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10화
거기까지 말한 경인이 눈을 가리고 웃음을 터뜨렸다.
“은정랑이라는 여인이 참 대단하기는 하더라고요. 본래 그 서생의 사위 될 사람이 어찌 된 영문인지 갑자기 그 딸과 혼인하지 않겠다, 대신 은정랑과 혼인하겠다고 한 거예요!”
엽연채는 ‘풉’ 실소를 터뜨리다 죽을 입 밖으로 뿜어낼 뻔했다.
‘과연 은정랑답네!’
“사실 그 서생은 낯부끄러운 일이라 이 이야기를 하지 않으려고 했어요. 우선 은혜도 모르는 인간을 가르친 꼴이니 사람들이 눈뜬장님이라고 비웃을까 봐 걱정을 했던 거고요. 둘째는 여식이 퇴짜를 맞아 사람들의 비웃음거리가 되면 시집가기 어려워질까 봐 그런 거였죠. 그래서 이 일을 아무도 모르고 있던 겁니다.
마침 여식이 정혼했던 때가 모친상을 당한 때라 밖으로 알리기가 마땅치 않았는데, 알리기도 전에 사위를 도둑맞아 버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 했겠죠.”
경인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계속해서 웃어댔다.
“오씨 아저씨가 은화를 30냥이나 줘 가며 들은 이야기에요. 그 서생이 급전이 필요해 입을 연 거죠.”
“그 도둑맞은 예비 사위가 허서의 아버지인 거지?”
엽연채가 물었다.
“예, 맞아요!”
경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허씨 집안이 허가촌에선 부잣집에 속했어요. 그런데 은정랑이 혼인하고 허서를 낳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좋은 날도 끝이 나버렸던 거예요. 그 여인의 시아버지가 소를 방목하러 밖에 나갔다가 그만 산비탈 아래로 떨어져 두 다리가 부러져 버린 겁니다.
허씨 집안은 그 어른 다리를 고치기 위해 모아둔 돈을 다 써 버리고 말았죠. 그런데도 가망이 없어 결국 양다리를 잘라야만 했어요. 다리를 자르고 나니 상처 부위가 썩어 들어갔고, 그럴수록 병세는 깊어져 허씨 집안은 병을 고치려고 전답이며 땅이며 팔기 시작한 거죠.
마을 사람 중 한 사람이 허씨 집안을 찾아가 회복의 기미가 보이지 않으니 치료를 중단하라고 권했대요. 은정랑 부부는 아무 말도 못 했지만 사실 그들도 치료를 중단하고 싶었죠. 그런데 그 노인네가 죽는 게 두려워 반드시 치료할 것이며 아직 살 수 있다고 말했던 거예요.
결국 다 팔고 척박한 전답 2묘畝(논밭 넓이의 단위)만 남게 되었으니, 허씨 집안은 순식간에 쫄딱 망해버린 거죠! 그 나이 든 서생은 이 일로 한참을 웃어대더니 직접 은정랑을 찾아가 고맙다며 선물까지 한 거 있죠!”
엽연채는 그 말을 듣고 피식 웃었다.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왔다.
“결국 허 노인은 재산을 다 털어먹더니 목숨도 보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말았어요. 시아버지 때문에 허가촌에서 알아주던 부잣집이 한순간에 빈곤에 시달리게 된 거죠. 은정랑은 어쩔 수 없이 허서와 애아버지와 겨와 나물로 연명을 했다고 해요.
아, 맞다. 허서 아버지 이름이 허대실이에요! 여하튼 그렇게 오륙 년을 보냈다고 해요. 그런데 응성應城 전투가 치열해지자 조정에서 징병을 했고, 돈도 배경도 없는 허대실은 억지로 끌려가고 만 거죠.”
경인이 소식을 마저 전했다. 그 말을 듣고 엽연채는 미간을 찌푸렸다. 응성 전투라 하면 주씨 가문이 지휘했다 참패를 당한 그 전투가 아니던가. 그때 주씨 가문이 지키던 곳이 바로 수도의 성문이라 불리던 응성이었다.
“은정랑은 아이를 데리고 시어머니와 몇 년간 수절을 했어요. 그러던 어느 날, 제대한 병졸 하나가 고향으로 돌아왔다고 해요. 마을 사람들이 그자 주위로 모여들었고 특히 전쟁에 동원된 식구가 있는 가족들이 다 몰려들었대요.
