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9화
엽연채는 마차 안에서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평소처럼 행동하면 되며 태자비나 태자에게 과하게 살갑게 굴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저 흘러가는 상황에 맞춰 적절히 행동하면 충분했다.
‘그리고 시간이 좀 흐른 뒤 장씨 가문에 가서 그 고양이를 가져온 다음, 태자의 서재로 들어갈 방법을 모색하면 돼.’
잠시 후, 마차는 정안후부에 도착했다. 엽연채가 마차에서 내리자 마침 주위에 있던 마마媽媽가 그녀를 보고는 미소와 함께 알은체했다.
“큰아씨께서 오셨군요.”
엽연채는 그 마마가 이전과는 달리 자신에게 쌜쭉한 모습을 보이지 않자 속으로 그녀를 비웃었다. 친정 사람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에 다소 변화가 생기자 하인들 역시 전처럼 기고만장하게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자신을 대하지 않았다. 장만만이 간택에서 탈락했고 그 잘못이 모두 엽이채에게 돌아간 탓이었다.
엽연채가 수화문으로 들어서려는 찰나, 등 뒤에서 마차의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정안후부 마차가 가까운 곳에 멈춰 서고 있었다. 여설이 먼저 마차에서 뛰어내리더니 손씨를 부축했다.
엽연채는 두 사람을 보고는 검은 눈썹을 추켜세웠다. 추길은 두 사람을 보고 기뻐하며 앞으로 달려가더니 전에 손씨가 하던 못된 말버릇을 그대로 따라 했다.
“어머, 둘째 마님이 아니십니까? 어디 다녀오시는 길이세요? 장차 황제 폐하의 친척이 될 장 소저 댁에 다녀오시는 길인가요?”
손씨는 얼굴을 붉으락푸르락하며 그녀에게 손찌검하려고 했다.
“이런 망할 년을 봤나. 네가 한번 맞아 봐야 정신을 차리겠구나!”
“숙모,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엽연채가 냉소를 지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추길은 잽싸게 내빼 엽연채 뒤로 숨으며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둘째 마님, 왜 사람을 죄 없이 때리려고 하세요? 다 전에 둘째 마님이 하셨던 말씀이잖아요. 전 그냥 궁금해서 여쭤본 것뿐인데요.”
손씨는 분통이 터져 피를 한 사발 토할 것 같은 심정이었다. 전에 그리 우쭐대며 잘난 척해댄 탓에 지금은 수치심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장만만이 태자 측비 간택에서 탈락했는데, 그 이유는 엽이채와 장박원이 엽연채의 혼례식 날 함께 도망쳤기 때문이었다. 그 소식을 들은 손씨는 대경실색해 문밖을 나설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아이를 가진 딸이 어떻게 지내고 있을지 신경 쓰여 결국 집을 나섰다. 장씨 가문에 도착한 그녀는 딸이 우울해하긴 해도 배는 멀쩡한 걸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연채 너는 아랫것 교육을 이리하느냐?”
손씨는 씩씩거리며 따지더니 이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비아냥거렸다.
“사람들이 비웃는 거야 시간이 좀 지나면 잊혀지지만 서자에게 시집간 건 한평생 겪어야 할 일이지!”
추길과 혜연은 찬웃음을 띤 얼굴을 마주하곤 표정이 확 굳었다.
“우리 이채는 지금 편안한 마음으로 태교에 전념하고 있단다. 내년에는 분명 건강한 사내아이를 출산할 게다.”
그렇게 말하며 손씨는 엽연채의 홀쭉한 허리를 쓱 쳐다봤다. 엽연채는 하필이면 오늘 앞섶이 좌우로 교차하는 유군을 입은 터라 본래도 가느다란 허리가 더욱 가늘어 보였다.
“혼례식을 올린 지 벌써 반년이 다 되어 가는데 연체 너는 여전히 선이 곱구나. 허리가 이리 잘록하니 배꼽이 붙어 있을 자리나 있을지 모르겠네. 이채는 배가 볼록 튀어나왔는데 말이야.”
그녀는 아이가 들어서지 않은 엽연채를 비웃었다.
