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5화
주운환은 태자 쪽 사람들의 얼굴을 거의 다 알고 있었다. 태자비의 심복을 이곳에서 보게 되자 주운환은 반사적으로 의심과 경계심을 드러냈다.
“셋째 도련님, 돌아오셨군요!”
주운환이 서쪽 측문 앞으로 다가가 말에서 내리자 소종이 배시시 웃으며 인사했다. 그는 나무 걸상에 앉아 다리를 꼰 채 쉼 없이 다리를 흔들어댔다.
“오늘은 또 어느 공연장에 가서 어떤 화단에게 박수갈채를 보내셨어요?”
“소종아, 방금 전 그 아가씨는 누구냐? 엄청 예쁘게 생겼던데, 설마 네가 밖에서 만나는 여인은 아니겠지?”
여양이 헤헤 웃으며 소종에게 말을 붙였다. 여양은 늘 주운환과 함께 외출했지만 주운환만큼 기억력이 좋지 않아 방금 전 그 소녀가 태자 쪽 사람이란 걸 모르고 있었다.
“저렇게 꽃처럼 어여쁜 정인이 있으면 지금 여기서 죽는다 해도 여한이 없겠다. 전갈을 전하러 온 사람이야.”
소종이 퍽 아쉬워했다.
“누구에게 보내온 것이냐?”
주운환의 잘생긴 얼굴이 한층 어두워졌다. 이미 어렴풋이 짐작이 가는 모양이었다.
“셋째 마님이요!”
역시나 소종의 대답은 주운환의 예상을 벗어나지 않았다.
“지난번에는 셋째 마님 친정 쪽 사람이라고 했던 것 같은데, 오늘 물어보니 또 아니라고 하고, 하여튼 어디에서 보낸 사람인지도 이야기하지 않았네요. 저번에도 한번 왔으니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셋째 마님께서 출타 중이시니 저한테 주면 나중에 전달해 주겠다고 했는데, 한사코 거절하며 직접 전달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지난번이면 언제를 말하는 것이냐?”
주운환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그게…….”
소종은 한참 생각 끝에 날짜를 떠올렸다.
“정안후부 노마님의 생신 축하연 전입니다.”
주운환은 말고삐를 내팽개치더니 잰걸음으로 문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여양은 얼른 주운환의 말을 끌고 그의 뒤를 쫓아가며 불렀다.
“도련님.”
그러나 주운환은 아랑곳하지 않고 걸음을 서둘러 궁명헌에 도착했다. 하지만 궁명헌의 대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세 사람이 모두 함께 외출한 모양이었다.
주운환은 서릿발 내린 듯한 싸늘한 표정으로 되돌아갔다. 여양과 여한이 난죽거 근처에 다다랐을 때, 주운환이 그들 쪽으로 빠르게 걸어왔다.
“도…….”
그러나 주운환은 그들을 지나쳐 다시 서쪽 측문으로 걸어갔다.
“도련님, 또 어디를 가시는 겁니까?”
여양과 여한이 얼른 그를 쫓아와 물었다.
“방금 그 시녀는 태자비의 심복이다.”
주운환이 냉랭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예?”
여양은 깜짝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온몸의 솜털이 바짝 서는 듯했다.
“태자비의 시녀가… 어째서 이 누추한 곳을 찾아온 걸까요? 설마 어딘가에서 셋째 도련님이 양왕 전하를 위해 일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염탐하러 온 건 아니겠죠?”
“소종이 셋째 마님을 찾아온 거라고 말했잖아.”
여한이 어두운 표정으로 대신 답했다.
“셋째 마님? 셋째 마님께서 어째서 태자 전하와 엮이게 된 거지?”
자문하던 여양의 안색이 이내 새파랗게 질렸다.
“셋째 마님이 도련님을 배신한 겁니다. 태자 쪽으로 붙은 거죠. 마님을 믿어서는 안 됩니다!”
태자의 세력이 막강하니 얼마든지 태자 쪽으로 갈아타 그에게 붙을 수도 있었다.
세 사람은 이내 서쪽 측문에 있는 마구간에 도착했다.
여양이 묶어 놓았던 말고삐를 다시 풀며 조심스러운 눈길로 주운환을 쳐다봤다.
“도련님, 지금 어디로 가시려는…….”
“양왕 전하를 찾아봬야겠다.”
주운환은 직접 말고삐를 푼 뒤 말 위에 올랐다.
