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114화 (114/858)

제114화

주운환은 문득 그녀가 처음 주씨 가문으로 시집왔을 때가 떠올랐다. 당시 자신이 양왕과 일을 도모하고 있다는 것을 그녀가 아직 몰랐을 때라 그 사실을 숨기기 위해 매일 함께 식사를 했다.

그러다 한번은 그녀가 친정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자신을 보았다며 어디에 다녀왔었냐고 물었다. 그래서 얼결에 전통극을 좋아해 회방루에 갔다고 둘러댔는데, 그녀는 덕명반 무대가 더 좋다며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함께 가자고 했었다.

주운환은 당시 엽연채가 부부의 정을 쌓으려고 자신에게 잘해 준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후 많은 일이 일어났고, 그녀는 양왕과 이쪽이 꾸미는 일을 알게 되면서 부부로 지내지 않겠다고 분명히 밝혔다. 그러니 그녀가 여태껏 전통극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던 것이다.

주운환은 참으로 묘한 기분이 들어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그럽시다.”

그는 말고삐를 당겨 앞서 가고 있는 진씨와 주묘서가 타고 있는 화려한 마차 옆으로 다가갔다.

“어머니, 아내와 물건을 좀 사러 다녀오겠습니다.”

진씨는 어두운 얼굴로 귀찮다는 듯 대꾸했다.

“그리하거라.”

“감사합니다, 어머니.”

“큰언니, 우리도…….”

주묘화는 새언니 부부와 함께 돌아다니고 싶었다. 그러나 적모 앞에서 주운환과 친밀하게 지내는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기에 주묘서에게 말을 꺼내게 하려고 했다.

그러나 주묘서에게 우리도 같이 놀러 가자고 말하려는 찰나, 주운환이 싸늘한 눈빛으로 이쪽을 힐끗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주묘화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고, 그녀는 목구멍까지 나온 말을 얼른 삼켜 버렸다.

“우리도 뭐?”

주묘서는 더운지 부채질을 하며 주묘화를 빤히 쳐다보았다.

“우리… 집에 도착하면 시원한 수박 먹어요.”

주묘화가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얼렁뚱땅 말했다.

“별 대단한 이야기라고! 외출하기 전에 수박을 우물에 넣어 시원하게 해 놓으라고 말하지 않았니?”

푹푹 찌는 날씨에 짜증이 난 주묘서가 사나운 눈초리로 그녀를 쏘아보며 면박했다.

* * *

푸른 덮개가 쓰인 엽연채의 마차가 덕명반 대문 앞에 멈췄다. 주운환은 그녀 쪽으로 다가가 몸을 돌려 말에서 내렸다. 엽연채는 추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뛰어내린 후 그녀에게 말했다.

“추길아, 공자의 말을 끌고 가 잘 세워 두거라. 그리고 저번에 녹나무 빗의 빗살이 하나 부러졌다고 했지? 가서 빗을 하나 사 오렴!”

“예.”

추길은 입을 삐죽 내밀며 대답했다. 그녀도 전통극을 보러 가고 싶었지만 아가씨가 빗을 사 오라고 하니 사러 가는 수밖에 없었다.

“가요!”

“네.”

주운환이 권하자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경인은 마차를, 추길은 주운환의 말을 끌고 말과 마차를 세워 두는 덕명반 마구간으로 갔다.

덕명반은 도성 내에서 가장 유명한 극단으로, 단원 중에는 연기 솜씨가 뛰어난 화단花旦(활달한 젊은 여성 역)이 두 명 있었다. 그뿐 아니라 황제와 태후가 전통극을 좋아해 해마다 생일 축하연이 열리면 덕명반을 궁 안으로 불러들이면서 명성이 한층 높아졌다.

덕명반은 3층 높이의 고층 건물로, 검푸른 기와와 검은 기둥,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비첨이 눈에 띄었다. 또 대문 앞에는 ‘덕명반’이라는 세 글자가 적힌 커다란 편액이 걸려 있어 고상한 멋이 흘렀다.

주운환과 엽연채가 대문으로 들어서자 선역과 악역이 그려진 커다란 담벽이 먼저 보였고, 이 담벽을 돌아가니 팔선상八仙床이 놓인 공연장이 나왔다.

공연장은 이미 관객들로 가득했는데, 어떤 이는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또 어떤 이는 전통극에 심취해 있었다. 커다란 연극 무대 위에선 노랫소리가 들려오고 있는데 무슨 노래를 부르고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이때 열일곱 정도 되어 보이는 말쑥한 얼굴의 심부름꾼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두 분, 어디에 앉으시겠습니까?”

