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3화
맹씨의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암시? 어제 사 마마가 만만이에게 다른 두 후보도 부적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해 줬는데 그걸 말하는 건가?
‘하기야 황후 마마의 귀띔이 아니라면 그 신중한 성격의 아버님께서 아침부터 나를 궁으로 들여보냈겠어? 정말 무슨 변고라도 생긴 걸까?’
맹씨의 낯빛은 순식간에 새파랗게 질려 버렸다.
“마마, 도대체 어찌 된 일이옵니까? 분명 만만이로 정했다고 전에 말씀하셨습니다.”
“누군가가 태후 마마께 함부로 입을 놀린 모양이오. 그래서 태후 마마께서 지금 만만이를 상당히 탐탁지 않아 하시오. 내가 복을 가져다주는 부적을 만만이에게만 하사한 것을 아시고는 내게 다른 두 후보에게도 하사하라고 명하셨소.”
정 황후가 난처한 표정으로 사정을 설명했다.
맹씨의 가슴이 쿵쿵쿵 요란하게 방망이질치기 시작했다. 태자의 혼사는 늘 황제와 황후가 관장했는데, 최근 들어 황제의 옥체가 미령한 데다 정비를 뽑는 일도 아닌지라 간택은 황후에게 일임된 상태였다. 태후는 팔십의 고령이라 혼사에 관여하지 않은 지 오래됐는데 갑자기…….
“장 부인, 걱정 마시오. 나와 태자는 신용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고 장 대인을 귀히 여기고 있소. 거기다 만만이는 지혜롭고 선량한 마음을 가진 아이라 귀여움을 받고 있다오. 내 반드시 태후 마마를 찾아뵈어 만만이 이야기를 잘 해 줄 것이오.”
정 황후의 위로에 맹씨는 안도의 한숨을 쉬며 감사를 표했다.
“망극하옵나이다, 황후 마마.”
“이만 자리에 앉으시구려!”
황후가 자리를 내어 주며 말했다.
“예. 마마.”
맹씨는 미소를 지으며 답한 후 그녀 곁에 앉아 담소를 나누었다. 맹씨는 한 시진가량 머무른 후 궁을 나섰다.
* * *
그 시각 장씨 가문. 장찬, 장굉, 장만만은 맹씨의 거처에 모여 그녀의 귀가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었다.
장만만은 아침부터 맹씨가 입궁했다는 이야기를 듣고 가슴이 쿵쿵 뛰었다.
‘어머니께서 입궁까지 하셨다니……. 사소한 일을 너무 지나치게 생각하신 건 아닐까? 아니면 일이 이미 그렇게 심각해졌다는 건가?’
장만만이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의자에 앉아 손수건을 움켜쥐고 있을 때였다. 밖에서 여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마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장만만이 얼른 밖으로 뛰어나가 발을 걷어보니 맹씨가 걸어오고 있었다.
“어머니!”
장만만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맹씨를 끌어당기며 물었다.
“어떻게 됐어요?”
맹씨는 미소를 짓더니 그녀의 코끝을 톡 치며 되물었다.
“무슨 일이 있겠느냐?”
장만만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모녀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장찬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쳐다봤다. 맹씨는 궁에서 황후와 나눈 이야기를 장찬에게 들려주었다.
장굉 역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큰 문제는 아니겠구먼. 황후 마마께서 만만이를 흡족해하시니 말이야. 보아하니 태후 마마 쪽에서 잡음이 들리니 황후 마마께서 사씨를 시켜 상황을 알려 주신 거군. 우리 가문을 정말로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게지.”
한자리에 모였던 사람들은 마음을 놓고 각자 자신의 거처로 돌아갔다.
저녁 무렵, 집안 식구들이 맹씨의 거처에 모여 식사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여종이 예상 밖의 소식을 전해 왔다.
“어르신, 마님. 궁인 사씨가 왔습니다.”
