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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130화 (130/858)

제130화

엽균을 본 엽연채의 두 눈에는 비웃음이 어렸다.

엽균은 서차간으로 들어오다가 엽연채를 발견하고는 이내 얼굴에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먼저 말을 걸었다.

“연채야, 무슨 일로 여기 와 있는 게냐?”

엽연채는 ‘피식’ 냉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왜요? 나는 여기에 있으면 안 돼요?”

“그 말이 아니지 않느냐. 너는 꼭 사람 말을 곡해하더라?”

엽균은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핀잔했다. 아버지와 자신이 정랑을 가까이하는 것도 그녀는 이렇게 냉소적인 태도를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엽연채는 자기 행실은 조금도 생각지 않고 이쪽이 정랑과 친하게 지낸다고 탓만 하는 게 분명했다.

“여기 온 걸 보니 무슨 용건이 있나 보구나?”

엽영교는 탐탁지 않은 말투로 물었다. 엽균이 이유 없이 이곳을 찾아오는 일이 거의 없으니 자연히 말도 곱게 나가지 않았다.

“과거 시험을 치르는 사람에게 인삼을 보내지 않습니까? 제가…….”

“네가 뭐?”

엽영교는 냉소를 지었다. 물론 그녀도 엽균이 생략한 부분에서 허서에게도 인삼을 선물하고 싶다는 그의 생각을 읽었다. 엽균은 어떻게든 허서에게 자신의 호의를 보이고 싶어 안달이 난 모양이었다.

“아, 알겠다. 요즘 과거 시험을 치르는 거자에게 인삼을 선물하는 게 유행이라 우리 가문도 인삼을 전부 선물했을까 봐? 큰새언니 몸조리에 쓸 인삼이 안 남았을까 걱정이 돼서 온 거구나?”

엽영교의 말에 엽균의 얼굴이 굳었다. 이 말까지 나왔는데 어떻게 다시 그 이야기를 꺼낼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는 우물쭈물하며 아무렇게나 둘러댔다.

“제가 괜히 쓸데없는 걸 여쭤봤네요. 그럼 이만 가 볼게요!”

그러더니 부랴부랴 밖으로 걸어 나갔다.

“정말 갈수록 가관이구나. 아비라는 작자가 그 모양이니 아들놈도 저 모양이지.”

묘씨가 고개를 가로저으며 한탄했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발이 또 걷히더니 엽학문이 굳은 표정으로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아버지.”

엽영교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자리를 그에게 내어 주었다.

엽학문은 엽연채를 힐끗 쳐다보며 알은체했다.

“왔구나.”

“예, 할아버지.”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답례했다.

엽학문의 표정은 더욱 미묘해졌다. 요 며칠 그는 분통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장만만의 후보 제명은 그녀를 이용해 태자와 가까워지려고 했던 자신의 계획이 수포로 돌아갔음을 의미했다. 그리고 그건 전부 엽이채 때문이었다.

엽학문은 열불이 나 속이 뒤집힐 지경이었다. 그때 엽이채가 혼사를 가로채지 않아 큰손녀가 제대로 시집을 갔다면 어디 이런 일이 벌어졌겠는가. 지금 엽연채를 보고 있자니 그는 한층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 날이 어두워지니 이만 가 봐야겠어요.”

엽연채는 엽영교가 준 인삼과 문방사우를 챙기며 자리를 떨쳤다.

“그래. 조심히 가거라. 네 어머니에게도 인사를 드리고 가렴.”

묘씨가 살갑게 대꾸했다.

엽연채는 인사를 올린 후 문밖을 나섰다. 그러곤 온씨 처소로 가서 작별 인사를 건넨 뒤 정국백부로 돌아갔다.

* * *

정국백부 서과원으로 돌아온 엽연채는 궁명헌으로 가지 않고 난죽거로 발걸음을 옮겼다.

여한은 정원에서 꽃에 물을 주고 있었고 여양은 바닥을 비질하고 있었다. 엽연채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는 주운환도 외출하지 않았음을 짐작했다. 그는 오전에는 수업을 들으러 가고 오후에는 외출해 볼일을 보았는데, 그럴 때 주로 여양을 데려갔다.

“셋째 공자님께서는?”

“작은 서재에 계십니다.”