심부름꾼은 주운환과 엽연채의 얼굴을 휘둘러보더니 둘의 용모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하나 감히 계속 쳐다볼 수는 없는지라 얼른 고개를 숙였다.

“2층 귀빈실로 안내해 주시게.”

주운환이 말했다.

“예, 이쪽으로 오시지요.”

심부름꾼은 얼른 앞장서서 길을 안내했다. 두 사람이 그를 따라 공연장을 지나 계단 하나를 올라가니 바로 2층에 도착했다.

귀빈실이라고는 했지만 방이 아니라 커다란 병풍으로 삼면을 막아 놓은 것이라 완벽하게 사적인 공간은 아니었다. 안에는 술과 간식거리를 올려두는 기다란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 뒤로 매화 꽃가지 문양이 들어간 옻칠된 침상이 자리했다. 그 양쪽으로는 권의 네 개가 놓여 있었다.

엽연채와 주운환은 침상에 앉았는데, 가운데에는 조그만 항탁이 놓여 있었다.

“두 분, 어떤 술을 좋아하시는지요? 아니면 술 대신 간식거리가 필요하신가요?”

심부름꾼이 물었다.

“해당취海棠醉로 한 주전자 주시오.”

주운환은 본래 차를 시킬 생각이었으나 엉겁결에 이 말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는 엽연채가 술을 못 마시는 게 아닌가 염려됐다.

“예! 간식거리도 주문하시겠습니까?”

심부름꾼이 웃으며 물었다.

“운편고雲片糕(쌀가루에 우유와 설탕 등을 넣어 만든 길고 얄팍한 떡)와 매괴병玫瑰餅(설탕과 장미 꽃잎을 잘 찧어 속을 만들어 넣고 구운 밀가루 떡)이요.”

엽연채가 주문하자 주운환이 얼른 보탰다.

“압자고도 하나 추가해 주시오.”

엽연채는 지난번 주운환이 사 왔던 샛노란 압자고가 한 상 가득 차려져 있던 모습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표정이 굳었다. 주운환이 작은 말굽은을 꺼내 조그만 항탁 위에 올려놓자 심부름꾼은 미소를 지으며 얼른 돈을 챙겼다.

덕명반은 으뜸가는 공연장이라 일인당 입장료가 은화 반 냥이나 했고, 여기에 귀빈실 대여료에 방금 전 주운환이 시킨 술값까지 더하면 은화 열 냥은 족히 넘었다. 그런데 공연장에서 처음에 내는 돈은 잔돈을 받지 않는 게 원칙이었다. 남은 돈은 전부 심부름꾼의 봉사료가 되니 심부름꾼은 당연히 기뻐했다.

“금방 오겠습니다!”

심부름꾼은 활짝 웃더니 얼른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엽연채는 아래쪽에 위치한 무대를 바라보았다. 혼례복을 입은 여성 배역과 남성 배역이 웅얼웅얼 알 수 없는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곧이어 여성 배역이 바닥에 쓰러져 가슴 아프게 울부짖었다. 이에 공연장에 자리한 관객들의 얼굴에 감동의 빛이 어렸고 개중에는 눈물을 훔치는 부인도 있었다.

“손님.”

이때 심부름꾼이 쟁반을 들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쟁반 위에는 백옥으로 만든 술 주전자와 잔 두 개, 간식 세 접시가 올려져 있었다. 그는 기다란 탁자 위로 술과 간식거리를 하나씩 내려놓았다.

“이곳에서도 <제화부용啼花芙蓉>을 공연하나 보군.”

주운환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

심부름꾼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금 멋쩍은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이 좋아해서 저희도 공연하고 있습니다.”

“<제화부용>이 뭔데요?”

엽연채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회방루에서 공연하는 극입니다.”

“회방루라면 공자께서 자주 가는 공연장을 말하는 거죠?”

주운환의 대답에 엽연채가 다시 물었다.

“맞습니다.”

주운환은 고개를 끄덕이며 설명을 덧붙였다.

“회방루는 본래 도성에서 그다지 유명한 공연장이 아니었는데, 몇 개월 전부터 인기를 끌기 시작했어요. 회방루에서 공연하는 <제화부용> 때문이지요. 남녀의 치정을 다루는 내용입니다.”

“오.”

