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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128화 (128/858)

제128화

태자는 성가셔서 더는 견딜 수가 없는 심정이었다. 어제가 초하루라 태자비 처소로 가서 함께 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물론 정말로 단순히 잠만 잤지만 어쨌든 그녀의 처소에 들리긴 한 건데, 왜 또 찾아와서 이리 귀찮게 군다는 말인가?

“지금 바둑을 두고 있는데 중요한 순간이니 사람을 시켜 떡을 보내거라!”

그러나 태자의 냉담한 거절에도 석씨는 물러서지 않았다.

“전하, 마마께서 직접 만드신 겁니다. 차도 끓여 놓으셨고요. 전하께서 가지 않으시면 마마께서 직접 끓이신 차를 맛보실 수 없습니다.”

태자는 오늘따라 석씨가 눈치 없이 행동한다고 언짢아했다. 그러나 이런 일로 정색하며 그녀를 나무라면 자신의 품위에 손상이 간다고 생각해 결국 수긍했다.

“먼저 가 보거라. 이번 판을 마치면 바로 건너가마.”

“예, 전하.”

석씨는 기뻐하며 돌아섰다.

그녀가 떠난 후 태자는 두 수를 더 놓았지만 더 이상 바둑을 둘 기분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계는 바둑 실력이 평범한지라 한 번도 자신을 이겨 본 적이 없었다.

“가자꾸나!”

태자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이계를 데리고 정화원으로 향했다.

태자는 늘 무덤덤한 태도로 태자비를 대했다. 그녀는 명망 높은 학자 가문인 요씨 가문 출신인 데다 아버지도 형부상서刑部尚書라 혼인 전부터 재학才學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외모가 좀 별로이기는 했지만 그래도 태자는 평판 좋은 그녀를 정비로 들였고, 이 혼사에 대체적으로 만족했다.

그러나 그 후로 잇달아 두 명의 측비를 맞이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풍씨 가문이 갑자기 두각을 드러내자 그는 점점 더 풍 측비를 중요시하게 되었다. 또 다른 측비는 2년 전 난산 끝에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세상을 뜨지 않았으면 지금 측비를 다시 간택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하나 태자는 그녀의 죽음이 잘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이리 떳떳하게 백여언을 측비로 맞이할 수 있었겠는가?

풍 측비의 친정은 갈수록 세력이 막강해지고 백여언은 아름다운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에 반해 태자비는 별다른 장점이 없었다. 욕망을 불러일으키는 외모를 가진 것도 아니며 가세도 풍 측비의 친정만 못했다. 게다가 태자비가 낳은 적장자는 이미 세상을 떠났다.

태자는 황후의 자리에 앉을 사람이 꼭 그녀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어도 된다는 생각을 품게 됐다. 그러니 자연히 태자비를 점점 더 귀찮은 존재로 여기게 됐다.

규율 때문에 매달 초하루와 보름에 그녀의 처소에 가서 함께 저녁 식사를 하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한 침상에서 자는 것일 뿐, 요 1년 동안 그녀의 몸에는 손끝 하나 대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태자는 이미 정화원 문을 들어서고 있었다.

밖에 있던 시녀들이 그를 보더니 잇달아 예를 올렸다.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태자는 대꾸도 하지 않고 곧장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차를 끓이고 말린 꽃을 만들던 시녀들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예를 올렸다.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태자비는 침상 오른편에 앉아 있었다. 태자는 성큼성큼 걸어가 왼편에 자리했다.

“전하, 신첩이 만든 매괴수정고를 드셔 보시지요!”

태자비가 미소를 지으며 권하자 태자는 건성으로 떡 하나를 집어 들어 입에 물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온몸이 경직되더니 입 안에 든 떡을 씹는 것조차 잊고 말았다.

하좌 왼편에는 두 명의 소녀가 앉아 말린 꽃을 만들고 있었는데, 커다랗고 긴 녹나무 탁자 위에는 붉은색, 분홍색 등 아름다운 빛깔을 뽐내는 장미꽃이 가득 깔려 있었다. 그러나 장미가 아무리 고운 빛깔을 뽐낸다 한들 한 소녀의 매혹적인 눈빛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 소녀는 고개를 숙인 채 탁자 위에 놓인 꽃을 살며시 어루만지고 있었다. 머리에 꽂은 해당화 장식의 순금 술이 귀밑머리 부분에서 찰랑거리자 그녀의 조그마한 얼굴이 연꽃처럼 환하게 빛났다.