“그러고 보니 칠월이네. 향시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아 우리 이채는 집에서 태교에 전념하며 부군이 편안한 마음으로 시험 준비에 몰두할 수 있도록 곁에서 보필하고 있는데, 연채 너는 하루 종일 한가해서 이렇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는구나.”
엽연채가 냉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장박원에게 행운이 따르길 바라요! 부디 시험에 붙었으면 좋겠네요.”
전생에서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장박원은 집으로 돌아와 이게 다 자신을 아내로 맞이했기 때문이며 자신이 소란을 피워 과거 시험 준비에 매진하지 못해 낙방한 것이라고 탓을 돌렸다. 그러니 엽연채는 정말 자신 때문에 그가 낙방했는지 두고 볼 셈이었다.
엽연채의 말에 손씨는 콧방귀를 뀌며 수화문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사위가 누구인가? 바로 소년수재 아니던가.
‘사위가 이번 과거 시험에 합격하고 내년에 있을 춘시春試에서 진사 급제와 장원 급제를 하면 오늘의 치욕은 한 번에 씻을 수 있다.’
엽연채는 영귀원으로 향했다. 채 마마가 정원에서 화초를 가꾸고 있다가 그녀가 문을 들어서는 모습을 보더니 얼른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큰아가씨, 오셨…….”
“쉿!”
엽연채는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대며 조용히 하라는 손짓을 했다. 그러더니 채 마마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끌어당기며 서쪽 곁채의 낭하로 걸어갔다.
“어머니 몸은 괜찮아지셨어요?”
“많이 좋아지셨어요.”
채 마마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특히 장씨 가문의 그 소식을 들으시더니 추잡한 짓거리를 한 엽이채와 장박원이 업보를 치렀다면서 이게 인과응보가 아니면 무엇이겠냐고 하셨어요. 덕분에 기분이 한결 밝아지셨답니다.”
“엽승덕은 돌아오지 않았죠?”
채 마마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그가 오지 않았음을 전했다.
“오라버니는 왔었어요?”
엽연채가 재차 묻자 채 마마는 노기 가득한 표정을 짓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답했다.
“오지 않으셨어요.”
지난번 일로 엽균이 그 외실 편에 섰다는 게 분명히 드러났다. 이 두 여인은 굳이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채 마마의 말에 엽연채의 낯빛은 어두워졌다. 정말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는 종자였다. 친어머니가 병석에 누워 있는데도 한 번도 보러 오지 않고 외실에게 잘 보일 생각만 하고 있다니!
“연채가 왔나 보구나?”
이때 방 안에서 온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
엽연채는 그녀의 부름에 답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서차간에 자리한 온씨는 매화 무늬가 들어간 구럭을 손에 들고 있었다. 그녀는 엽연채를 보며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와서 한번 대 보거라. 어울리는지 아닌지 보자꾸나.”
엽연채는 온씨가 찬찬히 살펴볼 수 있게 구럭을 옷에 대 보았다. 일상복을 입고 있는 온씨는 조금 야위어 보였지만 그래도 얼굴에 혈색이 돌고 있었다.
엽연채는 그 모습을 보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머니, 저희 올해는 별장에 한 번도 가지 않았잖아요. 그러니 제 별장에 가서 며칠 푹 쉬다 오시는 건 어떠세요?”
그 말에 온씨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은 칠월이 아니더냐? 좀 있으면 중원절中元節(조상을 포함해 모든 혼령과 귀신이 땅으로 내려온다고 믿는 날로, 조상에게 제사 등을 지내는 명절)인데 이런 때 외출하는 사람이 어디 있니? 어미는 안 가련다!”
엽연채의 미간이 실그러졌다. 그녀는 엽승덕이 온씨를 건드릴까 봐 걱정하던 차였다. 그런데 온씨가 거절하자 갑자기 다른 생각이 들었다.
‘아니지. 별장에 가면 그곳에는 사람이 적으니… 도리어 마수를 뻗기 더 쉽지 않을까?’
이때 온씨가 미소를 지으며 대화를 일단락했다.
“어서 할머니 처소로 가서 문안 인사를 드리고 오거라.”
