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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116화 (116/858)

제116화

엽연채가 일어서자 태자비는 그녀를 더욱 유심히 살펴봤다. 엽연채는 푸른빛이 도는 적삼과 치마를 입고 있었고 머리 역시 단순했다. 간단히 수운계로 틀어 올려 매화 장식과 술이 달려 있는 금잠만 꽂은 채였다. 그러나 단출한 치장이 오히려 복숭아와 자두처럼 아리따운 그녀의 용모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지난번에 선물받았던 말린 꽃이 아주 마음에 들어 오늘 이렇게 도움을 청했네.”

태자비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건넸다.

“소인이 미력하나마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부인, 이쪽입니다.”

엽연채가 금슬을 따라 다시 밖으로 나가니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겠거니 했던 추길과 혜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하나 깊이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엽연채는 얼른 금슬을 따라가야 했다.

본채에서 왼쪽 방향으로 걸어가니 조그만 뒤채가 보였고 안에는 기다란 탁자가 자리했다. 그 위로 모란이 한가득 펼쳐져 있었고, 탁자 양쪽에는 두꺼운 부들방석이 놓여 있었다.

“부인, 많이 가르쳐 주세요.”

금슬이 미소를 지으며 그중 한 곳에 앉았고 엽연채는 그녀의 맞은편에 앉으며 대꾸했다.

“어렵지 않아. 이젠 날씨가 무더워 꽃잎 위에 물기도 없으니, 꽃잎에 묻은 먼지만 천으로 깨끗이 닦아 주면 되거든.”

금슬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어린 시녀에게 면포를 가져오라고 시켰다.

금슬과 엽연채는 이내 분주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탁자 위에는 꽃이 한가득 놓여 있는데, 금슬이 다른 사람들을 부르지 않아 오직 둘이서만 꽃잎을 꼼꼼히 닦았다. 엽연채는 이렇게 손이 적어서야 해가 질 때까지 닦아도 다 닦을 수 있을까 하는 염려가 들었다.

“아 참, 방금 전 나올 때 보니 내 여종들이 보이지 않던데 어디 간 거니?”

엽연채는 많은 걸 물을 수 없어 이 말만 꺼냈다.

“밖에 나가 앉아 있으라고 했어요.”

금슬은 미소를 지으며 엽연채를 안심시켰다.

“부인, 걱정 마세요. 설마 저희가 부인의 여종들을 탐내겠습니까.”

엽연채도 더는 물어볼 수가 없어 옅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말았다. 두 사람이 한 시진쯤 꽃잎을 닦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수수한 차림의 시녀가 안으로 들어와 공손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금슬 언니, 마마께서 장미꽃도 말리라고 하셨어요!”

“그래.”

금슬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엽연채에게 말했다.

“부인, 마마께서 장미꽃도 말리라고 하시네요. 저와 꽃을 따러 함께 가시지요. 꽃을 딸 때 뭔가 주의할 게 있을까요?”

“꽃을 딸 때는 주의할 게 없단다. 평소처럼 따면 돼.”

엽연채는 이렇게 대꾸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두 사람이 뒤채 밖으로 나가니 방금 전 봤던 수수한 차림의 시녀가 엽연채와 금슬에게 꽃바구니를 하나씩 건네주었다. 그 곁에는 간편한 차림을 한 시녀 세 명이 바구니를 들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가시지요!”

엽연채는 금슬을 쫓아갔고 그렇게 여섯 명이 함께 화원을 향해 걸어갔다. 걸어가는 내내 주변은 산과 물로 둘러싸인 데다 곳곳에 정자가 자리하고 있어 정갈하고 우아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구불구불한 오솔길을 지나니 그윽하고 아름다운 장미 화원이 나왔다. 진홍색, 분홍색 등 가지각색의 장미가 푸른 잎과 날카로운 가시 사이로 불꽃이 타오르는 양 활짝 피어 매혹적이고 강렬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금슬이 고개를 돌리더니 미소 띤 얼굴로 엽연채에게 말했다.

“부인, 이제 꽃을 따시면 됩니다.”

“그래.”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꽃바구니에서 작은 가위를 꺼내며 물었다.

“어떤 색을 원하시는지 말씀하셨느냐?”

