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113화 (113/858)

제113화

“장 부인,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엽영교의 둘째 언니는 이해가 안 간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둘째 고모, 저희 아가씨가 태자 측비 후보세요.”

엽이채가 우쭐거리는 얼굴로 대신 답했다. 이에 장만만은 눈살을 찌푸렸다. 자신을 이용해 잘난 척하는 엽이채가 영 못마땅한 것이었다. 그러나 밉든 곱든 어쨌든 자신의 새언니였기에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포 부인과 포기의 표정은 조금 미묘했다. 포씨 가문에도 태자 측비 후보가 있기 때문인데, 바로 포기의 사촌 언니인 포모가 그 후보였다.

하지만 포씨 가문이든 또 다른 후보자인 오씨 가문이든 결국 태자 측비의 자리는 장만만에게 떨어질 것이었다. 황후가 세 소저와 만날 때마다 늘 장만만에게 가장 잘해 주니 의중이 분명해 보였다.

“할머니, 전 이만 밖으로 나가 다른 언니 동생들과 시간을 보낼게요.”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이만 나가 보거라!”

묘씨는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아 주었다.

“아유, 연채야. 할머니 곁에 더 있어 드리지 않고?”

하지만 손씨는 엽연채를 순순히 보내 주고 싶지 않았다.

‘별것도 아닌 일로 하루 종일 사람들 앞에서 우쭐거리는 꼴 하고는! 그만 좀 하거라!’

묘씨는 냉담한 눈빛으로 손씨를 쏘아본 후 뜨뜻미지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젊은 아가씨들이 답답하게 이곳에 있을 필요 없으니 다들 이만 밖으로 나가 보거라!”

손씨는 순간 말문이 막혔으나 이내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도 이채가 얼마나 시집을 잘 갔는지 보여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엽이채에게 어서 일어서라며 재촉하더니 맹씨에게도 함께 가기를 권했다.

“안사돈, 저희도 밖으로 나가 보시죠!”

“호호, 그렇게 하시지요.”

맹씨는 거드름을 피우는 졸부 같은 손씨의 행동이 영 마음에 안 들었지만, 장박원과의 관계는 물론이고 장만만의 혼사가 달렸으니 참아야만 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우르르 방을 나섰다. 온남아와 엽연채는 팔짱을 끼고 앞에서 걸어가다가 조용한 정자 근처로 걸어갔다.

“연채야…….”

장만만이 그녀의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만만 언니.”

엽연채가 고개를 돌리며 답했다.

“그게…….”

장만만은 엽연채가 여전히 자신을 ‘만만 언니’라고 친근하게 불러 주자 눈시울이 붉어졌다.

“오라버니 일은… 정말로 미안해.”

순간 멍해졌던 엽연채는 이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다 지나간 일이니 마음에 담아 두지 말아요. 지금 제 부군의 용모가 수려해서 전 아주 흡족해하고 있으니까요.”

괜찮다는 말에도 장만만은 여전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연채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면 날 찾아와.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면 반드시 도와줄 테니까.”

“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다가 불현듯 그녀에게 동정심을 느껴 태자 측비 일을 귀띔해 주려고 했다.

“태자 측비 후보 말이에요…….”

“걱정 마, 틀림없이 내가 될 테니. 그러니까 나중에 무슨 어려운 일이 있으면 나한테 알려줘.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반드시 도울 테니까.”

장만만이 자신만만해하자 엽연채가 다소 염려스러운 투로 말을 받았다.

“세상사에는 늘 변수가 있는 법인데, 어떻게 될지 누가 장담하겠어요?”

장만만은 기분이 조금 상했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네 말은 내가 간택되지 못할 수도 있다는 거니?”

“연채 말은 그런 뜻이 아니에요!”

온남아가 다급히 변명했다. 장만만은 곧 귀인貴人이 될 테니 밉보여서는 안 되었다.

이때, 류아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오던 엽이채가 어두운 표정으로 쏘아붙였다.

“언니는 사람이 어쩜 그리 못됐어요!”

“우린 먼저 계향 정자로 가 볼게.”

