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2화
엽이채는 그 과일을 엽학문이 보냈다는 이야기를 듣더니 이렇게 물었다.
“커다란 바구니로 한 개나 된다고? 그럼 할아버님과 어머님께 보내드려야지!”
여종은 미소를 지으며 엽이채를 안심시켰다.
“이미 주인마님께 말씀드렸어요. 주인마님께서 이건 큰마님 친정에서 보내온 것이니 큰마님 거처로 보내라고 하셨어요. 큰마님, 나누고 싶으시면 그리하세요.”
엽이채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여종에게 다시금 물었다.
“언제 온 거야?”
“아침에 큰마님께서 출타하시자마자 도착했어요.”
엽이채는 그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자신이 정국백부에 한 시진 가까이 머무는 동안 정안후부에서 정국백부에 앵두를 보내온 기색은 전혀 느끼지 못했다. 할아버지가 자신에게만 앵두를 보내고 엽연채에게는 보내지 않은 게 틀림없었다. 엽이채는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바구니에 나눠 담거라. 그리고 따로 바구니를 하나 준비해 앵두를 담아 통풍이 잘되는 곳에 널어 놓거라, 류아야.”
“예, 큰마님.”
류아가 가까이 걸어오며 대답했다.
“내일 아침에 따로 뺀 앵두 바구니를 큰언니에게 보내거라. 그리고 할아버지께 앵두를 맛있게 먹었다고 서신을 보낼 것이니 붓을 가져오렴.”
“예.”
류아는 미소를 지으며 몸을 돌렸다. 둘 다 시집간 친손녀인데 정안후부에서는 자신이 모시는 큰마님에게만 앵두를 보내고 엽연채에게는 보내지 않았다. 이 일만 보아도 큰마님의 친정에서 큰마님을 얼마나 아끼고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 * *
다음 날 아침, 류아는 서신을 전달하러 정안후부로 갔다.
엽학문은 앵두가 아주 맛있다는 엽이채의 서신을 읽더니 꽃이 활짝 핀 것처럼 함박웃음을 지었다. 장만만이 곧 태자에게 시집을 가면 자신도 윗사람들에게 아부할 수 있게 된다는 기대감에 그는 기쁘기 그지없었다. 역시 둘째 손녀는 쓸모가 있었다.
류아는 정안후부에 서신을 전달한 후, 다시 작은 마차를 타고 도성 북쪽에 위치한 정국백부로 향했다.
엽연채가 침상에 앉아 화본을 보고 있는데 추길이 다가와 아뢰었다.
“아가씨, 류아가 왔습니다.”
엽연채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화본을 내려놓았다.
“주 부인.”
이때 이미 안으로 들어온 류아가 앵두 바구니를 내려놓으며 알렸다.
“이건 저희 큰마님께서 부인께 보내신 겁니다.”
“그래, 고맙구나.”
엽연채는 고개도 들지 않고 무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 모습에 류아는 할 말을 잃고 멍청히 서 있었다.
“왜 그러느냐? 더 볼일이 남았느냐?”
엽연채는 그제야 고개를 들어 보였다. 그녀의 태도에 류아는 어이가 없고 난감했다. 자신이 물건을 전달했으니 저쪽에서는 마땅히 고마워하며 이렇게 좋은 앵두는 어디서 났느냐고 물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래야 본론을 꺼낼 것 아닌가.
“이 앵두는 정안후부에서 저희 큰마님께 보내 온 것입니다. 그런데 어째 주 부인께서는 못 받으신 모양이네요?”
류아가 참지 못하고 이렇게 말하자 엽연채는 눈을 가늘게 뜨더니 싱긋 웃었다.
“내가 받지 못한 줄 몰랐던 거니? 아니면 받았다고 생각했는데도 또 굳이 앵두를 가져왔다는 소리야?”
아차 싶었던 류아는 허튼소리를 지껄이며 상황을 수습하려고 했다.
“저희 큰마님께서… 부인과 바꿔 먹고 싶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주 부인께서 받지 못하셨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네요. 하하하.”
자신의 상전이 친정집의 사랑을 더 많이 받고 있다는 걸 과시하려고 했는데, 왜 상상처럼 통쾌하지 못한 걸까?
