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118화 (118/858)

제118화

“이봐요!”

밖에 있던 경인이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좀 도와주시지요. 저희 가게가 1주년 기념으로 반값에 모시고 있습니다!”

호객 행위를 하던 심부름꾼의 굽신거리는 목소리가 밖에서 들려오자 추길과 혜연은 화가 치밀었다. 누가 대체 이따위로 장사를 한다는 말인가! 추길이 발을 걷어 올리고 그 사람을 쫓아내려는 찰나 엽연채가 입을 열었다.

“먹고 가지 않을래?”

“어……?”

추길이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아가씨, 방금 전에 식사하지 않으셨어요?”

방금 전에 자신들은 태자부에서 점심 식사를 대접받았다. 그런데 아가씨는 식사를 못 하셨단 말인가? 두 여종은 마음이 아팠다.

“먹었어. 그런데 태자비 마마와 함께 먹으려니 마음이 불편해서 조금밖에 못 먹었더니 배가 고프구나.”

엽연채가 마차 벽을 두드리자 경인은 그녀의 뜻을 알아차리고 심부름꾼에게 말했다.

“들어갑시다!”

“예! 이쪽으로 오십시오.”

심부름꾼은 흥분한 목소리로 답하더니 그들을 데리고 앞으로 걸어갔다. 엽연채가 창밖을 내다보니 주변은 음식점이 즐비했는데 자신들이 갈 곳은 개중 유독 볼품없어 보이는 식당으로, 편액에는 ‘어계루漁桂樓’라는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어계루 별당 쪽으로 들어선 마차가 멈춰 서자 엽연채와 여종들이 마차에서 내렸다. 이때 평범하게 생긴 심부름꾼이 얼른 다가와 그들을 맞이했다.

“부인, 이쪽으로 오십시오.”

추길은 그들의 마구잡이 호객 행위에 여전히 언짢은 상태였다. 길에서 그렇게 뻔뻔하게 호객 행위를 하는 걸 보니 맛없는 집일 게 뻔했다. 하지만 엽연채가 배고파 하니 못마땅해도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엽연채 일행이 심부름꾼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자 예상대로 몇 사람만 띄엄띄엄 앉아 밥을 먹고 있었다. 심부름꾼은 어디서 먹을 건지 묻지도 않고 그들을 데리고 3층으로 올라갔다. 2층에서는 그나마 인기척이 조금 들리더니 3층 복도로 가자 사람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추길과 혜연은 조금 전보다 더 짜증이 났다. 어디에 앉을지조차 묻지 않으니 이 얼마나 무례한 행동이란 말인가.

‘설마 가장 좋은 방으로 데려가 덤터기를 씌우려는 건 아니겠지?’

추길이 그 심부름꾼에게 한마디 하려는 순간, 엽연채가 돌아서며 두 여종에게 일렀다.

“너희는 여기에 서 있거라.”

“아가씨?”

추길과 혜연이 어리둥절해하며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부인, 이쪽입니다.”

그 심부름꾼은 여전히 헤실거리며 손짓을 했다.

“아가… 윽……!”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한 추길이 엽연채를 급히 따라가려고 했다. 그런데 이때 심부름꾼 차림을 한 두 사람이 갑자기 튀어나오더니 시퍼런 칼을 추길과 혜연의 목에 들이댔다. 두 사람은 얼굴빛이 확 바뀌더니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추길과 혜연도 엽연채와 함께 호의호식하며 자랐으니 어디 이런 험한 일을 겪어 봤겠는가. 둘은 겁을 잔뜩 집어먹어 그 자리에서 온몸이 굳어 버렸다.

엽연채가 고개를 돌리자 익숙한 대검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굳은 표정으로 여종들을 안심시켰다.

“거기 가만히 서 있거라. 움직이지 말고.”

“부인, 이쪽입니다.”

심부름꾼이 앞에서 길을 안내하며 엽연채를 복도 끝으로 이끌었다.

심부름꾼은 끝에서 두 번째 방의 문을 열어젖혔다. 엽연채가 안으로 들어가니 상아색 밑그림에 낚시를 하고 있는 강태공이 그려진 크고 아름다운 병풍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엽연채가 그 병풍을 돌아 들어가니 붉은 비단이 깔린 커다란 원탁이 보였고, 그 위에는 생선 요리가 한가득 차려져 있어 꼭 연회상처럼 보였다.

