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7화
시간이 흘러 양왕이 열여덟 살이 되던 해, 황제는 그를 위해 신분이 높은 측비를 두 명 들였다. 그 후 양왕의 집안일은 육씨 성을 가진 측비가 도맡아 했다. 귀부인끼리 모임을 가지거나 하면 육 측비가 그 자리에 나갔다. 첩지만 낮을 뿐 정비 행세를 하는 건 육 측비였고, 양왕은 양왕비 조앵기를 집에 가둬 놓아 일 년 내내 그녀는 외출도 할 수 없었다.
헛소문을 퍼뜨리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거리나 찻집에서 양왕비에 관해 악의적으로 떠들어댔다. 어느 날 양왕비가 깊숙한 곳에서 숨을 거두어 썩어 가도 아무도 모를 거라며 그녀를 조롱했다.
전생에서 엽연채는 추길이 늘어놓는 한담을 들으며 양왕비의 모습을 상상해 봤는데, 아마 초췌한 얼굴에 가슴에 원한이 사무친 삼십 대 여인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겨우 열다섯 살쯤 먹은 가냘픈 소녀였다.
엽연채는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양왕비가 세상을 떠난 후 양왕이 새장가를 들었다는 이야기는 분명 들어 본 적이 없음을 떠올렸다.
“여기서 뭘 합니까?”
이때 멀지 않은 곳에서 주운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엽연채가 고개를 들어 보니 꽃밭에 그가 서 있었다.
“공자.”
엽연채가 걸어가며 물었다.
“전하와 무슨 이야기를 나눴어요?”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주운환이 말하고 싶어 하지 않자 엽연채도 더는 캐묻지 않았다.
“방금 전 분홍색 옷을 입은 한 소녀를 보았는데, 열다섯 살 정도 되어 보였어요. 그분이 양왕비이신가요?”
주운환은 순간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분이 양왕비 마마입니다. 스물하나인가, 스물둘쯤 되셨을 겁니다.”
“정말 어려 보이시네요.”
엽연채는 놀라워하며 감탄했다.
“양왕 전하께서 잘 보살펴 주시니까요.”
이렇게 대꾸한 주운환은 이만 가자고 했다.
두 사람은 함께 화원 밖으로 나왔다. 근처에는 평범해 보이는 작은 마차가 서 있었다. 두 사람이 마차에 오르고 한참이 지나서야 마차는 저택 밖으로 나왔다.
* * *
정국백부에 도착하니 날은 이미 저문 후였다. 주운환은 난죽거로, 엽연채는 궁명헌으로 돌아갔다.
“아가씨, 오셨군요!”
추길과 혜연은 줄곧 문 입구에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둘은 엽연채의 모습을 보자마자 얼른 달려왔다.
“한창 맛있게 먹고 있었는데 왜 셋째 공자님께서 아가씨를 불러낸 거예요?”
“연극을 보러 가자고 하셨어.”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이에 혜연은 엽연채가 주운환과 너무 가까이 지내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미간을 찌푸렸다. 어차피 그에게 진짜로 시집을 간 것도 아니니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편이 좋을 터였다.
엽연채와 두 여종은 이야기를 나누며 거처로 돌아갔다.
“아 참, 아가씨. 태자비 마마께서 또 전갈을 보내오셨어요.”
추길이 얼른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그녀는 잠시 후 금박이 붙은 초대장을 가지고 나오며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보세요. 태자비 마마께서 아가씨가 무척 마음에 드시나 봐요.”
“그런가 보구나!”
동조하는 엽연채의 눈에 순간 비웃음이 어렸다.
‘마음에 들면서 동시에 꼴도 보기 싫겠지!’
“전 좀 이상한 것 같아요.”
혜연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아가씨가 만든 말린 꽃이 예쁘기는 하지만, 밖에 나가 보면 예쁜 것들이 차고 넘치는데 왜 굳이 아가씨를 계속 부르시는 걸까요?”
“얘, 너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추길이 급히 반박했다.
“사람마다 취향이 다 다르잖아. 아가씨가 만든 말린 꽃이 태자비 마마의 취향에 딱 맞았나 보지.”