“더 볼일 없지? 우리 셋째 마님은 일이 있어 바쁘시니 그만 가 보거라.”
추길이 쌀쌀맞은 목소리로 그녀를 내쫓았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류아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면서 이리 혼잣말했다.
“아이참. 집에 앵두가 너무 많아 다 먹지 못할 텐데 어찌하면 좋지? 설탕에 절여 놓아야겠다.”
류아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겨우 참았던 추길은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심호흡을 하며 엽이채를 욕했다.
“시집도 갔는데 좀 조용히 살 수는 없나? 그 먼 곳에서 여기까지 와 수작을 부리네! 우쭐거리는 꼴 하고는!”
화본에 얼굴을 묻고 있던 엽연채가 ‘피식’ 하고 비웃음을 날렸다.
“늦가을 메뚜기 뛰어 봤자 며칠이다. 앞으로 얼마나 더 날뛸 수 있나 두고 보자꾸나!”
추길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엽연채가 혼자 위안하는 말이라고 생각해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 * *
한편, 장만만은 엽연채를 방문한 그날 밤 자신의 이름과 사주팔자를 부적 위에 적었다. 이튿날 아침, 황후를 곁에서 모시는 나이 든 궁인이 부적을 받으러 그녀를 찾아왔다.
장만만은 미소를 지으며 부적을 넣은 흰나비와 꽃문양이 들어간 비단 두루주머니를 그녀에게 건넸다. 두루주머니를 건네받은 궁인은 이리저리 살펴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추켜세웠다.
“장 소저, 두루주머니가 참 곱네요. 직접 만드신 거죠?”
장만만은 살짝 붉어진 얼굴을 끄덕이며 사양했다.
“아이참, 놀리지 마세요. 그냥 제가 완상玩賞하려고 만들어 본 거예요.”
“아가씨, 그리 겸손해하실 것 없습니다. 자수 실력이 포 소저와 오 소저보다 훨씬 뛰어나신 걸요.”
그 말에 장만만의 눈에선 기쁜 기색이 비쳤다. 전에 측비 후보에 오른 다른 두 아가씨와 함께 황후 앞에서 자수를 놓았는데, 황후는 자신의 자수품에 눈길을 주긴 했지만 그 누구도 칭찬하지 않았다. 그런데 황후를 곁에서 모시는 궁인이 이 두루주머니를 칭찬하자 장만만은 뛸 듯이 기뻤다.
“두루주머니의 색도 붉은색이라 경사스러운 느낌이 드네요. 포 소저와 오 소저의 두루주머니에도 이 부적이 들어 있었는데, 하나는 파란색이고 다른 하나는 분홍색이라 붉은색만큼 의미가 좋지는 않죠.”
궁인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덧붙이고는 인사했다.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장만만은 궁인의 말을 곱씹어 보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복을 가져다주는 부적이 들어 있는 두루주머니라? 가만, 마마께서 측비 후보 세 명 중에 내게만 하사하셨던 게 아닌가? 어떻게 두 사람도 받았다는 거지?’
장만만은 생각에 잠긴 채 맹씨의 처소로 걸어갔다.
집안 장부에 적힌 이번 달 수입 지출 내역을 따져 보고 있던 맹씨는 고개를 들어 올리며 딸을 반겼다.
“왔느냐? 마침 잘 왔다. 이 어미 대신 계산 좀 해 보거라. 이제 측비가 될 몸이기는 하나… 그래도 집안일을 처리해야 할 때가 있을 수도 있다.”
장만만은 얼굴을 가리고 미소를 짓더니 그녀 곁에 앉으며 말을 꺼냈다.
“어머니, 방금 전 궁인 사씨가 와서 그 부적을 가져갔어요. 그런데 그 사람이… 오 소저와 포 소저의 부적도 가져갔다고 말했어요.”
맹씨는 잠시간 어리둥절해하더니 고개를 다시 들며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측비 후보 세 명 중에 너에게만 하사하신 것 아니더냐?”
