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6화
양왕은 ‘픽’ 하고 웃더니 손가락으로 탁자를 톡톡 두드리며 동조했다.
“그 말이 맞다. 운환이 넌 엽 소저의 공을 빼앗지 말거라.”
주운환의 낯빛이 다시금 어두워지자 엽연채가 입을 뗐다.
“공자께서는 왜 양왕 전하와 함께 일하시는 거예요? 권세를 얻기 위해서인가요?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리려고요? 아님 황제를 세우는 데 일조하려는 건가요? 그렇다면 저도 같은 걸 원해요!”
주운환은 그 말을 듣고 온몸이 떨렸다. 그는 자신의 포부를 펼치기 위해, 엽연채가 방금 말한 바들을 이루어 내기 위해 죽음도 불사할 것이다. 그런데 지금 그녀도 자신과 같다고 했는가?
엽연채는 주운환의 눈길에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공자, 제가 지난번에 어머니와 함께 아버지 외실이 사는 곳에 갔다가 그 방에서 어머니 혼수품을 발견했어요. 엽승덕이 제 어머니의 혼수를 가져가 은정랑의 환심을 산 겁니다.”
엽연채는 헛웃음을 짓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
“전 어머니를 위해 이 일을 공정하게 처리하고 싶어요. 그런데 어머니 혼수 단자가 사라졌고 친정에 놔둔 것도 온데간데없어졌어요. 나머지 하나는 매관媒官(혼인과 관련된 일을 관장하는 관리)이 가지고 있지만 저는 그 혼수 단자를 손에 넣을 수 없을 거예요. 매관이 엽승덕의 친한 벗이거든요. 그런데 제가 권세와 힘을 갖게 되면 그런 걸 염려하지 않아도 되잖아요.
저희 어머니와 엽승덕은 더 이상 함께 살아갈 수 없어요. 저는 어머니가 그자를 떠나길 간절히 바라요. 이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벗어나길 바라고요.
하지만 정말 헤어지고 나면 어머니는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갈까요? 어찌해야 좋을까요? 재가해야 할까요? 그런데 재가해도 또 시집에서 시달리며 살지도 모르잖아요? 그런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해요? 울면서 도움을 청할까요? 하지만 이용가치가 없는 사람은 도와달라고 울부짖을 자격도 없는 걸요.”
전생에 자신이 장씨 가문에서 핍박을 당했을 때, 엽연채는 친정에 도움을 구했었다. 그런데 엽학문은 어떻게 나왔는가. 되레 그녀를 옹졸하다고 나무랐다. 사촌 여동생도 못 받아들이냐며 아이를 못 낳는 자신 대신 자손도 안겨 주었으니 감사의 눈물이라도 흘려야 하는 것 아니냐고까지 했었다.
왜 그렇게 됐던 걸까. 그건 바로 엽이채는 이용가치가 있는 반면, 자신은 쓸모없었기 때문이다. 그에 엽학문은 자신을 외면하고 엽이채를 도왔던 것이다. 무가치한 인간은 울면서 도움을 구할 자격조차 없다는 이야기였다.
“전 어머니께서 이별을 선택할 권리조차 잃기를 바라지 않아요!”
엽연채는 강해지고 싶었다.
주운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실 그는 엽연채가 이런 이야기를 꺼낼 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은 과거의 혹은 현재의 자신과 꽤나 닮아 있었다.
얻고 싶은 게 있으면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용가치가 없다는 건 그 사람에게 이 세상을 살아갈 권리가 없다는 뜻이었다.
“좋다. 이제 뜻을 같이하는 게다!”
양왕이 주운환을 쳐다보며 정리했다.
“네 내자에게도 자신의 의지가 있는 것이다. 난 그저 길을 제시했을 뿐, 걸어가겠다고 한 건 네 내자다. 예전에 내가 너에게 길을 제시했을 때와 같은 게다. 네 내자는 자신의 힘으로 일어서고 싶은 사람이다.
네 내자이기 때문에… 아니, 네 내자도 아니지. 잠시 너에게 시집왔다고 해서 너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면 안 된다. 이 아이가 무엇을 하고 싶든 그건 이 아이의 자유이니 너 역시 구속해서는 안 되지.”