일가는 모두 황망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나 장굉은 황후가 자신들에게 걱정 말고 편히 있으라는 말을 전달하려고 사람을 보냈다고 생각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발이 걷히자 사 마마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모두들 이곳에 모여 있는 모습을 보더니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장 대인, 황후 마마께서 소인에게 전달하라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장 소저께서… 측비 간택에서 탈락하셨습니다!”
“뭐라?”
그 말에 맹씨와 장굉은 깜짝 놀라 외마디 비명을 질렀고, 장만만은 머리가 어질어질해 몸을 비틀거리다가 하마터면 넘어질 뻔하여 소진이 얼른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엽이채와 장박원도 깜짝 놀라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장박원도 장만만이 황실에 시집가기를 간절히 바랐다. 여동생의 혼사는 그야말로 가문의 미래가 걸린 대사大事였다.
장찬의 표정은 싸늘하게 굳었다. 맹씨는 황급히 사 마마에게 물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오? 어찌 일이 이렇게 됐단 말이오? 게다가… 아직 유월 마지막 날도 아닌데 어떻게 탈락했다는 결과가 나온다는 말이오?”
“태후 마마의 뜻이옵니다. 태후 마마께서 우연히 장씨 가문 큰공자님의 혼사 이야기를 들으시더니 장씨 가문은 어수선한 집안이라고 하셨습니다. 큰공자님이 혼례식 당일에 혼약을 맺은 지 오래된 정혼녀를 버리고 그 처제와 도망을 쳤으니 이 얼마나 황당한 일이냐고 불쾌해하셨습니다.
또, 그런데도 장씨 가문은 그저 혼란한 상황을 감추고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꾸미는 데 여념이 없었고, 품행에 문제가 있는 여인을 며느리로 맞이했으니 가풍이 좋지 않은 집안임을 보여 준 것이라 하셨습니다. 얼토당토않은 일이 벌어지는 집안에서 자란 여식은 황실의 일원으로 부적격하니 장씨 아가씨를 후보 명단에서 제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사 마마의 말은 천둥처럼 내리쳐 장씨 가문 사람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고 순식간에 그들을 지옥으로 밀어 넣었다.
“그럴 리가 없다. 황후 마마께서 분명…….”
맹씨는 이를 악물고 최후의 발악을 했다.
“예, 황후 마마께서 아끼시는 분은 장 소저입니다. 그래서 장 소저가 태자 마마의 측비가 되기를 바라셨죠.”
사 마마는 고개를 가로젓더니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황후 마마께서 장씨 아가씨를 위해 한마디 하셨을 뿐인데 태후 마마께서 마마를 나무라시더니 불호령을 내리셨습니다. 장 대인, 정말 송구스럽습니다. 하지만 황후 마마와 태자 전하께서도 이미 할 수 있는 일을 다 하셨습니다.”
장찬의 엄숙한 얼굴도 붉으락푸르락하는 것이 그야말로 가관이었다.
장박원의 혼사가 따지고 들면 반박할 여지가 없는 오점이라는 건 장씨 가문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황후가 훈계만 조금 하고 마는 것을 보고는 이 추문만 잘 덮으면 모르는 척 눈 감아 줄 거라고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럼 소인은 말씀을 전달했으니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사 마마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방 안에 남은 사람들은 하나같이 넋이 나간 얼굴로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태자에게 붙으려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았다. 장찬은 이 혼사를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고 굵직굵직한 일들을 태자에게 몰아주는 위험을 무릅쓰며 그가 군대를 부리는 책략이 뛰어나다는 좋은 평판도 얻게 해 주었다. 그리함으로써 태자의 눈에 들었고 이 혼사도 얻어 냈던 것이다.
집안사람들도 오랫동안 기대를 품어 왔고 이 일을 성사하기 위해 많은 희생을 감내해야 했다. 그런데 결국에는 혼사가 이렇게 물거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어떻게 이럴 수가…….”
중얼거리는 장만만의 뺨 위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분명 태자 마마께 시집갈 수 있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가……. 엽이채,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이 망할 계집, 죽여 버릴 거야!”
그녀는 욕을 퍼붓더니 엽이채에게 냅다 달려들었다.
“꺅!”
