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4화
“저… 아버님, 흑흑……. 전 아이를 가진 몸입니다…….”
엽이채가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이 아이는 장씨 가문의 친손자이자 친증손자입니다…….”
“아버지, 이 사람은 아이를 가진 몸입니다.”
장박원도 간절한 얼굴로 애원했다.
장굉과 맹씨의 얼굴이 파랗다 못해 보랏빛으로 변했다. 장박원과 엽이채는 가장 중요한 집안일을 물거품으로 만들어 버렸다. 산 채로 껍질을 벗겨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터였다. 하나 엽이채는 아이를 가진 몸이었고 이 아이는 장씨 가문의 대를 이을 자식이었다.
“그럼 외출을 금할 것이다! 그리고 너는 당장 가서 무릎을 꿇어라!”
장굉이 장박원에게 성을 내며 소리를 질렀다. 장박원이 큰 잘못을 저질렀던 그때 그는 장박원을 흠씬 두들겨 패고 싶었다. 하지만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아 벌하지 않고 덮었거늘, 결국에는 이런 결과를 맞이했다.
“제가… 제가 무릎을 꿇을 수는 있습니다. 저도 꿇고 싶은 마음입니다. 그러나 만만이의 혼사는 이미 물 건너갔습니다.”
장박원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벌 받기를 거부했다.
“두 달 뒤면 향시가 있습니다. 무릎을 꿇었다가 병이 나면 어찌합니까……. 향시를 치르는 데 영향을 줄지도 모릅니다.
아버지, 할아버지. 만만이의 혼사가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는 저도 잘 압니다. 그러니 제가 반드시 향시에서 수석으로 합격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이 상황을 조금이라도 수습할 수 있습니다.”
맹씨와 장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들도 향시가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있었다. 장만만이 별일 없이 순조롭게 태자에게 시집을 갔다 하더라도 장박원의 과거 시험 역시 그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었다. 이제 태자와의 혼사도 물거품이 되어 버렸으니 과거 시험은 더욱 중요해졌다.
“썩 물러가 시험 준비나 하거라!”
지금껏 한마디도 하지 않던 장찬이 갑자기 입을 열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할아버지, 감사합니다! 제가… 반드시 좋은 결과를 보이겠습니다!”
장박원은 장찬에게 예를 올렸다. 얼굴이 온통 눈물범벅이 되어 장박원의 뒤에 숨어 있던 엽이채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장만만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방금 전 장박원에게 엉겨 붙어 그를 때리고 욕하느라 그녀의 쪽머리는 산발이 되어 있었고 장신구들은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바닥에 멍하니 앉아 있던 그녀는 장박원과 엽이채가 과거 시험과 임신을 이유로 어떠한 벌도 받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자 어이가 없다는 듯 웃더니 심원한 눈빛으로 장박원을 쳐다봤다. 그러더니 매정한 목소리로 그를 저주했다.
“오라버니는 분명 그 시험에서 떨어질 겁니다!”
“만만아, 너 어떻게 그런…….”
장만만이 시험에서 떨어질 거라는 악담을 내뱉자 장박원은 꺼림칙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자신들 때문에 그녀의 혼사가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을 떠올리고는 죄책감을 느끼며 좋게 대꾸했다.
“만만아, 걱정 말거라. 내가 이번 시험에서 수석으로 합격하고 그 뒤 진사 급제와 장원 급제를 해 널 탈락시킨 사람들이 땅을 치며 후회하게 만들어 줄 것이다. 그런 다음 때가 되면 이 오라비가 떵떵거리며 시집가게 해 주마.”
그러나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는 장만만의 눈빛은 싸늘한 비웃음으로 가득했다. 그러기는커녕 웃음거리가 될 테니 어디 두고 보자고 저주하는 눈빛이었다.
* * *
칠월은 여름이 물러가고 곧 가을을 맞이하는 시기에는 날씨가 점점 선선해지기 마련이었다. 그런데 오늘은 칠월 초하루인데도 날씨가 여전히 무더웠다.
주운환은 회방루 2층 귀빈실에서 전통극을 보고 있었다. 연극 무대 위에선 선홍색 혼례복을 입은 약란 소저가 옷소매를 뿌리치며 애절한 목소리로 <제화부용>을 부르고 있었다.
