 번뜩였다. 그는 평판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늘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행동해 왔다. 만약 엽연채가 공훈이 있는 다른 귀족 가문의 부인이었다면 함부로 그녀에게 손을 뻗칠 생각은 하지 않았을 터였다. 자칫하면 자신에게 오점을 남길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주씨 가문이라면…….’
자신이 엽연채를 원하다는 의사를 밝히면 그녀의 남편이 직접 아내를 갖다 바칠지도 모른다. 게다가 혼인을 못마땅해하는 어린 부인이라면 더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자세히도 알아봤구나.”
태자가 미소를 지으며 칭찬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비밀도 아닌 것을요.”
이계는 미소를 지으며 겸양했다.
“태자비와 그 부인은 어떻게 알게 된 것이냐?”
“얼마 전에 도성에 인신매매범이 출몰하지 않았습니까? 상관운 소저도 잡혀갔었죠. 주씨 가문 셋재 부인도 그중에 있었는데, 도망치다가 발을 헛디뎌 산비탈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바람에 그만 늑골이 부러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부윤과 함께 도성으로 돌아오지 못했다고요.
부군이 어찌어찌 부인을 찾아냈는데 부상이 심한 탓에 일단 근처에 있는 저택으로 찾아가 문을 두드렸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연히도 그 저택이 신양 공주 마마의 별장이었던 거죠.
그곳에서 회복한 뒤 주씨 가문 셋째 부인이 공주 마마 댁에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마침 그곳에 태자비 마마도 계셨던 겁니다. 마마께서 주씨 셋재 부인이 선물한 말린 꽃이 마음에 드셨는지 다음에 태자부로 불러 만들어 달라고 하셨고요.”
태자의 눈빛이 살짝 흔들렸다.
“그 부인이 만든 꽃을 마음에 들어 했다고?”
그러더니 피식 웃었다. 전에 태자비는 저를 붙들어 놓기 위해 그녀의 처소에 어여쁜 시녀들을 데려다 놓았는데, 금슬도 그중 하나였다. 하지만 자신은 그 정도 미모를 가진 여인들은 질리도록 보았다. 더군다나 누구의 처소인들 그 정도 미인이 없겠는가?
엽연채라는 여인도 나를 붙들어 놓기 위한 수단이겠지? 그런 생각이 들자 태자는 갑자기 태자비에게 흥미가 생겼다.
“오늘 밤은 태자비의 처소에 가서 식사를 해야겠구나!”
그러곤 차를 들이켜며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리 말했다.
“곧 있으면 4황자의 생일이구나. 양왕부에 가서 육 측비에게 초대장을 여러 장 달라고 하거라.”
“예. 칠월 이레죠.”
이계가 쯧쯧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양왕 전하께서는 날도 참 잘 골라 태어나셨습니다. 칠월 칠석날에 태어나셨으니까요. 견우와 직녀가 서로 만나는 날이니 참으로 제격이지 않습니까.”
태자는 별말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정화원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식사를 마친 후 태자는 더 머물지 않고 정화원을 떠났다. 석씨는 태자가 떠나간 방향을 바라보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마마, 효과가 즉각적으로 나타났네요.”
그러나 태자비는 못마땅한 투로 대꾸하며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그럼 뭐 하겠나. 여전히 이곳에서 주무시려고 하지 않으시는데.”
석씨는 두 눈을 살짝 깜빡였다. 일이 그리 쉽게 풀릴 리가 있겠는가. 사실 모두들 말만 안 할 뿐, 태자비가 태자가 이곳에서 자고 가길 간절히 바란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엽연채를 그가 있는 침상으로 보내지는 못하더라도, 적어도 하루빨리 그가 보고 만질 수 있게 해야 했다.
* * *
날씨가 점점 선선해지자, 집집마다 다음 달에 있을 향시 준비에 한층 열을 올렸다.
혜연과 추길은 엽연채가 입을 가을 옷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그만 창고에서 비단 두 필을 꺼내와 나한상 위에 올려놓았는데, 하나는 흐릿한 복숭아꽃 문양이 들어간 분홍색과 홍색이 섞인 고급 비단이었고, 다른 하나는 매화 문양이 들어간 안개가 피어오르는 듯한 분위기의 백색 비단이었다.
화본을 보고 있던 엽연채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저번에 태자비 마마께서 하사하신 빙사운금도 꺼내 와 옷을 짓거라. 앞섶이 좌우로 교차하는 유군 두 벌을 만들어 주렴.”
그러더니 책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나 조그만 창고로 걸어갔다. 엽연채는 직접 구름 문양이 들어간 연자줏빛 비단 한 필과 연하늘색 항주산杭州産 비단 한 필을 꺼내 왔다.
“아가씨, 셋째 공자님께 드리려고요?”
혜연이 미소를 지으며 묻자 엽연채는 그렇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가서 여한에게 전해 주렴.”
“예, 아가씨.”
혜연은 비단을 품에 안고 문을 나섰다.
그 시각, 주운환은 난죽거의 조그만 서재에서 서책을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여한은 화초를 가꾸고 있었고 여양은 계단에 앉아 수박을 먹고 있었다.
혜연이 비단 두 필을 들고 걸어오며 인사를 건넸다.
“여한 오라버니. 날씨가 서늘해지니 아가씨께서 이 비단 두 필로 셋째 공자님께 옷을 지어드리라고 하셨어요.”