세 후보에게 보이는 황후의 태도는 늘 명확했다. 하사품을 내릴 때면 늘 장만만에게 주는 것이 나머지 두 명보다 더 좋았기에 이를 통해 황후가 이미 장만만을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더군다나 이번 부적은 수량이 많지 않아 이전과 마찬가지로 장만만에게만 주었고 나머지 두 명은 받지 못했다고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저도 그렇게 생각했어요. 부적을 하사하실 때 분명 황후 마마께서 이 부적은 수량이 많지 않아 저에게만 주시는 거라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궁인 사씨가……. 어떻게 부적이 두 사람의 손에도 들어가게 된 걸까요?”
“부적이 더 있었나 보지. 그래 봤자 그냥 부적이니 쓸데없는 걱정할 필요 없다.”
“네, 어머니.”
맹씨가 그녀를 안심시키자 장만만도 한시름 놓고 편히 대답했다.
“그보다 어서 계산 좀 해 주거라!”
맹씨가 미소를 지으며 다시금 말하자 장만만은 모친과 함께 장부의 내역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맹씨도 처음에는 부적 이야기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지만 장부 내역을 따져 보는 동안 점점 기분이 찜찜해졌다. 마침 하늘을 쳐다보니 이 시간이면 시아버지가 조정에서 퇴청해 집으로 돌아올 즈음이다 싶었다.
맹씨는 장부 계산을 대강 마친 뒤 미소를 지으며 장만만에게 일렀다.
“이 어미는 광에 가서 물건들을 하나하나 확인해 봐야겠구나. 넌 이곳에서 마저 계산하고 있거라.”
“네.”
장만만이 고개를 숙인 채 말했다.
방에서 나온 맹씨는 곧장 바깥뜰에 있는 장찬의 서재로 향했다. 예상대로 장찬은 집에 돌아와 있었으나 이제 막 온 참인지 관복 차림이었다.
“무슨 일이냐?”
장찬은 무덤덤하게 고개를 들며 말했다.
“아버님, 오늘 황후 마마께서 복을 가져다주는 부적을 가져가셨다고 합니다.”
맹씨는 방금 전 있었던 일을 이어서 이야기했다.
“마음에 좀 걸립니다.”
그러자 장찬이 날카로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그게 뭐 대수라고. 더 생겼나 보지! 하나 그래도…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라고 했으니 네가 내일 입궁해서 황후 마마를 찾아가 이야기를 나눠 보거라.”
“하지만… 그리하면 너무 옹졸해 보이지 않을까요?”
맹씨가 걱정스러운듯 말하자 장찬은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가 보거라!”
맹씨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밖으로 나갔다.
‘아버님은 늘 심사숙고하시는 분이니 아버님께서 가라고 하시면 가도 문제없을 거야.’
장찬의 서재 밖으로 나온 맹씨는 즉시 사람을 시켜 궁에 문안을 드리겠다는 전갈을 보냈다.
* * *
이튿날 아침, 맹씨는 단장을 마친 후 궁으로 들어갔다. 현재 황후의 자리에 앉아 있는 정씨는 태자의 생모로 영국후부榮國侯府 출신이었다.
영국후부 정씨 가문은 장군가로, 북연北燕과 인접한 우주禹州에 대대로 군대를 주둔해 왔다. 하지만 우주에서는 전쟁이 오랫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기에 정씨 가문은 그곳에서 조용하고 평안하게 지내 왔다. 또 영국후부는 명문가답지 않게 자제들 모두 고상한 척하기 위해 명사를 사귀고 문화 활동에 참가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맹씨가 정 황후가 지내는 봉화궁鳯華宫 문 앞으로 걸어가자 궁녀가 안으로 들어가 황후에게 그녀의 도착을 아뢰었다. 잠시 후 안에서 ‘뫼시어라!’ 하는 허락이 들려오자 맹씨는 안으로 향했다.
망사 휘장이 겹겹이 드리워진 화려한 궁전 안에 나선형 장미 문양이 들어간 널찍한 박달나무 침상이 놓여 있었고, 황금색 봉포鳯袍를 입은 정 황후가 그 위에 반듯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황후 마마를 뵈옵니다.”
맹씨가 깍듯이 예를 올렸다.
“일어나세요.”
맹씨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귀티가 흐르는 동그랗고 반반한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정 황후는 수심 어린 표정으로 먼저 운을 뗐다.
“사 마마媽媽가 어제 귀띔을 해 줬다는데 그 뜻을 분명 알아들었을 것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