엽연채는 말씨름하는 여종들을 말리지 않고 그저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초대장을 열어 보았다. 갖가지 꽃잎을 다 따 놓았으니 내일 저택으로 와서 말린 꽃을 만들어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장만만이 태자 측비 간택에서 탈락하자마자 태자비가 서둘러 움직이는구나.’
엽연채는 두 눈을 가늘게 떴다.
“참, 장 소저가 태자 전하와 인연이 닿지 않았다죠? 저희가 가서 한번 들여다봐야 하는 거 아닐까요? 지난번에 장 소저께서 아가씨에게 복을 가져다주는 부적을 선물하려고 했잖아요.”
“며칠 지난 후에 가 보자꾸나!”
추길의 제안에 그렇게 대꾸한 엽연채는 양왕이 그녀에게 준 금패를 떠올리고는 두 눈을 살짝 깜빡였다.
“지금 가면 장씨 가문에서는 자기들을 비웃으러 왔다고 오해할 테니, 우선 시간이 좀 흐른 후에 다시 이야기하자.”
“아가씨 말씀이 맞아요.”
혜연이 동의했다. 세 여인은 곧 다른 화제로 담소를 이어 갔다.
* * *
칠월이라 날씨는 선선했다. 태자부는 특수하게 설계되었는데 정화원은 특히 공을 들여 지은 덕에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했다. 한여름에도 방에 얼음 분경을 가져다 놓을 필요가 없을 정도였다.
아침 식사를 마친 태자비는 침상에 앉아 천천히 구럭을 뜨고 있었는데, 정신은 딴 데 팔려 있었다. 석씨와 금슬은 주인의 심기가 뒤숭숭한 줄 잘 알기에 입도 뻥끗하지 못한 채 한쪽에 서 있었다. 오늘은 주씨 가문 셋째 부인, 엽연채가 오는 날이었다.
태자비는 엽연채가 태자를 꾀어낼 생각을 하니 분통이 터졌지만, 그래도 그 미모를 이용해 태자를 붙들어 놓는 게 지금으로서는 가장 상책이라고 여겼다.
반 시진쯤 지나자 수수한 차림의 한 시녀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마마, 주씨 가문 셋째 부인이 도착하셨습니다. 지금 수화문에 계십니다.”
그 말을 들은 태자비가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금슬을 쳐다보자 금슬은 얼른 밖으로 나갔다.
태자비가 석씨에게 물었다.
“태자 전하께서는 지금 처소에 계시느냐?”
“예, 마마. 전하께서는 오늘 쉬고 계십니다.”
태자비는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대화하는 사이, 금슬은 엽연채를 데리고 정화원 안으로 들어섰다. 태자비가 고개를 들어 보니 엽연채는 지난번에 봤을 때보다 더욱 고와 질투심이 일면서 동시에 마음이 서글퍼졌다. 그러나 태자비는 겉으론 미소를 지어 보였다.
“왔구려. 자리에 앉게나.”
“예, 마마.”
엽연채가 밝은 표정으로 인사하자 태자비는 석씨와 시선을 주고받더니 앞에 놓인 기다란 탁자를 가리키며 자리를 권했다.
“여기 앉아서 하게나. 본궁이 무료하던 참이니 만드는 걸 좀 보고 싶군. 게다가 이 꽃은 상쾌한 향기를 풍겨 내가 아주 좋아한다네.”
태자비가 앉은 기다란 침상 오른편에는 다리가 짧고 붉은 칠을 한 커다랗고 긴 녹나무 탁자가 자리했는데, 양쪽으로 부들방석이 깔려 있었다.
엽연채와 금슬은 부들방석 위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기다란 탁자 위에는 붉은색, 분홍색, 하얀색 장미꽃이 펼쳐져 있었다. 두 사람은 면포를 들고 장미꽃을 세심히 닦았다.
왼편에도 기다란 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아리땁게 생긴 두 시녀가 그곳에서 차를 끓였다.
태자비는 상석에 기대어 앉아 덩굴 문양이 들어간 청자 찻잔을 들고 있었다.