그녀는 태자의 시선을 느꼈는지 기다란 속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자 빛을 받은 눈썹의 아름다운 곡선이 태자의 눈앞에서 어른거렸다. 반짝이는 눈동자가 뿜어내는 휘황찬란한 빛이 일렁이며 그의 곁으로 다가오는 것만 같았다. 살짝 올라간 눈꼬리는 부담스럽지 않은 요염함을 풍기고 있었고, 시선을 아래로 드리운 눈동자와 살짝 찌푸린 눈썹에선 고상하고 아름다운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그 모습에 태자의 마음은 요동쳤고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태자는 그 자리에 그대로 굳은 채 넋을 놓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태자는 지금껏 살면서 이런 절세미인을 딱 두 명 보았다. 한 명은 후궁의 영 귀비로, 십수 년 전에는 뛰어난 미색으로 도성에서 이름을 떨쳤지만 나이를 먹은 지금은 예전 같지 않았다. 그리고 다른 한 명은 지금 눈앞에 있는 이 소녀였다. 보아하니 열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이긴 한데, 부인들이 하는 머리를 한 걸 보니 혼례식을 올린 지 얼마 안 된 새색시가 틀림없었다.

도성에 이런 절대가인이 있었다니. 다들 도성 제일의 미녀는 상관수의 여식인 상관운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태자가 지금 보니 상관운의 미모도 눈앞의 소녀에게는 조금 못 미치는 것 같았다.

“전하, 차를 드시지요! 신첩이 직접 끓인 매괴차이옵니다.”

태자비가 헛기침을 하더니 손에 든 검은 자기 찻잔을 건넸다. 태자의 넋이 쑥 나간 모습을 보자 그녀의 마음속에는 질투심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녀는 엽연채에게 다가가 그 여우 같은 상판대기를 냅다 긁어 놓고 싶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계획대로 흘러가자 흡족한 마음이 들었다. 마침내 그를 붙잡아 둘 수 있는 사람을 찾아낸 것이다.

“흠, 고맙소. 애비愛妃.”

태자는 자신이 체통을 잃고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자 얼른 시선을 거두었다. 더는 소녀를 쳐다볼 수 없었다. 그랬다가는 사람들이 자신을 경박하고 방탕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었다. 그러나 눈이 호강한 덕인지 태자비도 평소보다 거슬리지 않아 ‘애비’라는 호칭이 불쑥 튀어나왔다.

태자는 차를 다 마신 뒤 입을 열었다.

“오늘은 어째 한가해 보이는구려. 차도 끓이고 말린 꽃도 만들고 있고. 장미꽃을 말리고 있었소?”

그 말을 하고서야 그는 찔리는 것 없이 떳떳하게 엽연채를 쳐다볼 수 있었다.

“신첩은 요즘 이리 지내고 있습니다.”

태자비는 미소를 지으며 담담히 대꾸했다. 그러자 태자는 표정이 굳어지더니 조금 무안해했다. 그녀가 매일 이렇게 지내고 있는데도 그는 전연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유야 뻔한지라 그는 말을 더 꺼내지 않았다.

“전하, 출타하신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벌써 오시午時입니다.”

태자비의 말대로였으나 태자는 이 자리에 더 머물고 싶었다.

“벌써 오시가 됐군. 여기서 식사를 하고 가겠소.”

“그럼 신첩이 밥상을 차리라고 하겠습니다. 금슬아, 너희도 가서 식사를 하거라!”

“예, 마마.”

금슬이 대답하더니 엽연채에게 말했다.

“주 부인, 소인과 함께 식사를 하러 가시지요.”

“그래, 금슬아.”

엽연채가 자리에서 일어섰고 태자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또다시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녀는 앞섶이 좌우로 교차하는 흰색 상의와 붉은색 하의로 이루어진 유군을 입고 있었는데, 수홍색 비단 허리띠가 그녀의 가느다란 허리선을 돋보이게 했다. 날렵한 몸매를 가진 그녀가 그를 향해 천천히 몸을 굽혀 절을 올렸다.

“전하, 마마. 소인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그리하게나.”

태자비가 고개를 끄덕이며 허했다.

“시간이 늦었으니 식사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가도 좋네.”