“다 괜찮다고 하셨어요.”

화원이 아주 넓어서 엽연채와 시녀들은 각자 흩어져서 천천히 꽃을 따기 시작했다. 장미꽃을 딸 땐 자칫하면 손이 찔릴 수 있어 주의해야 했다. 반짝거리는 햇살 아래서 엽연채는 꽃을 따는 데 집중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엽연채의 조그만 얼굴은 태양에 그을려 붉게 달아올랐고 이마의 머리카락 언저리는 땀에 젖어 있었다.

그녀의 꽃바구니가 거의 가득 찼을 무렵, 가까운 곳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날씨가 지독하게 더우니 그만 돌아가 보거라!”

엽연채는 갑작스러운 소리에 깜짝 놀라 그만 장미꽃 가시에 손을 찔렸다. 손가락에 콩알만 한 핏방울이 내맺혔다. 엽연채는 아파서 입술을 깨물었지만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방금 전 들었던 음성이 사내의 것이기 때문이었다.

이곳은 태자의 후원이니 평범한 사내들은 자유롭게 출입할 수 없는 곳이었다. 그럼 환관인 걸까? 태자는 궁정에 자주 출입하기도 하고 장차 대통을 이을 자이기도 하니 그의 저택에서도 환관을 부렸다. 그리고 방금 전 들었던 목소리도 다소 여성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만 가 보거라!”

이 말과 함께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러자 엽연채의 얼굴이 조금 어두워졌다. 먼저 들렸던 목소리는 환관의 목소리 같았지만 지금 들린 이 웃음소리는 그렇지 않았다.

엽연채가 급히 좌우를 살펴보니 방금 전까지 함께 꽃을 따고 있던 시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엽연채가 주먹을 꽉 쥘 때, 장미꽃 덤불 사이로 두 사람의 그림자가 천천히 다가오다가 멈춰 서는 모습이 보였다. 엽연채는 몸을 움츠린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며칠 후면 칠월이고 팔월 초에 측비가 간택될 겁니다.”

환관이 말했다.

“난… 장만만이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태자의 목소리는 우아하고 부드러웠지만 살짝 교만한 기색이 섞여 있었다.

엽연채는 죽은 듯 있느라 숨소리조차 크게 낼 수 없었다. 그런데 지금 장만만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던가?

“황후 마마께서 장씨 가문은 공훈이 있는 귀족이 아니고 청렴한 집안이며 그 아비가 대리시경이니 후보 세 명 중 가장 적합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전하와 마마께서도 이미 장 대인에게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환관의 말에 태자가 쥘부채로 백옥 같은 손아귀를 톡톡 두드리며 대꾸했다.

“그렇긴 한데 장만만이… 너무 못생겨서 마음에 들지가 않아!”

장미꽃 덤불 뒤에 숨어 있던 엽연채는 그 말에 입을 삐죽거렸다. 꽈르릉 하고 천둥소리가 울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전생에 장만만이 후보에서 탈락한 이유는 장만만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사람이 있기 때문이라고 들었다. 그래서 엽연채는 황후가 장씨 가문을 크게 도움이 될 집안이 아니라고 판단했거나, 아니면 장만만에게 예의 같은 부분에 미진한 면이 있다고 느껴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런 단순한 이유 때문이었다. 못생겨서라니!

사실 장만만의 얼굴은 못생긴 게 아니라 그저 특징이 없어 평범할 뿐이었다. 장박원은 어머니를 닮아 수려한 용모를 가졌지만, 장만만은 아버지를 닮아 수수하게 생겼다. 살짝 넓고 둥근 얼굴형에 이목구비도 평범한지라 열심히 꾸며야 중간 정도 가는 외모였다.

“전에는 그 사람을 본 적이 없었잖으냐……. 그런데 그저께 어머니 처소에서 그 사람과 마주쳤는데… 생김새가 정말…….”

태자의 목소리에는 거부감이 잔뜩 묻어났다.

“하지만… 전에 전하께서 마마께 알아서 하시면 된다고 말씀하셨잖습니까.”

환관이 웃으며 말했다.

“에휴!”

태자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전하께서 측비로 들이겠다고 하셨는데 이제 와서 그러지 않겠다고 하시면 장 대인께 어떻게 설명하시렵니까?”