그 병졸이 옥안관이 함락되어 장령將領(고위 장교)의 가족 대부분이 잡혀가고 병졸들은 열에 여덟아홉이 목숨을 잃었는데, 자신은 가까스로 살아남은 거라고 했대요. 또 마을 사내들 전부가 자기와 한 부대에 속했는데 그중에는 죽어나간 사람도 있고 실종된 사람도 있었다고 해요. 살아남았으면 자신처럼 돌아왔을 거라고 했답니다.”
마지막 말에 엽연채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럼 허대실은 죽은 것이냐 아님 아직 살아 있는 것이냐?”
“그러게 말이에요. 전쟁터에서 전사하면 시체를 말가죽에 싸서 보낸다는 말이 있잖아? 시체를 돌려보내지 않은 거야?”
추길도 얼른 경인에게 물었다.
“장군이나 전쟁터에서 전사하면 시체를 말가죽에 싸 보내는 거지. 병졸의 시체를 말가죽에 싸서 보내겠니?”
경인은 추길을 흘겨보며 타박했다. 그러자 추길이 정말이냐는 눈빛으로 엽연채를 쳐다봤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병졸들이 전장에서 목숨을 잃으면 바로 땅에 묻어버리거나, 가까운 곳에 있는 공동묘지에 버리거나, 심할 경우 그 자리에 그냥 내버려 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 들짐승이 와서 시신을 뜯어먹어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아무튼 징집된 허가촌 사내들 중 살아남아 돌아온 사람은 그 사람뿐이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돌아오지 못했죠. 마을사람들은 서둘러 의관묘衣冠墓(죽은 사람의 시신이 없어 대신 의관 등 소지품을 묻은 무덤)를 만들었는데, 은정랑의 시어머니는 아들이 죽었을 리 없다며 울고불고 버텼대요. 결국 은정랑이 묘를 만들었다고 해요.”
경인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 뒤 은정랑의 시어머니는 병으로 몸져누웠고 두 달도 안 되어 세상을 떠났다고 해요. 은정랑은 집안의 논밭을 팔아 허서를 데리고 도성으로 왔고 먼 친척에게 의탁하려고 했는데 그 친척이라는 사람이 그들을 받아 주지 않은 거죠. 그래서 은정랑은 하는 수 없이 자수 상점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일한 지 세 달도 되지 않아 세자를 만나게 되었고 그 후 첩실이 된 거죠.”
엽연채는 허대실이 죽었는지 아닌지에 온 신경이 쏠려 있었고 추길도 마찬가지였다.
“그 허대실이라는 사람이 정말로 죽은 건 맞아?”
추길이 재차 물었다.
“어쨌든 돌아오지 않은 건 맞아. 살아 있다면 왜 집으로 돌아오지 않겠어? 집에는 아내만 있는 게 아니라 노모도 계시는데! 그러니 진짜 죽었을 가능성이 높아.”
경인의 합리적인 추측에도 엽연채는 그가 살아 있길 바랐다. 지금껏 은정랑에게 맞설 방법을 찾지 못했는데, 만약 허대실이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온다면 아주 볼 만한 구경거리가 생길 것이었다. 엽연채는 그가 진짜로 살아 있을 가능성이 얼마나 되겠냐만 그래도 찾아는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인이 궁명헌에서 은정랑에 관한 소식을 전하느라 열을 올리던 이때, 얼굴은 나부죽하고 체형은 왜소한 한 시동이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셋째 마님, 마님 친정 댁 사람이 전달할 게 있다며 마님을 찾아왔습니다.”
회색 옷을 입은 이 시동의 이름은 소종으로, 서쪽 측문을 지키는 문지기였다. 전에는 혼자서 문을 지켰는데 경인이 온 후부턴 그와 함께 문을 지키며 같은 방에서 지냈다. 평소 엽연채에게 온 전갈을 전달하는 사람은 경인인데 오늘 경인이 이곳에 와 있는 바람에 소종이 이리로 건너온 것이었다.
“우리 친정 사람이라고?”
엽연채가 고개를 들어 밖을 내다보니 전지纏枝 문양이 들어간 연한 노란색 배자를 입은 열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여쁜 소녀가 소종의 뒤를 따라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소녀는 양 갈래로 틀어 올린 머리에 순금 매화와 술로 장식된 잠을 꽂고 있었고 손에는 비취옥으로 만든 팔찌를 차고 있었다. 비록 여종의 차림이기는 했으나 의복과 장신구가 제법 화려해 전체적으로 당찬 분위기가 느껴졌다.