“옷을 지으라고?”
여한과 여양이 하던 동작을 멈추며 물었다. 남정네 둘은 혜연이 가져온 비단을 보더니 순간 손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먼저 정신을 차린 여한이 얼른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셋째 마님께서 이리 세심하게 신경을 써 주시다니. 한데 어쩌지. 우리는 옷을 지을 줄 모르는데.”
“둘 다 싱겁기는.”
혜연은 ‘풉’ 하고 웃더니 비단 두 필을 회랑 위에 놓인 좌판에 올려두었다.
“두 사람보고 직접 만들라는 게 아니에요. 점포를 찾아가 지어 달라고 하면 되죠.”
말을 마친 혜연은 돌아서서 문밖으로 나갔다.
여한과 여양은 그 비단 두 필을 보고는 서로 얼굴만 쳐다볼 뿐 여전히 어찌할 바를 몰랐다.
“아유, 새 옷이 생겼네. 정말 잘됐어. 음……. 형님, 이걸 가지고 상점에 찾아가 옷을 지어 달라고 해야겠어요.”
여양은 이렇게 말하더니 비단 두 필을 품에 안았다. 그는 문을 나서려고 발걸음을 떼다 다시 되돌아오며 물었다.
“근데 옷을 지으려면 어느 상점에 가야 되지?”
여한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난색을 표했다.
“가서 도련님께 여쭤보자.”
두 사람은 얼른 조그만 서재의 창문 앞으로 걸어갔다.
여양이 말했다.
“공자님, 비단 두 필이 생겼는데 이걸로 옷을 지을까 합니다! 어느 상점으로 가져가야 되나요?”
그러자 주운환은 고개도 들지 않고 말했다.
“모른다.”
“옷을 지으려면 은화는 얼마나 가져가야 될까요?”
“모른다.”
“어떤 형태로 지을까요? 몇 벌을 지으면 될까요?”
“모른다.”
“크기는 어느 정도로 하면 될까요?”
“모른다.”
이내 세 사람 사이에는 정적만이 흘렀다.
“우리 도련님은 외모가 특출나시니 오래된 옷을 입으셔도 멋지셔요! 옷은 안 짓는 편이 낫겠어요.”
여양의 이 말에 주운환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래, 괜히 번거롭구나. 오래된 옷이 좋다.”
여양이 비단 두 필을 들고 궁명헌으로 걸어가니 엽연채와 여종 둘은 나한상에 앉아 한창 의논 중이었다. 어떤 형태의 옷을 만들 것인지, 매듭 단추를 달 것인지 아니면 작은 허리띠를 달 것인지, 어느 부분에 꽃문양을 수놓을 것인지 등 결정할 게 한 무더기였다.
여양은 세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는 헤헤 웃으며 그들 쪽으로 다가섰다.
“셋째 마님,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만, 저희 도련님 옷은 만들지 않아도 될 것 같습니다.”
“어째서?”
엽연채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공자께서는 옷이 별로 없는 것 같던데.”
엽연채는 기억을 더듬었다. 주운환은 올 때마다 몇 벌 안 되는 옷을 번갈아 입었고, 그나마도 옷이 조금 작아 보였다. 그는 이제 겨우 열일곱 살이니 아직 몸이 자라고 있을 터였다.
“지금도 옷은 입고 계시는걸요. 그러니 번거롭게 그럴 필요 없습니다.”
말을 마친 여양은 침상 위에 비단을 내려놓았다.
“셋째 공자께서는 평소에 옷을 안 지어 입으셔?”
추길이 물었다.
“옷 같은 건 어떻게 만드는지 몰라. 집안에서 일이 년마다 몇 벌씩 주시거든.”
여양은 의복 같은 건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엽연채와 여종들은 말문이 막혔다. 그야말로 사랑 못 받는 서자의 전형적인 모습이 아닌가! 끼니마다 백채소육사나 보내고 옷 같은 건 생각이 났을 때 몇 벌 보내는 게 고작인 것이었다. 이마저도 치수는 어림짐작으로 계산해 대충 지었을 게 분명했다.
“전에 옷을 만들지 않은 건 비단이 없어서 그런 거잖니. 이젠 비단이 있으니 가져가서 만들면 되지 않느냐?”
엽연채가 핵심을 찌르자 여양이 머리를 긁적이며 솔직히 대답했다.
“번거로워서 그럽니다. 그냥 있던 옷을 입는 게 편하니까요.”
추길과 혜연은 순간 무슨 말로 대꾸해야 좋을지 생각이 전연 떠오르지 않았다. 엽연채는 옅은 한숨을 내쉬더니 구름 문양이 들어간 연자줏빛 비단을 품에 안고 걸어나갔다.
“어… 셋째 마님?”
여양은 미간을 좁히더니 얼른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엽연채는 난죽거로 걸어 들어가더니 주운환의 작은 서재로 가 창턱에 기대었다. 인기척을 느낀 주운환이 고개를 들자 창턱에 기대어 있는 엽연채가 두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자, 여기 비단 두 필이 있으니 함께 옷을 지어요!”
엽연채의 두 눈에선 반짝이는 빛이 흐르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마음이 요동친 주운환은 한순간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럽시다.”
이에 엽연채 뒤에 서 있던 여양은 발을 비끗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