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7화
“전하, 소인에게 계책이 있사옵니다.”
환관이 낮은 목소리로 고했다.
“우선 전하의 방법대로 장만만을 내치시고 이번 달 말에 측비를 간택할 때 다시…….”
태자는 그 말을 듣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거참 괜찮은 생각이구나. 그렇게 하자꾸나!”
“날씨가 참 지독히도 덥습니다. 전하, 이만 돌아가시죠!”
“그래.”
두 사람이 돌아서서 장미 화원 밖으로 나가자 엽연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나서 잠시 기다렸다가 서둘러 화원 밖으로 걸음했다.
“부인.”
금슬이 근처에 있는 용수榕樹 아래 서서 알은체를 했다. 엽연채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속으로 금슬에게 욕을 퍼부었지만 얼굴에는 얼른 다시 미소를 띠어 보였다.
“모두 어디 갔었던 거니? 내 바구니는 거의 다 찼는데 너희들 모습은 보이지 않더구나.”
금슬은 두 눈을 살짝 깜빡이더니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꽃은 충분히 땄습니다! 방금 전 화원에서 소인이 꽃은 충분히 땄으니 이만 돌아가자고 몇 번이나 말씀 드렸는걸요. 그런데 그때 시녀 하나가 보채는 바람에 소인이 부인을 신경 쓰지 못했습니다. 정화원에 돌아오고 나서야 부인이 안 계시다는 걸 알아채고는 이렇게 찾으러 온 겁니다.”
“내가 꽃 따는 데 너무 열중해 듣지 못한 모양이구나.”
“부인, 저와 함께 어서 돌아가시죠.”
두 사람은 돌아서서 왔던 길로 걸어갔다. 뒤에 있던 간소한 차림의 한 시녀가 빠른 걸음으로 다른 길로 들어서더니 한 발 먼저 정화원에 도착했다.
* * *
태자비는 어두운 표정으로 침상 위에 앉아 있었고 하좌에 놓인 수돈에는 나이 든 마마媽媽가 앉아 있었다.
이때 간소한 차림의 시녀가 헐레벌떡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마마.”
“어떻게 됐느냐? 태자 전하께서 그 사람을 보셨느냐?”
태자비가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
“보아하니 못 보신 것 같습니다.”
태자비는 입을 살짝 오므렸다. 그녀는 화가 나면서도 또 한편으론 한시름을 놓았다.
“마마, 주씨 가문 셋째 부인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노마마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렇다.”
태자비가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어갔다.
“풍 측비 그 천박한 것이 갈수록 오만방자하게 행동하고 있다. 곧 새로운 측비가 들어올 텐데 태자 마마께서는… 백여언을 측비로 들이려는 것 같구나. 그 여인이 측비로 들어오게 되면 태자 마마께서 날 찾으시겠느냐? 통이가 세상을 떠난 후로는…….”
태자비는 눈시울이 조금 붉어졌다. 그녀는 태자에게 장남을 안겨 주었지만 4년 전 불행히도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현재 슬하에는 어린 군주郡主(친왕의 딸)만 한 명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서비庶妃에게는 사내아이가 하나 있었다. 풍 측비의 친정은 날이 갈수록 세력이 커지고 있으니, 태자비는 최대한 빨리 아들을 다시 낳아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언젠가는 자신의 자리를 빼앗기고 말 것이었다.
하지만 태자는 태자비에게 무심했고 그녀의 처소를 전혀 찾아오지 않았다. 애가 탄 태자비는 예쁘게 생긴 시녀를 뽑아 태자에게 붙여 볼 생각도 해 봤지만 적당한 아이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날 신양 공주부에서 엽연채를 봤던 것이다. 그런 외모를 쓰지 않는 건 너무 낭비이지 않은가.
거기다 엽연채는 격에 맞지 않게 몰락한 가문의 서자에게 시집을 갔으니, 혼인을 달가워했을 리가 없었다. 부귀영화를 바라고도 남을 것인데, 권세를 쥔 태자가 유혹하면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이미 혼인을 한 여인이니 가지고 놀면 그뿐, 책임지지 않아도 되었다. 또 첩지를 달라고 요구하지도 않을 테니 그야말로 일거양득이었다.