하지만 오늘 온 관객들은 연극에 집중하고 있지 않았다. 아무리 좋은 연극이라도 여러 번 보면 질리기 마련인 게 첫 번째 이유였고, 도성 안에 우스운 이야기가 퍼진 게 두 번째 이유였다. 이 화제의 우스갯감은 바로 태자 측비 후보에서 제명된 장씨 가문 여식이었다.
사실 장씨 가문 외의 사람들에게야 별것 아닌 일이었으나, 몇 개월 전 새신랑이 처제와 함께 도망갔던 촌극과 이어지면서 모두 인과응보라며 내심 통쾌해했다.
주운환은 아래에 있는 관객들이 장만만의 일을 놓고 떠드는 소리를 듣더니 입꼬리를 스윽 올렸다. 사실 이건 예견된 일이었다. 태자가 백 소저의 미색을 탐하니 장만만은 자리를 내어 주고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여양아, 가서 심부름꾼을 불러오너라.”
“예.”
주운환의 명에 여양이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고, 잠시 후 심부름꾼이 안으로 들어왔다.
“손님, 뭐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제화부용>을 공연한 지 벌써 몇 달이 지났는데 어째서 하편이 아직도 나오지 않는 것이오?”
주운환이 묻자 심부름꾼이 난처해하는 얼굴로 대답했다.
“곧 나올 겁니다. 저희도 재촉은 하는데 극본을 쓰는 사람이 아직 완성을 못 했습니다.”
주운환은 ‘음’ 하고 소리를 내더니 맞은편 귀빈실을 쳐다봤다. 멀리 떨어져 있어서 어렴풋이 하얀 형체만 보였다.
주운환은 불현듯 지난번 덕명반에서 엽연채와 연극을 본 일이 떠올랐다. 엽연채가 압자고를 먹던 모습, 냠냠거리며 샛노란 압자고를 하나씩 베어 물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음, 참 보기 좋았었지.’
“여기도 압자고를 파는가?”
“압자고요? 아, 저희 가게에는 압자고가 없습니다. 아이에게 사다 주시려나 보죠?”
아이에게 사다 준다? 자신은 아내에게 사다 주려는 것이었다. 주운환은 시선을 아래로 떨구더니 그녀와 너무 친해진 것 같으니 거리를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손님, 필요하시면 제가 맞은편에 있는 떡집에 가서 사 오겠습니다.”
심부름꾼이 공손한 목소리로 말했으나 주운환은 됐다고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늦었으니 이만 가자꾸나.”
심부름꾼은 얼른 주운환 일행을 아래층까지 배웅해 주었다.
세 사람은 말에 오른 후 도성 북쪽을 향해 달리다가 붓과 먹을 파는 상점에서 멈추어 섰다.
“셋째 도련님, 새것을 사시려고요?”
여한이 의아한 투로 물었다. 그의 기억으론 집안에는 붓과 먹이 충분했고, 양왕이 선물한 적계현績溪縣 숯먹만 해도 여러 개가 남아 있었다. 그러나 주운환은 그렇다고 대꾸하며 말에서 내린 후 말고삐를 여양에게 건넸다.
여한이 주운환과 함께 붓과 먹을 파는 상점 안으로 들어갔다. 뜻밖에도 주운환은 사서오경四書五經이 줄줄이 꽂혀 있는 책장을 뒤적거리더니 서책을 한 아름 들고 걸어 나왔다.
여한은 그 모습을 보며 깜짝 놀랐다. 그의 손에 들린 서책은 전부 사서오경의 주해문註解文이었다.
“셋째 도련님……. 설마 과거 시험을 보시려는 겁니까?”
여한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믿을 수 없다는 듯 묻자 주운환은 불그스름한 얼굴로 얼버무렸다.
“갑자기… 보고 싶어졌다. 배워 두면 다 도움이 될 게다.”
여한은 무슨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의 기억으로는 양왕이 수차례 그에게 과거 시험을 보라고 권했지만 그는 한사코 거절했다. 도리어 주씨 가문 사내들이 과거 시험을 친다는 게 얼마나 우스운 일이냐고 반박도 했었다. 또 자신은 전장에만 나설 것이며 과거 시험장에는 결코 들어가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데…….
상점에서 나온 주운환은 말에 올랐다.
“아유, 무슨 좋은 물건을 사셨어요?”