“난 대리시경 따위는 없어도 그만이다.”

태자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 듯 가벼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4황자였으면 얼른 달려가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겠지만, 난 대리시경쯤이야 없어도 그만이다.”

바깥으로는 외족外族과 측비의 친정이 군대를 주둔시켜 대제의 변경과 요새를 지키고 있었고, 안으로는 조정의 중신인 처족妻族이 뒷받침하고 있기에, 태자는 사람이 아쉬운 상황이 결코 아니었다.

“그래도 괜히 밉보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환관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걱정을 표했다. 그러자 태자는 재차 쥘부채로 손아귀를 톡톡 두드렸다. 자신의 자리를 안정적이고 견고하게 다지는 것을 마다할 자는 없는 법이었다. 제아무리 태자라 해도 경망스럽게 행동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어머니께 적당한 핑곗거리로 둘러대 달라고 부탁드려야겠구나. …아니, 아니지. 어머니께서 이유를 대면 꾸며 낸 말이라는 걸 그들도 알아차릴 게다. 차라리 할마마마께 부탁드려야겠구나.

사람을 시켜 할마마마께 장씨 가문이나 장만만에게 문제가 있다고 슬쩍 흘리면 된다. 그럼 할마마마께서 이 혼사를 없던 일로 하실 게다. 할마마마께서 앞에 나서시면 그쪽도 나와 어머니를 원망할 수는 없겠지.”

그러자 환관이 미소를 지으며 아부했다.

“역시 전하의 고견은 따라갈 자가 없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엽연채는 두 눈을 살짝 깜빡였다. 전생에선 그 핑곗거리가 자신이었는데 그럼 이번 생에서는…….

“난 백여언을 측비로 삼고 싶구나.”

이때 태자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고 ‘백여언’이라는 세 글자에서 흡족함이 느껴졌다.

“백씨 가문의 여섯째 아가씨를 말씀하시는 거죠?”

환관은 가볍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미소를 지어 보였다.

“확실히 미인이기는 하죠.”

“그래.”

“그러나 안타깝게도… 백씨 가문에선 2대째 관리가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몰락한 집안이죠.”

“몰락한 가문이면 어떠냐? 난 그런 사소한 도움 따위는 필요 없는 사람이다.”

태자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이 말을 덧붙였다.

“그런데 백여언이… 너무 눈에 띄는 얼굴이긴 하지.”

엽연채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이 가 입을 삐죽거렸다.

태자는 예전부터 평판이 좋은 사람이었다. 사람들은 그가 군대를 부리는 책략에 능하고 재주와 인품을 두루 갖췄다고 칭송했다.

예법을 지키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양왕과는 달리, 태자비도 학문을 숭상하고 법도를 따르는 명문가의 재녀로 간택했으며 첩실들도 하나같이 어질고 품성이 고우니 태자는 사람을 볼 때 외모를 보지 않고 됨됨이와 재능을 본다고 입에 침이 마르게 칭찬했다.

달리 말하면 태자부 여인들의 외모는 한마디로 ‘미인’의 범주에는 들지 않았다.

사실 태자는 장만만을 받아들일 생각이었으나, 백여언을 보고 나니 놓치고 싶지 않았고 고민 끝에 미인을 들이기로 한 것이다.

“맞습니다. 그리고 장만만을 후보에서 제외한다고 하더라도 아직 두 명이 더 있지 않습니까. 오 소저와 포 소저도 외모가 괜찮은 편입니다.”

환관이 이렇게 말을 받았다. 틀린 말은 아니나 두 사람은 백여언만큼 출중한 외모를 가진 건 아니었다.

태자는 명예를 중시하는 사람이라 색을 밝히고 외모로 사람을 평가한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세 명의 후보를 전부 내칠 수는 없었다. 후보에도 없는 백여언을 간택하게 되면 사람들은 그가 백여언의 아름다운 외모만 보고 그녀를 간택한 것임을 알게 될 터였다. 그러면 모두 태자가 여인의 용모만 따지는 사람이라고 수군댈 것이 분명했다. 태자는 자신에게 어떠한 오점도 남기고 싶지 않아 고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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