엽연채가 묻자 여양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답했다.

엽연채가 난죽거의 작은 서재로 들어가니 주운환은 커다란 탁자 앞에 앉아 서책을 보고 있었다. 겉표지를 보니 사서四書 중의 한 권이었다.

엽연채가 깜짝 놀라 물었다.

“공자, 정말로 과거 시험을 보시려는 거예요?”

주운환은 서책을 내려놓더니 잘생긴 얼굴을 살짝 붉혔다.

“네. 요즘 집에서 시험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엽연채가 인삼과 문방사우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을 받았다.

“가져오기를 잘했네요.”

주운환도 이것이 무엇인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

“벌써 선물을 보내기 시작한 겁니까?”

“네. 이번 향시가 팔월 열엿새잖아요. 한 달 반밖에 안 남았으니 이제 슬슬 선물을 보낼 때죠.”

엽연채가 빙그레 웃으며 답하자 주운환은 이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서 아버지께 응시 원서를 제출해 달라고 말씀드려야겠군요.”

“아직 제출하지 않으셨어요? 각지에서 3개월 전에 접수가 마감되었다고 알고 있는데요.”

엽연채가 초조한 목소리로 걱정했다.

“도성은 조금 더 늦어도 됩니다.”

탁자를 돌아 나온 주운환은 이미 방문을 나서고 있었다.

주운환은 우선 바깥뜰에 있는 주 백야의 서재로 갔는데,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하인에게 물었더니 그는 지금 일상원에 있다고 했다. 주운환은 하는 수 없이 일상원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일상원은 주종과의 약혼녀인 설옥인이 방문하면서 사람들로 북적북적했다. 설옥인은 나이 지긋한 마마媽媽와 함께 왔는데 그녀는 설옥인 주모主母의 심복이었다. 오늘 두 사람이 방문한 건 주종과와 설옥인의 혼사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 위함이었다.

“이건 과거 시험 선물입니다.”

노마마가 미소를 지으며 인삼과 옷감을 꺼내 놓았다.

“올해 둘째 공자님께서 과거 시험에 합격하시기를 기원합니다.”

뜨뜻미지근한 미소만 짓는 진씨와 달리 주 백야는 매우 기뻐하며 대꾸했다.

“그 말대로 이뤄지면 좋겠구먼.”

비 이낭은 냉큼 득의양양한 얼굴로 자랑했다.

“얼마 전 종과 도련님의 스승님께서 도련님의 책론이 향상되었다고 칭찬하셨죠.”

그 말에 이로 해바라기씨를 까먹고 있던 진씨가 ‘풉’ 하고 실소를 터뜨렸다. 해마다 과거 시험을 보지만 매번 낙방하는데 올해라고 붙을 수 있겠는가?

주종과는 덕담을 듣고 기분이 좋았지만 그것도 잠시, 자신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설옥인을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는 과거 시험에 붙으면 그녀를 퇴짜 놓을 방법을 강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저 여인은 비천한 서출의 자식인 서녀였다.

‘셋째도 지체 높은 가문의 적녀를 아내로 맞이했는데, 나라고 안 될 게 뭐가 있겠어?’

“참, 둘째 공자님과 저희 아가씨의 나이가 적지 않은데 혼례식 날짜는 언제로 정하는 게 좋을까요?”

노마마가 본론을 꺼냈다.

그러자 설옥인의 조그만 얼굴이 연기라도 피어오를 듯 붉게 달아올랐다. 어떻게 자신 앞에서 이 이야기를 꺼낸다는 말인가? 그것도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 앞에서!

그러나 노마마는 그녀가 부끄러워하든 말든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봤자 서녀 아닌가. 자신은 어서 혼례식 이야기를 꺼내 날짜를 정하고 돌아가서 안주인에게 보고하면 그만이었다.

“내가 적모이기는 하나 그래도……. 비 이낭, 자네가 정하게나.”

진씨가 귀찮다는 듯 비 이낭에게 질문을 넘겼다. 이에 비 이낭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예전 같았으면 서둘러 혼례식 날짜를 정하고 말 나온 김에 세세한 부분도 논의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셋째 그 보잘것없는 놈도 엽연채 같은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는데, 내 아들도 그러지 말라는 법이 어디 있어?’