엽연채는 아래를 쳐다보며 다소 의아한 투로 말을 이었다.

“그런데 어째 사내들도 모두 연극에 꽤나 집중하는 것처럼 보이네요?”

남녀의 치정극은 보통 부인이나 소저들이 좋아하지, 사내들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주운환은 실눈을 뜨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제화부용>은 사내들도 좋아하더군요.”

엽연채가 심부름꾼을 쳐다보며 물었다.

“회방루의 연극인데 어떻게 여기서도 공연할 수 있는가?”

심부름꾼은 다소 쑥스러워하며 대답했다.

“<제화부용>은 회방루에서 만든 연극이 아니라 작가가 따로 있는 극입니다. 그 작가가 회방루에 극본을 팔 때 회방루에서 첫 석 달 동안 독점해 공연하고, 그 후에는 다른 극단에서 원하면 극본을 그 극단에도 팔 수 있다는 내용의 매매계약을 체결했거든요.

지금 보시는 것은 연극의 상편이고, 하편은 아직 나오지 않았어요. 하편이 나오면 또 회방루에서 먼저 공연을 하고 시간이 좀 지난 후에 다른 극단에서 다시 공연할 수 있고요. 어떤 결말일지 아직은 알 수 없지만 분명 아주 멋질 거예요.”

주운환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결말이야 뻔하지 않겠소. 치정에 빠진 남녀는 결국 함께하지 못하고 각자의 길을 걷게 되어 슬픔에 잠기겠지. 연극이 다 그렇지 않소.”

그러자 심부름꾼이 눈살을 찌푸리며 반박했다.

“저희는 모두 행복한 결말을 바라고 있어요!”

주운환이 시선을 아래로 떨구며 대꾸를 않자 심부름꾼은 엽연채를 쳐다보며 동의를 얻으려 했다.

“부인께서도 행복한 결말을 원하시죠?”

“…잘 모르겠지만 이별하지 않을까요.”

심부름꾼은 입을 삐죽거리더니 겉보기와는 달리 음흉한 사람들이라고 흉을 봤다. 다들 행복한 결말을 원하고 있는데, 이 부부만은 반대였다. 수려하게 생긴 공자는 비극적인 결말을 맞을 거라고 악담을 하고, 선녀처럼 곱게 생긴 부인은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남편의 말에 맞장구를 쳤다.

심부름꾼이 또 이야기를 꺼냈다.

“결말이야 어찌 됐든 모두들 하편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어요. 우리 춘용 소저가 도성에서 가장 유명한 여성 배역이니 <제화부용> 하편이 나오면 두 분도 이곳에 오셔서 감상하세요.”

“회방루의 약란 소저가 더 잘하는 것 같은데.”

그러나 주운환은 이번에도 심부름꾼의 말에 동조하지 않았다. 가슴을 콕콕 쑤시는 그의 말에 심부름꾼은 그저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가 버렸다. 엽연채는 병풍을 돌아 나가는 심부름꾼을 안쓰러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덕명반은 <제화부용> 때문에 이름 없는 회방루에 손님을 뺏기게 되어 몹시 불쾌해하던 참이었다. 하지만 연극을 열성적으로 좋아하는 사람들의 발길을 붙잡기 위해 자신들도 별수 없이 <제화부용>을 올릴 수밖에 없었다.

기왕 체면을 집어 던지고 시류에 편승하기로 했으니, 덕명반 사람들은 춘용이 <제화부용>의 배역을 더욱 훌륭히 소화해 내 회방루를 꺾어 놓길 바랐다. 그런데 주운환이 회방루의 무명 배우가 더 잘한다고 면전에서 추켜세우니 심부름꾼이 시무룩해하는 것도 당연했다.

엽연채가 배시시 웃으며 주운환을 쳐다보았다.

“약란 소저가 그렇게 잘해요?”

“노래 실력과 음색만 놓고 보면 약란 소저가 춘용 소저에 못 미칩니다. 그러나 살짝 쉰 듯한 구성진 목소리로 애달픈 감정을 완벽하게 표현해 내더군요. 그래서 전 <제화부용>이 꼭 약란 소저를 위해 만든 곡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엽연채는 흥미롭다는 투로 주운환의 말을 받았다.

“그래요? 하편이 나오면 저도 회방루에 가서 감상해 봐야겠어요.”

“이별하는 결말일 테니 안 보러 가는 게 좋을 겁니다. 마음이 안 좋을 테니까요.”

주운환이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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