커다란 창문과 문양이 조각된 네 개의 장지는 활짝 열려 있어 안으로 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창문 아래에는 옻칠한 박달나무 소재의 기다란 침상이 자리했는데, 풍채가 대단히 빼어난 미남자가 그 교룡蛟龍 문양 침상 위에 기대어 있었다.

흑옥黑玉 같은 긴 머리카락은 그가 움직이자 앞으로 흘러내려 뱀이 꿈틀꿈틀 기어가는 모양새로 곡선을 그렸다. 그는 이무기 문양이 들어간 짙은 자줏빛 금포를 입고, 금록석 술이 달린 궁조宫絛(허리에 차는 장신구)를 허리춤에 비스듬히 차고 있었다.

엽연채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다정하고 호방한 기운이 흐르던 그의 두 눈에 싸늘한 빛이 감돌았다. 그는 냉랭한 분위기를 풍기는 입술을 열어 픽 웃었다.

“시장한가? 그럼 식사부터 하자꾸나.”

엽연채는 상 위를 쓱 쳐다본 후 그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청증어清蒸漁(간장 등의 조미료를 넣지 않고 찐 생선 요리), 수자어, 석와어, 부용어芙蓉漁(잘게 다진 생선살과 표고버섯, 말린 조개관자, 피망 등으로 만든 생선 요리)……. 양왕 전하, 저는 무슨 물고기입니까?”

“대어大漁지!”

엽연채의 아리따운 얼굴이 대번에 어두워졌다.

“양왕 전하, 제게 원하시는 게 무엇입니까?”

“이걸 재주껏 태자의 서재에 가져다 두거라.”

양왕은 그리 말하며 순금 패자牌子를 던졌다. 패자 위에는 ‘천자복환령天子復還令’이라는 다섯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예.”

엽연채는 알겠다고 대답한 뒤 바로 돌아서서 문밖으로 나갔다. 그녀의 모습이 병풍 뒤로 사라지자 양왕은 붉은 입술을 추켜올렸다.

“저런 미인이면 태자도 마음에 들어 하지 않겠느냐?”

그의 곁에 서 있던 언서가 맞장구를 쳤다.

“절세미인이니 분명 마음에 들어 할 겁니다.”

양왕은 손에 쥔 벽옥을 쳐다보며 다시 물었다.

“운환이가 화를 낼 것 같으냐?”

언서가 감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자 양왕이 자신의 질문에 스스로 답했다.

“부부는 일심동체 아니더냐. 운환이가 나를 위해 일하는데 그 내자는 하는 일 없이 빈둥거리며 집에 붙어 있어서는 안 되지.”

언서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염려를 표했다.

“만약 저분이 이 일을 주 공자님께 알리면…….”

“운환이에게 알리면 쓸 만한 인물이 아님을 스스로 증명하는 게지.”

호탕한 기운을 뿜던 양왕의 눈빛에 순간 싸늘하고 어두운 기색이 비쳤다.

“그 인신매매 일당은 어디에 있느냐?”

“부윤이 관리하는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마른 쥐’라고 불리는 놈을 풀어 준 다음 팔을 잘라 버리거라. 난 신용을 중시하는 사람이다.”

언서는 고개를 숙이며 그리하겠다고 답했다.

* * *

한편, 방에서 나온 엽연채의 꽃다운 얼굴에는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당했다가 운 좋게 도망쳤고 양왕에게 버려졌다가 신양 공주 별장에서 지내게 되었다. 그 후 공주에게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갔는데, 원래대로라면 공주의 얼굴도 못 봤을 텐데 어쩌다 태자비까지 만나게 되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자신이 덫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아채지 못했다. 태자비가 저의 말린 꽃을 칭찬하는 걸 보고서야…….

자신이 만든 말린 꽃이 그 정도 칭찬을 받을 수준이 아니라는 걸 그녀는 잘 알고 있었다. 고고하신 태자비께서 어찌 그리 거짓된 칭찬을 했던 걸까.

이 의문은 태자비가 보낸 초대장을 받고 더욱 커졌다. 정말 말린 꽃 만드는 방법을 알고 싶었다면 시녀를 이쪽의 집으로 보내 며칠간 배우게 하면 된다. 그리고 만약 자신이 방문하길 원한다 해도 시녀를 보내 맞이하면 그만인데 굳이 직접 접견한다니.

엽연채는 도대체 태자비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헤아려 보았으나 감을 잡지 못했다. 그러다 장미 화원에서 태자를 보고 나서야 모든 게 명확해졌다. 태자비가 원하는 건 자신의 아름다운 외모였다.