“예, 마마.”

엽연채와 금슬은 물러갔고 그녀의 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태자는 시선을 거두더니 별 관심 없다는 듯 물었다.

“저 부인은 누구요? 도성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왜 한 번도 못 봤을까?”

“이번에 주씨 가문에서 들인 며느리입니다. 도성에는 사람이 넘쳐나니 못 보셨다 한들 이상할 게 없지요. 밖에 자주 돌아다닌다 하더라도 평범한 귀족들은 저희가 출입하는 장소에 모두 드나들 수 있는 게 아니니 못 보신 거겠죠.”

태자비가 엽연채에게 별다른 흥미가 없는 것처럼 보이자 태자는 더는 그녀에 대해 묻지 않았다.

잠시 후, 시녀가 찬합을 들고 돌아오더니 녹나무 탁자 위에 밥과 반찬을 올렸고 태자는 식사를 마친 후 바로 자리를 떴다. 태자비는 태자가 떠나간 방향을 쳐다보더니 이내 화가 나 콧방귀를 뀌었다.

“조금 더 놔두면 아주 눈이 그 아이 몸에 붙겠더구나! 요망한 계집, 음탕한 것 같으니라고!”

“마마, 참으셔야 합니다! 최대한 빨리 적자를 회임하는 목적을 기억하셔요.”

석씨가 얼른 그녀를 달랬다.

“게다가 저 여인과 태자 전하 사이에 정말로 일이 생긴다 하더라도 일개 부인에 불과합니다. 어찌 마마와 총애 다툼을 벌일 수 있겠습니까? 설령 저 여인이 태자 전하 곁에 있고 싶다 하더라도 태자 전하께서는 품행이 방정하지 못한 부인을 궁으로 들이지 않으실 겁니다. 그랬다가는 20년 넘게 쌓아 온 명성이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될 테니까요.”

그 말을 듣고 나서야 태자비의 안색이 조금 누그러졌다.

* * *

한편, 식사를 마친 후 금슬은 엽연채를 수화문 밖까지 배웅해 줬다. 추길과 혜연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그곳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가씨.”

추길이 배시시 웃으며 다가왔다.

“참 이상해요. 저 두 사람은 왜 항상 주 부인을 아가씨라고 부르는 거예요? 주 부인은 이미 출가하셨잖아요.”

금슬이 웃으며 물었다.

“습관이 되어서 그리 부르는 거란다.”

조만간 엽연채가 주운환과 헤어질 테니 추길과 혜연은 호칭을 바꿀 필요를 느끼지 못했다. 속사정을 모르는 금슬은 엽연채의 말을 듣더니 그녀가 과연 혼인에 불만족스러워하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주 부인.”

이때 수수한 옷차림의 시녀가 앞으로 다가왔다. 그녀의 손에는 꽃문양이 들어간 단자緞子(생사生絲 또는 연사練絲로 짠, 광택과 무늬가 있고 두꺼운 수자직의 비단)와 녹나무 상자가 들려 있었다.

“이건 마마께서 부인께 하사하신 겁니다.”

엽연채는 단자를 보더니 깜짝 놀라 물었다.

“이건 무슨 단자이기에 이리 곱니?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것이구나.”

그러자 금슬이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이건 빙사운금冰絲雲錦입니다. 북연에서 바친 공물이지요. 저희 마마께서 세 필을 받으셨는데 그중 한 필을 부인께 하사하신 겁니다.”

“마마께 하사품을 감사히 받겠다고 전해 주렴.”

엽연채가 공손한 자세로 하사품을 건네받으며 인사했다.

“그럼 우린 이만 가 봐야겠구나. 금슬아, 오늘 수고했다.”

엽연채는 작별 인사를 건네며 추길, 혜연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마차가 저택 밖으로 나가자 추길이 놀랍고도 기뻐하는 얼굴로 단자를 매만지며 감탄했다.

“아가씨, 제가 착각한 게 아니었나 봅니다. 태자비 마마께서 아가씨가 정말로 마음에 드셨나 봐요.”

엽연채는 ‘그래.’라고 말하더니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아 참! 경인아, 정안후부에 들려야겠구나.”

엽연채가 마차 벽을 두드리며 말하자 경인이 그리하겠다고 대답한 뒤 채찍을 휘둘렀다. 마차는 이내 모퉁이를 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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