장만만이 살짝 얼굴을 굳히더니 자신의 여종을 데리고 잰걸음으로 걸어갔다.

“아이참, 만만 아가씨.”

엽이채가 급히 그녀를 불렀지만 서두르다 넘어지기라도 할까 봐 한 발짝씩 내디디며 천천히 쫓아갔다.

장만만이 물푸레나무가 심어진 오솔길로 접어들자 그녀의 여종이 운을 뗐다.

“아무래도 엽씨 가문 큰아가씨가 큰공자님에게 원한을 품고 계신 거 같아요. 어쩌면 장씨 가문 전원에게 원한을 품고 있을지도 모르죠. 그러지 않고서야 어떻게 아가씨께서 측비 후보에서 탈락할 수도 있다는 악담을 퍼붓겠어요! 그에 반해 큰새언니는… 주인나리 말씀처럼 아무리 마음에 안 들어도 이제 아가씨의 큰새언니이시니 아가씨 사람이세요.”

그 말에 장만만은 엽이채가 조금은 다르게 느껴졌다. 그녀는 옅은 한숨을 내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가자!”

한편, 엽연채와 온남아는 방금 전 그 정자 근처에 있었다.

“우리도 어서 계향 정자로 가자꾸나.”

온남아의 말에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이 막 발을 내디디려는 순간, 한 여종이 숨을 헐떡이며 그들 쪽으로 다가왔다.

“큰아가씨, 주인나리께서 부르십니다.”

“할아버지께서 날 부르신다고?”

엽연채는 어리둥절해하더니 이내 온남아에게 양해를 구했다.

“언니, 할아버지를 뵈러 갔다 올게요.”

“그래, 어서 가 봐!”

온남아가 얼른 가 보라며 손짓하자 엽연채는 그 여종과 함께 자리를 떴다. 협문을 지나 조금 걸어가니 두 사람은 금세 바깥뜰에 있는 서재에 도착했다.

뒷짐을 진 채 창문 앞에 서 있던 엽학문은 뒤에서 발걸음 소리가 들리자 고개를 휙 돌렸다. 그는 미간을 찌푸리며 엽연채에게 대뜸 물었다.

“저번에 다쳤을 때 네가 머물던 곳이 신양 공주 마마의 별장이었느냐?”

“예.”

“그런데 어째서 내게는 알려 주지 않은 것이냐?”

엽학문이 언짢은 표정을 짓자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렸다.

‘알려 주면 뭐? 이런 일로 찾아가 빌붙으려고?’

엽연채는 웃기지도 않는다는 말투로 대꾸했다.

“할아버지, 지난번에 제가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당했다가 가까스로 돌아왔을 때, 할아버지는 저를 부르지도 않으셨죠. 그러니 제가 제때 할아버지께 무슨 일을 알려 드리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지요!”

엽학문은 순간 말문이 막혔고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손녀가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를 당했다가 무사히 돌아왔는데도 자신은 그녀에게 안부도 묻지 않았다. 이에 엽연채는 그래 놓고서 이제 와 뻔뻔하게 그 사건과 관련해 벌어진 일을 알리지 않았다고 저를 타박하냐며 꼬집은 것이었다.

엽학문은 부끄러운 나머지 성을 냈다.

“나와 네 할머니는 부부이니 일심동체다. 그 사람이 네 병문안을 갔으면 그건 내가 간 것이나 마찬가지야.”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렸다.

‘뭐 이런 뻔뻔한 늙은이가 다 있어!’

“오늘 둘째한테서 그 이야기를 들었다.”

엽학문은 영 못마땅한지 ‘흥’ 하고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

“방금 전 네 할머니에게도 물었더니 네가 말 한마디 없이 공주 마마 댁에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갔다더구나. 앞으론 그런 일이 있으면 내게 꼭 알려야 한다.”

그는 태자 쪽에 줄을 서고 싶었지만 여태 적절한 방법을 찾지 못했다. 엽학문이 장씨 가문과의 혼사를 중요하게 생각한 것도 장만만이 태자 측비가 될 것이라고 보기 때문이었다. 즉, 장씨 가문과의 관계를 이용해 태자와 연을 맺으려는 것이었다.