마침 태자비는 자신 같은 사람이 필요했고, 주운환은 공교롭게도 양왕의 사람이었다. 단순히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모든 일의 아귀가 너무 딱 들어맞았다. 엽연채는 돌이켜 생각해 보다가 확신하게 되었다. 양왕이 파 놓은 함정에 자신이 걸려들었던 것이다.

모든 진상을 알게 되자 엽연채는 도리어 마음이 담담해졌다. 태자비의 초대장을 받았을 때만 해도 태자비가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으리라는 생각만 했지, 양왕이 뒤에서 일을 꾸미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저 태자부에 가게 됐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었는데, 전통극 공연장에서 주운환이 양왕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리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에 엽연채는 양왕 일행이 벌이고 있는 일에 자신이 관여하지 않을 수는 없다고 판단해 양왕의 덫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주운환이 자신을 두 번이나 도와줬으니 이렇게라도 보답해야 마땅했다.

생각을 정리하는 사이, 엽연채는 계단에 거의 다다랐다. 추길과 혜연은 얼굴이 백지장이 된 채로 그곳에 꼼짝도 못 하고 서 있었다. 방금 전 칼을 들고 있던 두 사람은 이미 자취를 감춘 후라, 긴장한 두 여종이 없었다면 신기루를 보았다고 해도 믿을 성싶었다.

“아가씨…….”

엽연채가 무사히 걸어오는 모습을 보자 추길은 순간 멍해졌다. 그녀 역시 방금 전 벌어졌던 일이 꼭 환각처럼 느껴졌다.

“어서 가요…….”

그나마 먼저 정신을 차린 혜연이 엽연채와 추길을 얼른 잡아당기며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세 사람이 서둘러 식당 밖으로 나와 마차가 세워진 뒤뜰로 가니 경인은 마차에 걸터앉아 졸고 있었다. 그들이 마차에 오르려 하자 흔들림을 느낀 경인이 깜짝 놀라 잠에서 깼다. 그는 세 사람을 보더니 어리둥절해한 투로 물었다.

“아가씨, 식사를 이렇게 빨리 끝내셨어요?”

“그래, 이만 가자꾸나!”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대꾸하고서는 마차에 올라탔다. 경인이 서둘러 자리에 바로 앉아 말고삐를 잡아당기자 마차는 덜덜거리는 소리를 내며 밖으로 나갔다.

이각쯤 지나 마차는 주씨 가문 저택에 도착했다. 세 여인은 마차에서 내려 서둘러 궁명헌으로 갔다. 모두 방 안으로 들어서자 추길과 혜연은 안도의 한숨을 훅 내쉬었지만 몸은 여전히 덜덜 떨리고 있었다.

추길이 눈물을 뚝뚝 흘리며 질문을 쏟아냈다.

“방금 전 그 사람들은 누구예요? 왜 저희 목에 칼을 들이댄 거예요? 거기다 아가씨는 그 사람들을 쫓아가시고……. 흑흑… 무서워 죽는 줄 알았어요. 아가씨한테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닌가 하고…….”

혜연은 찻잔 석 잔에 차를 따르며 도대체 무슨 일이냐는 얼굴로 엽연채를 쳐다봤다.

“으… 그게…….”

엽연채는 잠시 생각하더니 핑곗거리를 찾아냈다.

“인신매매범이야!”

“인신매매범이요?”

추길과 혜연은 깜짝 놀라 소리치더니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물었다.

“설마… 지난번에 아가씨를 잡아갔던 그 인신매매범이요? 양왕 전하와 부윤 대인께서 체포한 뒤 가둬 놓지 않았어요?”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리며 둘러댔다.

“아직 몇 명은… 잡히지 않았어.”

“그런데 인신매매범이 왜 저희 목에 칼을 들이대요? 아가씨는 또 왜 부르는데요?”

머릿속이 의문투성이가 된 추길이 놀라서 벌벌 떨며 물었다.

“그 인신매매범이 도망은 가고 싶은데… 돈이 없다고 하더구나. 내가 알아보기 쉬운 얼굴이잖니. 그래서 길에서 마주치자 우리를 데리고 간 거지.”

엽연채는 생글생글 웃으며 거짓말을 늘어놨는데, 말할수록 그럴싸하게 느껴졌다.

“돈을 달라고 해서 얼마쯤 쥐여 줬어. 이곳은 도성 안이니 그들도 함부로 일을 벌일 수는 없어 돈을 받고 서둘러 내뺀 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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