엽이채는 미치광이처럼 달려드는 그녀의 모습을 보더니 깜짝 놀라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도 류아가 재빠르게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이 빌어먹을 계집, 죽여 버릴 거야! 이 요망한 계집!”
눈에는 핏발이 선 장만만은 완전히 실성한 것 같은 모습이었다. 장만만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개의치 않고 달려가 냅다 따귀를 갈겼다.
짝! 짝! 짝!
“윽!”
류아는 그렇게 장만만에게 연달아 따귀를 얻어맞았고 그녀 뒤에 숨어 있는 엽이채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훌쩍거리며 눈물을 흘렸다,
“저와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정말이에요…….”
정신이 든 장박원은 이 일에 죄책감을 느꼈지만 일단 엽이채부터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들었다. 그는 장만만을 밀치더니 엽이채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만만아, 일단 진정 좀 하거라. 진정하라고! 이건 네 새언니와는 상관없는 일이다……!”
“상관이 없다고? 이 망할 계집아, 내 네 숨통을 끊어 버릴 것이다!”
무너져 내리기 일보 직전인 장만만은 손으로 장박원의 몸을 마구 때리며 저주를 퍼부었다.
“이, 이 개만도 못한 것들! 사통이나 한 너희가 내 혼사를 망쳤어! 다 너희가 망친 거야!”
“진정 좀 하라고!”
장박원은 장만만의 손을 붙잡으려고 애를 썼지만 그녀의 폭주를 막지는 못했다. 그 역시 따귀를 몇 대나 얻어맞아 뺨이 다 얼얼했다.
“만만아!”
맹씨는 정신을 잃고 날뛰는 장만만이 걱정되어 장박원에게서 그녀를 떼어 냈다. 그러곤 장박원을 향해 노호했다.
“보거라. 네가 부인이라고 맞이한 저 천박한 것이 우리 만만이의 혼사를 다 망쳐 놓았다!”
그 말에 장박원의 낯빛이 새파랗게 질렸다. 그는 엽이채를 보호하고 있었지만 온몸에 힘이 쑥 빠져 기력이 하나도 없었다. 그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겨우 반박했다.
“어머니… 그렇게 억지를 부리시면 안 되십니다. 저 사람은 아무것도 안 했습니다. 그동안 아주 조용히 지냈다고요…….”
“최근에야 아무것도 안 했지만 전에 벌인 일들이 화근이 되어 이런 사달이 난 게 아니더냐!”
맹씨는 매서운 눈빛으로 장박원과 엽이채를 쏘아보았다.
“내가 안 된다고 했는데 네가 기어코 혼인하겠다고 하지 않았더냐! 박원아, 내가 좋은 혼처를 구해 정혼까지 맺어 줬는데 왜 그걸 마다하고 하필 저런 요사스러운 것과 혼인하겠다고 우긴 것이냐? 대체 왜 저런 파렴치하고 천박한 것을 아내로 들인 게냐?”
“어머니……. 말씀이 좀……!”
장박원은 그녀가 듣기 거북한 말로 자신을 나무라자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변명했다.
“저희는 그저 서로 사랑했을 뿐입니다. 그게 잘못된 일입니까?”
“잘못된 일이냐고? 잘못이 아니면 어째서 태후 마마조차도 너희들이 잘못한 것이라고 생각하시는 게냐? 어째서 네 누이동생의 혼사마저 수포로 돌아간 것이냐? 다들 너희가 잘못했다고 여기는데 어째서 너만 잘못이 없다고 생각하는 게냐? 십 년 넘게 한 글공부가 다 헛된 모양이로구나!”
맹씨는 목이 쉴 정도로 고함을 지르느라 진이 다 빠져 버렸다.
“다 저희가 잘못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닙니다. 엽 어르신께서는 저희가 옳다고 하셨습니다.”
장박원의 목소리는 점점 더 작아졌다.
‘엽승덕?’
맹씨는 가슴을 부여잡더니 하마터면 피를 토해 낼 뻔했다.
“너희 둘은 사당에 가서 무릎을 꿇고 있거라!”
장굉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호통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