엽연채는 여종을 보더니 미간을 찌푸렸다. 기억하기로 친정집에는 이런 여종은 없었다. 이 여종은 절대 정안후부 하인이 아니었다.
“고맙다. 소종아.”
엽연채 그리 말하고서는 추길을 쳐다보았다. 그러자 추길이 얼른 침실 안으로 들어가 돈 상자에서 동화銅貨를 한 움큼 꺼낸 후 밖으로 달려 나와 소종의 손에 쥐여 주었다.
“감사합니다. 셋째 마님!”
소종은 뛸 듯이 기뻐하며 몸을 굽혀 감사 인사를 올린 후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셋째 부인을 뵈옵니다.”
연한 노란색 배자를 입은 여종이 깍지 낀 두 손을 왼쪽 허리춤에 놓고 무릎을 살짝 구부리며 인사를 올렸다.
“누구신지…….”
그러자 노란 옷의 여종이 입을 오므리고 가볍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셋째 부인은 귀하신 분이라 다사다망하여 절 기억 못 하시겠지만 소인은 셋째 부인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러더니 웃음을 거두고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 그날 태자비 마마와 공주 마마의 눈부신 모습에 사로잡혀 소인은 눈에 들어오지 않으셨을 겁니다.”
엽연채는 순간 멍해지더니 완전히 뜻밖이라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 공주부에서 온 분이군요. 실례를 범했네요.”
그러자 노란 옷의 여종이 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셋째 부인, 오해하셨습니다. 소인은 태자부太子府의 하인입니다.”
그 말에 엽연채는 갑자기 오한이 느껴지더니 온몸이 뻣뻣하게 경직됐다.
“지난번에 셋째 부인께서 공주부에 들러 말린 작약을 선물하시면서 만드는 방법을 알려 주셨잖아요. 저희 태자비 마마께서 아주 마음에 드셨는지 소인들에게 셋째 부인이 일러준 방법대로 따라해 보라고 하셨어요. 그런데 똑같이 되지 않더라고요. 그러니 셋째 부인께서 태자비 마마 댁으로 오셔서 직접 알려 주시면 좋겠습니다.”
엽연채의 낯빛은 살짝 하얗게 질렸으나 여전히 미소를 지은 채로 물었다.
“언제 가면 될까요? 다만 스무닷새는 저희 할머니 생신이라 그날은 안 될 것 같아요.”
“그럼 스무이렛날로 하시지요.”
노란 옷의 여종은 그렇게 말하며 봉황 문양 금박金箔을 붙인 초대장을 꺼냈다.
“그래요. 고마워요.”
엽연채가 초대장을 받아 들며 말했다.
“추길아, 이분을 배웅해 드리거라.”
눈치 빠른 추길은 이미 사례금을 꺼내 그녀의 손에 쥐여 주고 있었다. 태자부의 여종은 감사 인사를 올린 후 공손히 물러났다. 추길은 서쪽 측문으로 여종을 바래다준 후 폴짝폴짝 뛰며 돌아왔다.
“아가씨, 태자비 마마께서 저희를 손님으로 초대하셨어요!”
추길은 흥분과 기쁨이 섞인 표정으로 외쳤다.
“둘째 마님이 태자 측비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지만, 그게 진짜인지 아닌지 누가 알겠어요. 그런데 우리 아가씨께서는 오늘 귀인이신 태자비 마마에게 초대도 받으셨네요. 사람들이 알게 되면 얼마나 체면이 서는 일이에요.”
“추길아, 당분간은 이 일을 이야기하지 말거라.”
그러나 엽연채는 진지한 얼굴로 추길을 쳐다보며 당부했다.
“네?”
추길은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아가씨, 왜요? 둘째 나리 댁 사람들에게 한 방 먹이는 게 저희의 즐거움 아니에요? 둘째 마님에게 알리면 배 아파 죽으려고 할 거예요!”
“황족과 관련된 일은 가급적 입에 올리지 않는 편이 낫다.”
엽연채가 손을 들어 올리니 봉황 문양 금박이 햇살 아래서 찬란한 빛을 뿜어냈다. 그녀는 양왕과 태자가 벌이는 암투극을 떠올리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음, 둘째 댁 사람들을 한 방 먹이는 게 우리의 즐거움이라고? 목표를 너무 낮게 설정하면 안 되지!”
그러고선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추길은 그녀의 말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했으나 ‘언젠간 알게 되겠지.’ 하고 그냥 넘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