비 이낭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따가 책력을 한번 살펴보죠. 근데 제 생각에는 종과 도련님의 과거 시험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시험이 끝난 후에 정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그러나 노마마는 눈을 희번덕거리며 딱 잘랐다.

“날짜를 정한다고 바로 혼례식을 올리는 것도 아니니 날짜부터 고르시죠! 그동안 시간이 충분했을 텐데 아직도 날짜를 고르지 않으신 겁니까?”

그녀는 이곳에 또 오고 싶지 않았다.

“그러게 말일세. 우선 날짜부터 정하세.”

주 백야가 끼어들며 비 이낭을 쳐다봤다.

“전에 날짜를 골랐다고 하지 않았소? 시월 스무날로 골랐다고 했잖소.”

“백야께서 말씀하셨으니, 그럼 시월 스무날로 하시죠.”

노마마는 쇠뿔을 단김에 뽑고자 했다.

“백야, 서둘러 혼인 전 의례를 치르고 신부를 맞이하시죠.”

비 이낭의 표정이 확 굳었다. 그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시월 스무날 전에 이 혼사를 물릴 생각이었다.

“셋째 도련님과 셋째 마님께서 오셨습니다.”

이때 밖에서 녹엽이 발을 걷으며 알렸다.

주운환과 엽연채가 안으로 걸어 들어와 진씨와 주 백야에게 인사를 올렸다.

“아버지, 다음 달 향시에 저도 응시할 것이니 신청서를 제출해 주십시오.”

주운환은 뛰어난 재능을 가진 것도 아니고 공명功名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주씨 가문은 몰락한 집안이라지만 공훈이 있는 귀족이기는 했다. 공훈 귀족은 조상의 공적 덕분에 원시院試(정식 과거 시험에 참가할 자격을 얻기 위해 먼저 치르는 시험)를 치르지 않고 바로 향시에 참가하는 거자가 될 수 있었다. 주운환도 부친을 통해 과거 시험에 응시하겠다고 상부에 보고를 올리고 시험장에 들어갈 요량이었다.

“뭐라고요? 셋째 도련님도 과거 시험을 보려고요?”

비 이낭은 깜짝 놀라더니 이내 무슨 우스갯소리라도 들었다는 양 ‘아이고’ 하며 엽연채를 쳐다봤다.

“분명 셋째 마님께서 부추기신 거겠죠. 그러나 셋째 마님, 셋째 도련님은 그럴만한 재목이 아닙니다. 괜히 시험장에서 며칠 헛고생만 하겠죠.”

엽연채는 그녀를 노려보더니 설명하기도 귀찮다는 투로 면박했다.

“당신과 무슨 상관이란 말입니까?”

그러더니 주 백야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버님, 지금도 응시 원서를 낼 수가 있습니까?”

“가능하단다.”

주 백야는 주운환에게 희망을 품고 있는 건 아니었지만 아들이 과거 시험에 응시한다는데 말릴 이유도 없었다.

주종과는 엽연채가 주운환을 위해 애쓰는 모습을 보자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이내 주운환이 머지않아 낙방해 그녀에게 실망을 안길 상상을 하곤 속이 후련해졌다.

주종과는 입꼬리를 씨익 올려 주운환을 비웃었다.

“운환아, 요즘도 수업 시간에 잠을 자던데 시험을 치지 않는 편이 낫지 않겠니?”

이에 주 백야도 걱정스러운 눈길로 주운환을 쳐다봤다. 그는 꿈속에서마저 집안에서 학자가 배출되기를 바라는 사람인지라 아들들을 가르치는 등 부자에게 자식들의 학업 성적을 자주 물어보곤 했다.

싹수가 노란 적장자는 매번 백지 답안을 제출했고, 셋째 아들은 가끔 숙제를 해 가기는 했으나 수업 시간에는 늘 잠만 잤다. 열심히 학문을 익히는 건 차남뿐으로, 썩 잘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진지하게 임했다.

더군다나 지난 두 달 동안 등 부자가 주종과의 책론을 연거푸 칭찬하자 주 백야는 순식간에 주종과에게 믿음이 생겼다. 장차 주씨 가문에 영광을 가져올 사람은 점차 두각을 드러내고 있는 차남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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