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5화
“음, 공자님은 이 극을 쓴 작가를 아시나 보죠? 그러니 하편의 결말도 미리 아시고 계실 것이고요. 저한테도 소개해 주세요.”
“아는 셈이지요. 하지만 소개해 줄 수는 없습니다.”
“공자님이 온종일 전통극을 보는 게… 설마 일과 관련된 건가요?”
주운환은 잠시 멍해지더니 딱딱한 말투로 대꾸했다.
“너무 많은 것을 묻지는 마십시오.”
이에 엽연채는 공연장 일은 더 묻지 않기로 했으나, 참지 못하고 이내 다른 질문을 던졌다.
“공자, 꼭 양왕 전하와 일을 도모해야 해요? 어째서… 양왕 전하를 선택한 거예요?”
주운환은 오늘 엽연채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전에는 이 일과 연관되지 않으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오늘은 되레 적극적으로 물어오고 있었다.
“어차피 소저도 알게 됐으니 말해 드려도 무방하겠지요. 저에게 양왕 전하는… 아마 이상하다고 생각하실 테지만, 저에게 양왕 전하는 아버지이자 스승이고 벗입니다.”
엽연채는 정말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양왕은 스물서넛밖에 안 된 청년이었다. 주운환보다 기껏해야 예닐곱 살가량 많을 뿐인데, 주운환은 아이가 부모에게 보이는 존경심을 내비치고 있었다.
“제가 어렸을 때, 그러니까 집안이 아직 몰락하지 않았을 때, 주씨 가문 사내들은 대부분 응성에 있었습니다. 사내들뿐만 아니라 할머님을 비롯해 담력이 대단한 몇몇 숙모님들도 응성에 계셨지요.
다른 사람들은 말타기와 활쏘기를 배웠지만, 전 어머니의 미움을 받아 무릎을 꿇고 벌을 받거나 경문을 필사했어요. 그런데 제가 아홉 살이던 해에 가문에 변고가 생기면서 더더욱 아무것도 배울 수 없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매일같이 저희 형제에게 공부에 매진하라고 강요하셨지만 저는 공부에 뜻이 없었습니다. 전 몰락한 집안의 서자인지라 온종일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는 데다 위로 올라갈 사다리마저 끊어져 버렸으니 매일 허송세월하며 어리석은 삶을 살아갈 뿐이었어요.
그러다가 열두 살 때 양왕 전하를 처음으로 뵙게 됐지요. 그때 전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몰락한 가문의 어린애였습니다. 서원 문 앞에서 사람들에게 모욕을 당하고 있는데 양왕 전하께서 저를 데려가셨어요. 금琴을 타고 바둑을 두는 법,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는 법, 말타기와 활쏘기, 주산까지 모두 양왕 전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겁니다.”
주운환은 거기까지 이야기하더니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그러나 이 정도 정보만으로도 양왕이 없었다면 지금의 주운환도 없었을 거라는 사실을 알기에는 충분했다. 그들 사이는 평범한 상하 관계가 아니었다. 양왕이 어떤 사람이든, 그의 앞날이 어떠하든, 주운환은 끝까지 양왕 편에 설 것이 분명했다. 양왕의 목숨이 위태로울 경우 주운환은 그의 앞에 서서 그를 지킬 것이었다.
주운환은 젓가락을 들고 압자고 하나를 집어 들더니 엽연채의 접시에 놓아 주며 권했다.
“먹어 보십시오.”
근심에 잠긴 엽연채가 고개를 숙이자 샛노란 압자고가 눈에 들어왔다. 녀석은 동글동글한 눈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기분이 한층 복잡해진 엽연채는 젓가락으로 압자고를 집더니 ‘앙’ 하며 압자고의 머리를 물어뜯었다. 입 안에서 달달한 소와 떡의 찰기가 느껴졌지만 엽연채는 아무 맛도 느낄 수가 없었다.
“맛있나요?”
이때 속사정을 모르는 주운환이 물었다.
“…맛있어요.”
“그럼 갈 때 포장해 갑시다.”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릴 뿐, 싫다고 솔직히 말하지 않았다.