“예.”
주운환이 차가운 표정으로 답했다.
“양왕 전하, 청이 하나 있습니다.”
엽연채가 말했다.
“무슨 일이냐. 말해 보거라.”
“사람 하나만 찾아주세요. 이름은 허대실입니다. 수년 전에 징집되어 입대했다가 응성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전사했다고 들었습니다. 당시 주씨 가문 휘하에 있던 병졸이었습니다. 한 번도 고향에 돌아오지 않았으니 전사했을 가능성이 크지만, 어쩌면 살아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 병졸들은 전장에서 살아남았을 경우 보통 다른 군대에 흡수된다. 패전했을 당시 강왕이 원군을 보냈었다. 강왕은 나와 친분이 두터우니 그에게 찾아봐 달라고 부탁하마.”
양왕이 약속했다.
“먼저 나가 보세요. 전 양왕 전하께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주운환이 고개를 돌려 이리 말하자 엽연채는 어리둥절해하며 양왕을 쳐다봤다. 그가 고개를 끄덕이자 인사를 올린 후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서재 문밖에는 호위무사 두 명이 지키고 서 있었다. 둘 다 안면이 있는 사람이었다. 한 사람은 법화사에서 봤던 언동이고, 다른 한 사람은 지난번 생선 요리 음식점에서 봤던 언서였다.
“여기서 좀 거닐어도 되죠?”
언서가 엽연채에게 가능하다고 대답하면서 단서를 달았다.
“하지만 이 화원을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인 후 백옥이 깔린 오솔길을 따라 화원으로 걸어갔다. 그녀는 답답하거나 괴로울 때 이렇게 정처 없이 거닐어 마음을 풀곤 했다.
여기까지 온 건 양왕의 설계가 있기 때문이었지만, 애초에 자신이 원하지 않았다면 이 계획은 성사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이 태자부에 갔을 때 태자비는 저와 태자를 만나게 하려고 했다. 만약 기회를 틈타 ‘무심결에’ 이 일을 태자부에서 일하는 시녀에게 말했다면 측비 쪽 사람들은 금세 태자비가 무슨 일을 계획하고 있는지 알게 되었을 거고, 그러면 태자비는 신분이 신분인지라 뻔뻔하게 일을 계속 진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설계된 판인 걸 분명히 알면서도 스스로 그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 서재에서 말했듯 권세를 얻고 싶기 때문이다.
조금 전 허대실의 일만 봐도 그랬다. 자신이 아무리 노력한다 해도 수많은 군인들 중에서 그 사람을 찾아낼 수 있을지 가늠도 되지 않았다. 하지만 양왕에게는 너무도 간단한 일이었다. 강왕에게 서신 한 장만 보내면 강왕이 부하를 시켜 알아볼 것이다. 그 사람이 아직 살아 있다면, 정말로 강왕 휘하의 병졸이라면 며칠 안에 찾아낼 수 있을 터였다.
엽연채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 화원 깊숙한 곳에 들어와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물이 졸졸 흐르는 소리에 엽연채가 정신을 차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갖가지 아름다운 꽃이 활짝 피어 있었고 풀과 나무는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근처에는 팔각지붕 정자와 작은 다리가 놓여 있어 우아하고 고상한 정취가 흘러넘쳤다.
엽연채가 물소리를 따라 걸어가니 시냇물이 나타났다. 분홍색 꽃잎이 빙빙 돌며 맑은 시냇물을 따라 떠내려가고 있었다. 그리고 시냇가 근처 월계수 나무 아래 놓인 청석 위에 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엽연채를 등지고 앉은 그 소녀는 고개를 숙인 채 서책을 읽고 있었다. 소녀는 흰색 상의에 가슴까지 올라오는 분홍색 하의로 이루어진 유군襦裙을 입고 있었고, 새까만 머리칼을 간단하게 말아 올려 단라계單螺髻(고둥 모양의 트레머리)를 하고 있었다. 잔잔한 시냇물과 한데 어우러져 그윽한 정취를 자아내는 소녀였다.