“마마, 오른쪽에선 꽃을 다듬고 왼쪽에선 차를 끓이니 운치가 가득합니다.”
석씨가 미소를 지으며 감탄했다.
“그래. 나도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태자비 역시 미소를 띠며 동조했다.
“꽃향기와 차향을 맡고 있으니 기분이 아주 좋구나. 주 부인, 한가할 때 자주 들러 말린 꽃을 만들어 주게나.”
“마마께 말린 꽃을 만들어 드릴 수 있다면 소인에게는 더없는 영광입니다.”
엽연채의 아부에 태자비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자신은 태후와 황후 다음으로 대제에서 가장 존귀한 여인이니 아첨을 하지 않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마마께서도 참…….”
금슬이 미소를 지으며 주인의 비위를 맞추었다.
“마마께서 말린 꽃을 좋아하시면서도 서둘러 만들라 하지 않으셨는데, 알고 보니 주 부인이 만드는 걸 보고 싶으셨던 거군요.”
반 시진쯤 지났을 무렵, 태자비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참, 오늘 아침 내 직접 만든 매괴수정고玫瑰水晶糕가 완성되지 않았겠느냐?”
“소인이 가서 살펴보겠습니다.”
석씨가 물러나더니 잠시 후 쟁반을 들고 걸어왔다. 쟁반 위에는 수정 재질 접시 두 개가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투명하고 윤기가 흐르는 분홍색 매괴수정고가 올려져 있었다.
“마마, 마마께서 만드신 떡이 완성되었습니다.”
석씨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마마께서 만드신 매괴수정고가 이리도 훌륭하니 전하를 모셔와 맛보시라고 하시지요.”
태자비는 두 눈을 살짝 깜빡이더니 그리하라고 응했다. 석씨는 침상 위에 놓인 항탁에 떡을 내려놓고는 밖으로 나갔다.
* * *
태자는 토지개혁과 관련된 일로 지난 며칠을 바쁘게 보낸 참이었다. 이에 황제가 특별히 휴가를 허락했고 태자는 모처럼 한가롭게 휴식을 취하며 서재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함께 바둑을 두고 있는 사람은 그의 모사謀士나 문객門客이 아닌 그를 곁에서 보필하는 환관 이계였다.
태자는 정신을 딴 곳에 둔 채 바둑알을 적당히 내려놓았다.
“할마마마께서 또 측비 후보와 관련해 내게 물으셨다.”
“태후 마마께서는 그저 전하께 관심을 보이시는 것뿐입니다. 장만만 소저 일을 겪고 나니 마음이 쓰이시는 거죠.”
이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머지 두 후보가 태후 마마께 잘 보이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태자는 ‘픽’ 하고 냉소를 지었다. 웃음소리에서 득의양양함이 느껴졌다.
“아무리 노력하면 뭐 하겠습니까? 그분들에게는 그럴 복이 없는 걸요.”
이계의 이 말에 백여언이 다시금 떠오른 태자는 마음이 근질근질했다.
“백여언 쪽은 준비가 다 되었느냐?”
“예, 전하. 그러니 마음 푹 놓으셔도 됩니다. 곧 있으면 전하께서 미인을 품에 안…….”
미소 띤 얼굴로 말을 잇던 이계의 표정이 굳었다. 태자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이계는 자신이 실언했음을 깨닫고 고개를 숙인 채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미인을 품에 안는다.’라는 말은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설령 태자가 정말로 미인을 안고 싶어 하더라도 입 밖으로 꺼내서는 안 되었다. 그녀가 부녀자의 미덕을 갖춘 현량한 여인이니 태자도 원할 만하다고 돌려 말해야 했다.
“전하.”
이때 밖에서 태자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석씨임을 알아차린 태자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무슨 일이냐?”
석씨는 감히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태자가 지금 자리한 장소는 서재에서도 중요한 곳이라 그녀에게는 들어갈 자격이 없었다. 그녀는 문밖에 선 채로 소식을 전했다.
“마마께서 매괴수정고를 만드셨습니다. 전하께서도 오셔서 한번 드셔 보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