“예, 잘 생각하셨습니다. 가서 전하를 찾아뵙고 사죄드린 후 이 사실을 알려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며 여양도 서둘러 말 위에 올랐다.
주운환 일행이 말을 타고 문을 나서는데 그들이 또 문밖을 나서는 모습을 본 소종이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벌써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예요. 셋째 도련님, 집에서 식사 안 하세요?”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냐? 회방루의 약란 아가씨가 새로운 극을 공연한다고 해서 그거 보러 가는 건데 그럼 안 돼?”
여양은 고개를 돌려 그를 쏘아보았다. 별말도 안 했는데 면박당한 소종이 입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아뇨.”
* * *
그 시각, 양왕부.
오시 이각은 양왕부의 점심시간이었다. ‘평정소축蘋汀小築’은 양왕부 중앙에 위치한 뜰이었다. 시녀들은 식당에 일렬로 서 있었고, 자개가 박힌 구름 문양 다리가 달린 녹나무 탁자 위에는 갖가지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식탁에는 두 사람만 자리하고 있었는데, 한 사람은 양왕이었고 다른 한 사람은 분홍색 옷을 입은 소녀였다. 식당 안에는 수저가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 말고는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두 사람은 숨이 탁 막히는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식사를 하고 있었다.
“캑…….”
분홍 옷의 소녀가 갑자기 소리를 냈다. 그러자 양왕은 젓가락을 내려놓고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소녀는 자신을 쏘아보는 양왕의 눈빛에 우물쭈물하며 말했다.
“생선 가시가 걸렸어요…….”
“밥도 제대로 못 먹는 게냐. 머리는 어디에 두고 다니는 게야?”
양왕은 꼴 보기 싫어 죽겠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냉소를 지었다. 소녀는 커다란 눈만 깜빡거리며 고개를 숙인 채 감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전하.”
이때 언서가 안으로 걸어 들어오더니 양왕의 귓가에 대고 뭔가를 속닥거렸다. 그러자 양왕은 옷소매를 뿌리치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돌아서서 잰걸음으로 밖으로 나갔다.
소녀는 그가 떠나간 방향을 쳐다보더니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가끔은 집 밖에서 밥을 먹고 오면 안 되나?’
양왕과 식사를 할 때면 무엇이든 눈치를 봐야 했다. 반찬도 많이 집어서는 안 됐고 밥도 푹푹 떠먹어선 안 됐으며 탕을 마실 때도 소리를 내어서는 안 되었다.
소녀는 생선 가시가 걸리는 바람에 목구멍이 아파 밥을 먹고 싶어도 더 이상 먹을 수가 없어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화려한 치맛자락을 추켜올리곤 문턱을 넘어 밖으로 걸어 나갔다. 뒤에 일렬로 서 있던 시녀들은 그릇과 젓가락만 정리할 뿐, 아무도 그녀를 신경 쓰지 않았다.
사치스러운 걸 좋아하는 양왕의 서재는 널찍하고 화려했다. 왼쪽 벽 쪽으론 커다란 책꽂이 두 개가 자리했고, 책꽂이에는 각종 서적이 빽빽이 꽂혀 있었다. 그러나 서책들이 새것이나 다름없는 모습인 걸 보니 주인이 자주 펼쳐보지 않는 게 분명했다.
오른쪽에는 다층 진열장이 자리했는데, 층마다 진귀한 자기와 분경이 가득했다. 서재 중앙에는 교룡交龍 장식이 들어간 옻칠을 한 커다란 박달나무 탁자가 있는데, 그 위로 좋은 붓이 죽 놓여 있었고 붓꽂이에도 한가득 꽂혀 있었다.
서재로 돌아온 양왕은 서릿발처럼 차가운 표정으로 서 있는 주운환의 모습을 보았다. 양왕은 그를 힐끗 쳐다보더니 박달나무 탁자 뒤로 걸어가 자리에 앉으며 알은체했다.
“운환이 왔느냐?”
“전하…….”
주운환 뒤에 서 있던 여양은 엽연채의 일을 떠올리더니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양왕에게 어떻게 사죄를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이때 주운환이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하께서 그 사람을 태자부로 보내신 겁니까?”
그 말에 여양은 깜짝 놀랐다. 양왕이 엽연채를 보낸 것이란 말인가? 반면 여한은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양왕이 엽연채와 태자부의 관계를 애매한 상태로 놔둘 리가 없었다.