엽연채가 태자와 관계를 맺게 되면, 도성 사람들이 보는 곳에서 그녀의 체면을 세워 주며 재물을 하사하면 되었다. 그렇게 잘해 주는데 이쪽을 따르지 않고 배기겠는가? 자신이 수시로 엽연채를 부르면 태자가 정화원에 오게 될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태자비의 눈빛에서 미약한 분노가 일렁였다.
“이게 다 주씨 가문이 제 구실을 못 해 참패를 당하고 병권을 내줬기 때문이다. 그들이 제 역할을 해냈다면 풍씨 가문이 두각을 드러낼 기회를 어찌 얻을 수 있었겠느냐! 풍 측비가 어디 지금처럼 득세할 수 있겠어!”
과거에는 주씨 가문이 응성에 군대를 주둔시켰으나 주씨 가문이 몰락해 버린 현재는 풍씨 가문이 그곳을 지키고 있었다.
“마마께서 생각하신 방법이 괜찮을 것 같습니다. 다만 왜 그분을 화원으로 보내 태자 전하와 마주치게 하셨습니까? 그분을 마마 곁에 머물게 한 다음 태자 전하를 모셔 와야 전하와 밀고 당기기를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태자 전하는 체면을 중히 여기시는 분이니, 마마께 바로 그분에 대해 물어보지는 않으실 테지요. 그러니 태자 전하께서 마마께 부탁을 하게끔 해야 더 좋지 않을까요?”
노마마의 말에 태자비는 크게 깨달았다.
“네 말이 맞다! 네가 곁에 없는 반나절 동안 내가 또 실수를 하고 말았구나. 그래도 그 아이가 아직 태자 전하와 마주치지 않았다니 다행이다.”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사이 엽연채와 금슬은 이미 정화원 문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태자비는 그 모습을 보더니 금세 미소를 지었다.
노마마 석씨는 금슬 뒤에서 걸어오고 있는 엽연채의 모습을 보고 작은 목소리로 감탄했다.
“정말 보통 미모가 아니군요.”
태자비는 기분이 언짢았다. 그녀도 엽연채의 용모가 아름답다는 것은 인정했지만, 석씨가 엽연채의 외모를 칭찬하니 순간 질투가 난 것이다.
엽연채가 태자비에게 예를 올렸다.
“마마를 뵈옵니다.”
태자비가 보니 엽연채는 낯빛이 조금 하얗게 변한 채 두 눈을 가볍게 깜빡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손에 들린 바구니 안에는 진홍색과 분홍색의 장미꽃이 가득 들어 있었다.
태자비는 미소를 지으며 수고를 치하했다.
“꽃이 정말 곱군. 이렇게 왔으니 함께 식사라도 하게나.”
“예, 마마.”
엽연채가 호의를 받아들일 때 이미 시녀가 찬합을 들고 걸어오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에는 녹나무로 만든 원탁이 놓여 있었는데, 시녀는 아홉 가지 반찬을 넣을 수 있는 조칠彫漆된 찬합을 열어 안에 든 음식을 하나씩 그 원탁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앉게나. 체면 차릴 것 없이 맘 편히 들게.”
태자비가 미소를 지으며 권하자 엽연채는 자리에 앉았다. 태자비가 보니 엽연채는 어색해하며 긴장한 모습이 역력했고 시녀에게 반찬을 집어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태자비가 옥 젓가락을 들고 밥을 먹으며 날카로운 눈빛으로 엽연채를 쳐다보니, 그녀는 고개를 숙인 채 조심스럽게 밥 반 공기를 비웠다. 태자비는 입꼬리를 올리더니 그녀에게 더 먹으라고 권하지 않고 그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엽연채는 그 모습을 보고는 자신도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두 사람이 시녀가 내온 차를 마시며 입가심을 하는데, 시녀 하나가 걸어 들어오더니 태자비의 귀에 대고 뭔가를 소곤거렸다.
태자비는 눈썹을 살짝 찡그리더니 금슬에게 물었다.
“방금 전까지 부인과 함께 있으면서 꽃 말리는 법은 다 배웠느냐?”