여양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주운환은 말의 배를 걷어차더니 그대로 그냥 가 버렸다.
“도련님, 같이 가요!”
여양이 말에 오르려 하자 여한이 그를 잡아당기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사서오경 주해문을 한가득 사셨어.”
“뭐? 도련님께서 과거 시험을 보시려는 거야? 머리가 문에 끼어 다치시기라도 했나?”
여양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러시기라도 했나 봐.”
“근데 그건 우리가 걷고 있는 길과는 영 멀잖아?”
여양이 미간을 찌푸렸다. 지금 그들은 집에만 틀어박혀 지내는 척하며 남몰래 양왕을 위해 일하고 있었다.
양왕은 주운환에게 열여덟 살이 되면 서북西北으로 가 강왕康王의 휘하가 되라고 명했다. 이름을 숨기고 차근차근 위로 올라가 성과를 내면, 서북이든 응성이든 결원이 생기면 강왕이 분명 장군가인 주씨 가문의 사내인 그를 추천할 것이었다. 그렇게만 되면 황제는 틀림없이 주운환에게 병권을 내줄 것이었다.
물론 냉혹한 현실에서 야무진 상상을 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이 모든 건 그가 성과를 냈을 때 실현 가능한 일이었다. 전장은 과거 시험장처럼 실패해도 다시 올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전장에서의 실패는 곧 죽음을 뜻했다.
양왕은 주운환에게 과거 시험을 보고 벼슬길에 오를 것인지 아니면 전장에 나설 것인지 물었었고 주운환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전쟁터에서 공을 세워 이름을 알리겠다고 밝혔다.
말을 타고 쏜살같이 달리던 주운환은 고개를 숙여 앞에 놓인 책 한 무더기를 힐끗 쳐다봤다. 십일월이 지나면 자신은 열여덟 살이 되었다. 봄이 되기 전에 서북으로 떠나기로 양왕과 약속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좀 미뤄야 했다.
가면 아마 높은 확률로 타지에서 죽음을 맞이할 텐데, 그럼 자신은 사촌들처럼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올 것이다. 자신과 엽연채는 진짜 부부가 아니니 자신이 죽으면 엽연채는 재가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 사이의 일을 모르니 그녀가 제 분수도 모르는 사내에게 시집을 갔다고 비웃을 터였다.
그러니 그전에 자신이 최소한 과거에라도 급제하면 그녀의 위신도 서게 되고, 이 혼인 생활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고 보이게 될 것이다. 그럼 엽연채가 적어도 사람들의 비웃음거리로 전락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도련님! 좀 기다려 주세요!”
주운환이 상념에 잠겨 있는데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여양과 여한이 쫓아오고 있었다. 세 사람은 이미 장승가로 들어선 후였는데, 주운환이 갑자기 말고삐를 잡아당겨 속도를 늦추더니 천천히 나아가기 시작했다.
“도련님, 정말로 과거 시험을 보실 거예요?”
여양이 숨을 헐떡이며 물었다.
“그래.”
정국백부 정문으로 들어가던 주운환이 고개를 들어 보니 문머리는 낡아 허물어졌고 담장은 칙칙하게 색이 바랜 상태였다. 대문은 더 이상 붉고 선명한 빛깔이 아니었으며, 문고리의 수환獸環은 거무데데하게 변한 데다 그 위에 줄지어 박힌 장식용 못도 몇 개나 떨어져 있었다.
주운환은 고개를 숙인 채 모퉁이를 돌아 서쪽 측문으로 향했다. 멀리서 소종이 서쪽 측문 밖에 쭈그리고 앉아 한 소녀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이 보였다.
열일곱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는 연한 황색 비갑을 입고, 쌍환계雙環髻 머리에는 순금 매화와 술로 장식된 잠을 꽂고 있었다. 시녀들의 전형적인 차림새였지만 온몸에서 당찬 기운이 느껴졌다.
그 시녀는 소종과 무슨 이야기를 나누더니 돌아서서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그녀는 주운환 곁을 지나치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를 한번 쳐다보고는 다시 고개를 숙인 채 걸어갔다.
주운환은 그녀를 가까이서 보더니 수려한 얼굴이 순간 싸늘하게 변했다. 이 소녀가 누구인지 알아보았던 것이다. 바로 태자비의 심복인 금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