“그 아이가 너한테 말한 것이냐?”
양왕이 뜨뜻미지근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태자비의 심복이 그 사람에게 전갈을 전하러 온 것을 봤습니다.”
“그래.”
양왕은 태연스레 대답했다. 어차피 조만간 주운환이 이 일을 알게 될 터였다. 그는 애초에 이 일을 숨길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주운환에게 알려 주는 것과 주운환이 스스로 알게 되거나 엽연채가 일러바쳐 알게 되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엽연채가 주운환에게 이 사실을 말하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가 원한을 품었거나 이간질할 목적으로 언급했다면 살려 둘 수 없었다.
“전하, 태자가 어떤 사람인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 사람을 보내는 건 범의 아가리에 양을 밀어 넣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주운환은 화를 꾹꾹 누르느라 애를 쓰고 있었고 양왕은 그런 그를 심원한 눈빛으로 쳐다보며 말했다.
“전에 네 입으로 말하지 않았느냐? 위로 올라가기 위해선 무엇이든 희생하고 이용할 수 있다고 말이다!”
그 말에 주운환은 순간 멍해졌다. 분명 자신이 내뱉은 진심이었고 여태껏 그리 해 왔다. 하지만 엽연채만은…….
“진정으로 모든 걸 희생하고 이용할 생각이라면 자신의 것도 그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더니 양왕은 손에 끼고 있던 벽옥 반지를 빼 들었다.
“마치 이 반지와도 같은 것이지. 미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난 이 반지를 버릴 수 있으나 네가 미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반지를 버리는 건 안 된다. 엽연채는 이 벽옥 반지와 같아. 하물며 그 아이는 네 진짜 아내도 아니니 네 것은 더더욱 아니지 않으냐!”
주운환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분명 자기 사람이 아니었다.
양왕이 이어서 말했다.
“너희들은 내가 그 아이를 이용한다고 생각하겠지. 그런데 이용하면 뭐 어떻다고? 운환아, 그동안 나는 네가 나를 위해 일하도록 널 이용해 왔고 너도 그걸 원했다. 난 황위를 노리고 너는 공을 세워 이름을 날리려고 한다. 그 아이가 이런 걸 원할지 원하지 않을지 네가 어찌 안다는 말이냐? 내 말이 안 믿긴다면 네가 직접 물어보거라. 언서야, 가서 엽씨 소저를 모셔오너라.”
언서는 즉시 돌아서서 서재 밖으로 나갔다.
이각쯤 지나자 엽연채가 도착했다. 그녀는 아침이 밝자마자 혜연, 추길과 함께 외출해 자수용 실을 골랐고, 나온 김에 아예 밖에서 식사하고 들어가기로 했다. 그런데 한창 밥을 뜨고 있는데 양왕의 사람이 그녀를 데리러 왔던 것이다.
엽연채는 호화스러운 서재 안으로 걸어 들어가다가 그곳에 있던 주운환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보아하니 그가 자신의 일을 알게 된 모양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조만간 알게 될 일이었다. 태자비가 자주 사람을 보낼 테니 계속해서 숨기기란 불가능했다.
“양왕 전하를 뵈옵니다.”
엽연채가 예의 바르게 인사를 올렸다.
“그만 일어서거라!”
양왕이 쌀쌀맞은 목소리로 인사를 받았다.
“전하, 이 사람을 태자부에 보내 무엇을 하시려는 겁니까? ‘정산제장定山祭場’과 ‘천자복환령天子復還令’과 관련된 일입니까? 그 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주운환은 양왕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엽연채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더 이상 이런 일에 관여하지 마십시오. 내가 할 겁니다.”
엽연채는 그의 진중한 눈동자를 마주하자 마음이 살짝 떨려 왔다.
“운환아, 이 일은 네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양왕이 어두운 표정으로 부정했으나, 주운환은 차갑게 식은 어두운 눈빛으로 양왕을 쳐다보며 바로 반박했다.
“전하,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걸 전하도 아시지 않습니까.”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도 끼어들지 말거라. 그만 썩 물러가거라!”
주운환은 격노한 양왕을 신경 쓰지 않고 엽연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재차 말했다.
“그만 집으로 돌아가요. 이 일은 제가 합니다.”
엽연채는 그만 눈시울이 뜨거워졌으나 눈물을 참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제가 하고 싶은걸요! 공자, 제 공을 가로채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