아래층 무대에선 여전히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엽연채는 방금 전까지 계속 주운환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앞에 무슨 이야기가 전개됐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러나 맥락을 몰라도 절로 감탄이 나오는 연기였다. 여성 배역과 남성 배역이 옷소매를 뿌리치며 비통하면서도 환희에 젖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는데, 가슴 절절한 깊은 사랑이 느껴졌다. 무대 아래에선 손수건으로 입과 코를 막고 눈물을 흘리는 부인도 보였고 사내들마저도 눈물을 머금고 있었다.
‘와, 이렇게 사람들의 심금을 울린단 말이야? 다음번에는 꼭 제대로 봐야겠다. 이 정도로 마성의 연극일 줄이야!’
얼마 후, 무대의 막이 내렸다.
주운환은 술잔 두 개에 술을 따르고는 한 모금 맛보더니 ‘음’ 하고 감탄했다.
“맛이 좋네요.”
엽연채는 그 모습을 보더니 자신도 잔을 들어 술을 홀짝거렸다. 처음에는 알싸한 향이 느껴지더니 곧이어 순한 향이 입 안 가득 퍼지며 긴 여운을 남겼다.
“소저, 더 보시겠습니까?”
“아니요. 이제 가요!”
부부가 1층으로 내려가자 심부름꾼이 얼른 그들 곁으로 다가왔다. 주운환은 정말로 심부름꾼에게 압자고를 포장해 달라고 부탁했다. 심부름꾼이 상 위에 남은 운편고와 매괴병도 같이 포장해야 하냐고 묻자 주운환은 됐다면서 압자고만 포장해 달라고 했다. 엽연채는 그 모습을 보며 할 말을 잃었다.
이내 부부는 공연장 밖으로 나와 마차가 세워진 마구간으로 걸어갔다. 구석진 곳에 푸른 덮개를 씌운 엽연채의 조그만 마차가 세워져 있었다. 경인은 마차에 기대어 졸고 있었고 추길은 끌채에 앉아 발을 흔들고 있었다.
추길은 상전들이 걸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얼른 뛰어내려 그들을 맞았다.
“아가씨, 공자님, 오셨군요.”
그러더니 품속에서 진주가 상감된 홍목 빗을 꺼냈다.
“아가씨, 마음에 드세요?”
“그래, 예쁘구나.”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엽연채와 추길이 마차에 오르고 주운환이 말에 오르자, 마차와 말은 마구간을 나서 도성 북쪽을 향해 나아갔다.
* * *
궁명헌으로 돌아온 엽연채와 추길은 온몸이 땀범벅이었다. 그 모습을 본 혜연이 얼른 두 사람의 목욕 시중을 들고 갈아입을 옷도 준비해 주었다.
엽연채가 가볍고 얇은 여름옷으로 갈아입자 혜연이 시원한 수박을 들고 와 소청의 원탁 위에 올려놓았다.
“마님 몸은 좀 괜찮아지셨어?”
“응, 활기가 넘쳐 보이셨어.”
추길이 수박을 베어 물며 혜연의 질문에 답했다.
“칠월에 어머니를 모시고 별장에 가서 한동안 머물자꾸나.”
추길은 손뼉을 치며 엽연채의 제안을 반겼다.
“좋은 생각이세요. 가서 바람을 쐬며 기분 전환을 하시는 거죠.”
그러나 엽연채는 단순히 근교에서 휴양할 목적으로 제안한 게 아니었다. 곧 있으면 허서가 향시를 치른다. 전생에서는 어머니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허서는 향시에 합격하자마자 바로 정안후부로 들어올 수 있었다. 하지만 이번 생에선 어머니가 잘 지내고 계셨다. 하니 엽승덕은 아마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할 것이었다.
채 마마 등에게 밤낮으로 방비를 하라고 당부할 바에야 차라리 적들에게 손댈 기회조차 주지 않는 편이 훨씬 나았다. 엽연채는 각오를 다지며 수박을 와작와작 씹어 먹었다.
“아가씨, 내일 태자비 마마를 뵈러 갈 때 어떤 옷을 입고 가야 할까요?”
추길은 태자부에 가는 일을 한시도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엽연채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대충 대꾸하고 말 뿐이었다.
“평범하게 입고 가면 돼. 작년에 오밀조밀한 하얀 꽃무늬가 들어간 푸른 치마와 적삼을 만들지 않았어? 그거면 돼.”