“네, 어머니.”
영귀원 문을 나선 엽연채가 물가를 따라 걸어가니 이내 안녕당에 도착했다. 안녕당 문안으로 들어서자 엽영교가 동쪽 곁채의 낭하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연채야, 왜 이제야 왔어.”
엽영교가 입을 삐죽거리며 먼저 말을 붙였다.
“제가 친정에 온 걸 벌써 아신 거예요?”
“그럼! 지금 집안일을 관장하는 사람이 누구더라?”
엽영교는 헤죽거리며 자신만만한 투로 대꾸했다.
“수화문에 어멈들이 있잖니. 네가 오면 바로 나에게 보고하라고 했어. 그러잖아도 널 보러 가려던 참인데 네가 먼저 온 거야.”
엽영교는 그리 말하며 엽연채 곁으로 걸어왔다.
“가자꾸나. 가서 어머니께 문안 인사를 드려야지.”
두 사람은 팔짱을 끼고 안녕당 안으로 들어갔다.
엽연채는 묘씨에게 문안 인사를 드린 후 권의에 앉았다.
“집안에 야생 산삼이 몇 개나 남았느냐?”
묘씨가 엽영교에게 물었다.
“대여섯 개 정도 남았어요!”
엽영교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선물을 보내야 할 곳이 많아도 너무 많아요. 장국후부, 진씨 가문, 육씨 가문……. 다들 집안에 과거 시험을 보는 사람이 있잖아요. 친분이 있는 집안에 모두 선물하느라 삼이 거의 바닥이 났어요.”
대제에는 과거 시험이 있을 때 인삼을 선물로 보내는 풍습이 있었다. 이는 본래 가난한 집안에서 생긴 풍습으로, 평소에는 인삼을 사 먹을 꿈도 못 꾸는 형편이라 해도 과거 시험을 준비하는 귀한 자식이 있다면 솥단지를 팔아서라도 인삼 몇 뿌리를 사서 몸보신을 해 주었다. 그 모습을 본 친척들도 공부하는 아이의 보신을 위해 인삼을 선물했다. 이렇게 백성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것이 어느 사이에 풍습으로 자리 잡은 것이었다.
물론 귀족과 부자들은 돈이 부족한 사람들이 아닌지라 평소에도 인삼을 먹고 싶으면 언제든 먹을 수 있었지만 그래도 그 풍습을 따랐다. 인삼을 먹지 않으면 과거 시험에서 낙방이라도 하는 양 지인들은 거자擧子(과거 응시생)가 있는 집안에 꼭 인삼을 선물했다.
“연채의 부군에게도 한 뿌리 선물하렴.”
“벌써 다 준비해 놨어요. 딱 보내려고 했는데 본인이 직접 받으러 왔네요.”
엽영교는 묘씨의 말에 이리 대꾸하고는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이에 엽연채가 잠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더니 거절했다.
“아이참, 괜찮아요. 공자님은 과거 시험을 치르지 않는 걸요.”
“응시하지 않는다고?”
엽영교가 고개를 갸우뚱하며 물었다.
“지난번에 이채가 친정에 방문했을 때 네 아버지가… 흠, 과거 시험을 보라고 하지 않았어? 네 부군이 분명 응시하겠다고 대답했는데.”
“그랬었지!”
묘씨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녀도 주운환이 그리 말하는 걸 똑똑히 들었다. 어찌 됐든 간에 시험을 친다고 하면 선물을 해야 마땅했다.
엽연채는 잠시 생각했다. 전에 주운환은 과거 시험을 치르지 않을 거라고 밝혔는데 나중에 과거 시험을 보라는 엽승덕의 말에는 그리하겠다고 대꾸했다. 그냥 나오는 대로 한 말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어서 한 말인지 알 수 없어 엽연채는 엽영교가 준비한 선물을 더는 거절하지 않기로 했다.
엽영교의 여종 옥패가 밖으로 나가더니 잠시 후 문방사우와 인삼이 들어 있는 녹나무 상자 두 개를 들고 돌아왔다.
이때 밖에서 단단한 합판으로 만든 발이 걷히더니 엽균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할머니, 고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