엽연채가 다가가 보니 소녀는 고개를 숙이고 있어 하얀 눈처럼 뽀얗고 가느다란 목을 훤히 드러낸 채였다.
엽연채는 책을 흘깃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을 붙였다.
“『원앙결鴛鴦結』을 보고 계시네요?”
소녀는 낯선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깜짝 놀라 하마터면 책을 떨어뜨릴 뻔했다. 그녀가 고개를 돌리자 머리에 꽂혀 있는 순금과 홍옥으로 장식된 잠簪의 기다란 순금 술이 찰랑거렸다.
열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는 희고 보드라운 피부에 둥그스름한 눈썹, 촉촉하게 반짝이는 검보라색 눈에 기다란 속눈썹을 가지고 있었는데, 앵두 같은 입술을 뾰로통하게 살짝 내밀고 있었다. 보는 이의 마음을 설레게 할 정도로 아름다운 얼굴은 아니었지만, 살짝 꼬집어 주고 싶은 생각이 들 만큼 가냘프고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아주 재미있죠. 저도 보고 있어요.”
이어진 말에 소녀는 안도의 숨을 내쉬더니 자신에게 말을 건 엽연채에게 기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래요? 그쪽도 이 서책을 보고 있어요? 흠… 정말 재미있기는 한데 분량이 너무 적어요.”
“엥, 전 이미 2권을 다 봤는데요?”
엽연채는 말을 하며 소매 안쪽에서 책 한 권을 꺼냈다.
“이게 2권이에요.”
“아무도 사다 주지 않았거든요.”
그 소녀는 얼른 책을 받아 들어 찬찬히 책장을 넘겨 보더니 이내 고개를 숙인 채 조용히 읽기 시작했다. 엽연채는 그녀가 누구인지 물어보려 했지만 독서에 집중하는 그녀를 방해하고 싶지 않아 가만히 있었다.
“흠!”
이때, 근처에서 잔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엽연채가 고개를 들자 어두운 국화 문양이 들어간 검은색 비갑을 입고 있는 나이 지긋한 마마媽媽가 엄숙한 표정을 지은 채 꽃밭에 서 있었다. 소녀는 인기척에 고개를 들었다.
“왕비 마마, 태의가 도착했습니다.”
노마마가 냉담한 목소리로 고했다.
“그래.”
소녀는 얼른 옷소매 안으로 서책을 집어넣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녀는 엽연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 후 노마마를 따라갔다.
엽연채는 떠나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어리둥절해했다.
‘왕비? 저 사람이 양왕비梁王妃라는 말인가?’
그 유명한 양왕비는 엽연채에게도 익숙한 이름이었다. 전생에 그녀가 장씨 가문에 갇혀 하는 일 없이 시간만 보낼 때, 추길은 온종일 그녀에게 도성에 떠도는 재미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소문들에는 양왕비 이름이 자주 언급됐다.
과거 소 황후의 억울한 누명이 벗겨지자 양왕과 대장공주大長公主는 함께 도성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그러나 도중에 도적을 만나는 바람에 대장공주는 목숨을 잃었고, 양왕만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져 궁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양왕도 중상을 입은 터라 약도 의원도 소용없는 지경이었다. 이에 정 황후는 병자의 액막이를 하기 위해 왕비를 들였는데, 그녀가 바로 양왕비였다.
양왕비 조앵기는 문인 집안의 여식도 아니고 학자 가문의 규수도 아닌 평민 출신이었다. 당시 왕비를 고를 때 명문가의 규수 중에서 뽑으려고 했지만 하나같이 궁합이 맞지 않아 민간에서 찾을 수밖에 없었고, 그리하여 발탁된 사람이 바로 조앵기였다.
혼인한 뒤 양왕은 병세가 호전되었다. 양왕과 양왕비는 서너 살 때부터 함께 자란 소꿉친구 같은 관계였다. 그러나 양왕은 조앵기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고, 이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그 이유는 첫째로 그녀가 미천한 출신이었기 때문이고, 둘째로 정 황후가 골라 준 배필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유든 간에 그녀로 인해 양왕은 체면이 서지 않았다. 그리고 양왕비는 무능한 사람이라 잘하는 게 하나도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