엽연채는 본래 빨간색 계열의 옷을 좋아했다. 그러나 한여름에 그런 색을 입으면 한층 더워 보이기 십상이었다. 푸른색을 입어야 시원하고 산뜻해 보일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올해 아가씨 옷을 한 벌도 만들지 않았네요. 조만간 두 벌 만들어 드릴게요. 이번에는 곡거曲裾와 유군襦裙을 만들려고요. 아가씨 옷장에는 거의 적삼하고 치마뿐이잖아요.”
추길이 말했다.
“내가 적삼하고 치마를 제일 좋아하는걸. 그나마 유군은 괜찮지만 곡거는 영 별로야.”
엽연채는 과육을 깨끗이 먹어 치운 수박 껍질을 내려놓으며 대꾸했다.
추길도 수박을 다 먹고 손을 씻더니 옷장으로 가 옷을 살펴본 후 다시 화장대 앞으로 가 장신구를 준비했다.
* * *
이튿날 아침, 엽연채는 채비를 마친 후 주씨 가문 마차를 타고 문을 나섰다. 삼각쯤 가서야 태자부가 위치한 정륭가靖隆街에 도착했다.
태자부는 황궁과 인접해 있으며 정륭가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웅장한 저택은 높다란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는데, 새하얗게 칠해진 담장 너머로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은 누각들이 늘어서 있어 화려함과 번영함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마차가 대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돌아 작은 골목으로 들어가더니 마침내 태자부의 동쪽 측문 앞에 멈춰 섰다. 문 앞은 호위병 둘이 지키고 서 있었다. 엽연채가 내려 배첩을 건네자 그중 한 명이 살펴보더니 통과하라고 했다.
잠시 후 수화문에 마차가 도착하자 엽연채는 다시 마차에서 내렸다. 그러자 저번에 초청장을 전하러 왔던 어여쁜 시녀가 화려한 차림을 하고 그녀 앞으로 다가왔다.
“주씨 가문 셋째 부인,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고마워”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답하자 그녀 역시 방긋 웃으며 자신을 소개했다.
“소인의 이름은 환금슬입니다. 편하게 금슬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엽연채는 금슬과 함께 수화문으로 들어갔다. 청석이 깔린 길을 걸어가니 주변에는 누각이 즐비했고 끊임없이 돌고 도는 회랑이 눈길을 끌었다. 저 멀리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있는 누각도 시선을 사로잡았다. 하나같이 웅장하고 장엄한 모습이었다.
엽연채는 금슬을 따라 협문으로 들어간 뒤 오른쪽으로 돌아 대략 일각쯤 더 걸어 화려한 정원에 도착했다. 고개를 들어 보니 금박을 붙인 편액 위에 ‘정화원正華院’이라는 세 글자가 쓰여 있었다.
엽연채가 문으로 들어서자 저 멀리 본채의 낭하에 서 있던 시녀가 그녀의 도착을 알렸다.
“마마, 주씨 가문 셋째 부인이 도착하셨습니다.”
엽연채는 금슬을 따라 낭하로 걸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금슬이 돌아서더니 혜연과 추길을 쳐다보며 말했다.
“두 사람은 여기서 기다려요.”
혜연과 추길은 순간 어리둥절했으나 얼른 알겠다고 답하고는 자리에 멈춰 섰다.
“부인, 안으로 드시지요.”
엽연채는 금슬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상좌와 하좌가 뚜렷이 구분되어 있지 않은 게 특징이었고, 곳곳에 드리운 청록색 발과 꽃문양이 새겨진 장지문이 특별히 눈길을 끌었다.
엽연채가 오른쪽을 바라보니 삼면에 만자형卍字形 난간이 달려 있는 박달나무로 만든 긴 침상이 놓여 있었고, 스물일곱 정도로 보이는 귀티 나는 부인이 단정한 자세로 그 위에 앉아 있었다. 바로 태자비였다. 태자비의 머리 모양과 화장은 전과 같았고 옷차림만 황색을 띤 홍색 배자로 바뀌어 있었다.
“마마를 뵈옵니다.”
엽연채가 얼른 앞으로 다가가 예를 올렸다. 태자비는 가늘고 긴 새하얀 목을 드러내며 머리를 숙이고 예를 올리는 그녀의 모습을 쳐다보더니 입을 오므리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만 일어나게나.”
“예, 마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