그러자 금슬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마마, 이제 겨우 꽃잎 닦는 법만 배웠을 뿐입니다.”
그러자 태자비가 ‘음’ 하더니 엽연채를 쳐다보며 말했다.
“그럼 다음에 또 오시게나. 금슬아, 부인을 배웅해 드려라.”
금슬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엽연채와 함께 문을 나섰다.
태자비가 석씨에게 소식을 전했다.
“전하께서 이미 밖으로 나가셨으니 오늘은 만나지 못할 것이다. 다음을 기다려야겠구나! 아까 장미 화원에서 사내의 목소리를 듣더니 숨은 것 같더구나. 어쩐지 안색이 하얗게 질렸고 넋이 완전히 나갔더라니.”
“어쨌든 기루의 방탕한 여인이 아니라 대갓집 규수이니 갑자기 외간 사내와 그런 짓을 하라고 하면 못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천천히 걸려들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
태자비는 아주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탄스러우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온갖 궁리를 해 가며 자신의 남편에게 다른 여인을 붙여 주고 싶은 여인이 어디 있겠는가?
게다가 자신은 어엿한 태자비였다. 그런데도 이런 수단까지 써야만 남편을 붙잡을 수 있었다. 자신이라고 이렇게 자존심을 다 내다 버리고 싶었겠는가? 그러나 현실이 이리할 수밖에 없도록 저를 몰아세우고 있었다.
“오늘 일을 저 아이가 다른 사람에게 말할 것 같으냐?”
태자비가 작은 목소리로 석씨에게 물었다.
“마마, 걱정 마세요. 그분은 자신이 덫에 걸렸다는 걸 아직 모르는 눈치입니다. 그저 우연히 벌어진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또 여인으로서의 평판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는데, 본인이 먼저 남에게 말할 리가 없지요.”
태자비는 석씨의 말을 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 * *
한편, 금슬을 따라 수화문에 도착한 엽연채는 추길과 혜연이 그곳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두 사람은 기쁜 얼굴로 엽연채를 반겼다.
“아가씨.”
엽연채는 안도의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돌려 금슬에게 인사했다.
“네가 오늘 고생이 많았구나.”
“아닙니다, 부인.”
금슬이 미소를 지으며 예를 올렸다.
엽연채와 여종 둘이 마차에 오르자 마차는 천천히 태자부에서 멀어져 갔고 금슬은 그제야 돌아서서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경인이 모는 마차가 정륭가를 벗어나자 추길과 혜연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 태자비 마마 처소에서 말린 꽃을 만드셨어요?”
추길이 불안과 흥분이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아가씨가 처소로 들어가신 후, 저흰 사람을 따라 정화원 밖으로 나갔고 그곳에서 멀지 않은 작은 응접실에서 머물렀어요. 앉아 있다가 아가씨가 바구니를 들고 시녀들과 함께 밖으로 나가시는 모습을 보았거든요. 꽃을 따러 가신 거예요?”
엽연채는 뜨뜻미지근한 목소리로 그렇다고 할 뿐, 창밖을 바라보며 더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모습에 추길과 혜연은 서로를 쳐다봤다. 침묵하는 혜연 곁에서 추길 역시 상기된 표정을 거두고 얌전히 있었다.
‘아가씨가 난처한 일이라도 겪으신 걸까?’
그때 마차가 동대가 쪽으로 들어섰다. 마침 점심시간이라 음식점들은 시끌벅적하고 길가는 사람들로 북적거려 마차는 전혀 속도를 낼 수가 없었다.
“산채어酸菜漁(산천어와 절인 배추 등을 넣고 시고 맵게 끓인 생선 요리), 수자어水煮漁(산천어와 콩나물, 고추 등을 넣고 끓인 생선 요리), 석와어石窩漁(화련어와 민물 새우, 푸른 콩 등을 돌솥에 넣고 끓인 생선 요리)… 생선 요리라면 없는 게 없습니다! 개업 1주년 기념으로 반값에 모시고 있습니다! 거기 젊은이와 안에 계신 부인과 소저들, 저희 가게에 와서 생선 요리 한번 드셔 보는 건 어떠세요?”
갑자기 마차가 흔들리더니 급하게 멈춰 섰다. 누군가가 마차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