엽학문은 태자를 황제로 만드는 데 공을 세우고 싶었지만 그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는 자들이 너무 많았다. 거기다 태자도 오는 사람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래서 전에는 태자에게 선물을 할 기회조차 없었는데, 엽이채가 장씨 가문으로 시집을 가게 되자 장찬에게 도와달라는 말을 꺼낼 수 있게 됐고, 비로소 태자에게도 선물을 보내며 아첨할 기회도 얻게 된 참이었다. 그러나 선물을 하려면 좋은 걸 선물해야 했다. 그래야 상대방이 받아 줄 테니 말이다.

그러던 중 엽승덕이 팔수혈옥분경을 찾아냈기에 태자의 생일에 이를 선물로 보냈는데 지금까지 아무 소식도 없었다. 그래서 초조해하던 이때 엽연채가 신양 공주와 연이 생겼다는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니 희망에 부풀 수밖에 없었다. 신양 공주와 태자는 사이가 좋으니 그야말로 절호의 기회였다.

그런데 이 손녀라는 것이 벌써 감사 인사를 드리고 왔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제 와서 또 공주를 찾아가 봤자 이편을 만나 주지 않을 게 뻔했다.

“되었으니 이제 그만 나가 보거라!”

엽학문은 언짢은 듯 재차 콧방귀를 뀌었다.

“그럼 전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엽연채는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녀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엽학문은 속이 터져 죽을 것만 같았다. 마음이 어찌나 초조한지 입에서 게거품이 다 나올 지경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황제의 상태가 날로 심각해지고 있어 언제 붕어할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여기저기 줄을 대고 있었지만 제대로 연결된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신양 공주 쪽마저 잘되지 않으면 이젠 손 놓고 기다릴 수밖에 없을 것이었다.

그러니 장만만이 태자부로 시집을 가게 되면 엽이채에게 묘씨와 손씨를 데리고 자주 오가며 장만만과 친분을 쌓게 해야 했다. 그런 후 선물을 하나둘씩 보내며 관계를 더욱 굳건히 다지게 할 것이다. 지금으로선 안식구들, 특히 둘째 손녀에게 기댈 수밖에 없었다.

* * *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가 가까워지자 연회석이 준비되었고 무려 마흔 개의 상이 펼쳐졌다. 엽연채는 그곳에서 식사한 뒤 온씨의 거처로 가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유월의 날씨는 사람이 가만히 앉아 있지 못할 정도로 무더웠다.

주씨 가문에는 마차가 두 대밖에 없었는데, 하나는 여섯 명이 탈 수 있는 호화스럽고 커다란 마차였고, 다른 하나는 네 명이 탈 수 있는 조그마한 마차였다. 진씨는 주묘서 자매를 데리고 커다란 마차에, 엽연채는 조그만 마차에 타고 있었고, 주운환은 말을 탔다.

돌아오는 마차 안에서 진씨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늘 생일 축하연 자리가 아주 불만족스러웠던 모양이었다. 그녀는 오늘 영귀원에서 나온 뒤 계향 정자로 가서 이리저리 둘러보았지만 주묘서의 혼처로 삼을 만한 집안은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주씨 가문이 비록 몰락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생일 연회에 온 귀부인들은 대부분 진씨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죽 둘러보니 정안후부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들은 그저 그런 사람들이라 마음에 꼭 드는 혼처를 찾을 수 없었다.

그들이 도성 중심의 동대가東大街를 지나갈 즈음, 엽연채가 발을 걷어 올리더니 주운환에게 말을 붙였다.

“공자, 앞에 덕명반德明班이 보이네요.”

주운환은 잠시 어리둥절해하더니 그녀를 쳐다보며 대꾸했다.

“네, 그러네요.”

이에 엽연채가 눈을 가늘게 뜨더니 미소를 지으며 권했다.

“공자, 전에 전통극을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어요? 늘 회방루에서 봤다고 했었죠? 근데 덕명반이 회방루보다 더 유명해요. 우리 나온 김에 덕명반에서 전통극을 보고 들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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