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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109화 (109/858)

제109화

평 마마는 그 모습을 보더니 활짝 미소를 지었다. 중풍에 걸린 노마님 근처에 앉는 걸 꺼려하는 사람들이 많았고, 심지어 큰공자도 가까이 앉길 거북해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큰아가씨와 연채 아가씨는 노마님과 가까운 곳에 앉아 살갑게 구니 얼마나 마음이 좋은지 몰랐다.

평 마마는 대홍포가 들어 있는 단지를 여종에게 건네며 차를 우려 오게 한 다음 말을 꺼냈다.

“아가씨, 요즘 잘 지내고 계시죠?”

엽연채는 평 마마가 자신의 혼인 생활을 물어보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녀가 손해를 보는 혼인을 했기 때문에 걱정이 돼서 물어보는 참일 터였다. 엽연채가 고개를 돌려 외할머니를 쳐다보자 그녀도 걱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외할머니도 소식을 들어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요!”

엽연채가 주름이 가득한 외할머니의 손을 살포시 잡으며 안심시켰다.

“시간이 생기면 그 사람을 데리고 와 할머니께 보여드릴게요. 얼마나 준수하게 생겼는데요.”

온남아는 ‘아삭’ 소리를 내며 손에 든 사과를 베어 먹었다. 분명 그녀의 말은 안 믿는 눈치였다. ‘할머니 걱정 안 시키려고 그렇게 말하는 거지? 저번에 엽이채 혼례식에도 안 데려왔잖아.’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평 마마, 오늘 이렇게 온 건 물어볼 게 하나 있어서예요.”

엽연채가 말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는데 우리 어머니 혼수 단자는 찾았나요?”

그 말에 평 마마는 잠시 어리둥절해하다가 이내 아씨의 혼수 단자가 사라진 일을 떠올렸다. 연채 아가씨의 혼사가 정해지자 아씨께서는 아가씨의 혼수품을 준비하기 위해 자신의 혼수 단자를 찾았었다.

평 마마가 물었다.

“아가씨, 그건 왜 또 찾으시는 거예요? 수년 전에 찾았었지만 결국 찾지 못했어요. 그래서 아씨께서 직접 광에 있는 혼수품을 다시 기록하지 않으셨나요?”

엽연채는 혼수 단자를 다시 찾는 이유를 솔직히 털어놓을 수 없었다.

“아주 중요한 일이라 그래요. 그러니 마마가 다시 한번 생각해 봐 줘요.”

엽연채가 이리 말하니 평 마마와 온남아는 어디에 쓰려고 하는지 자세히 캐물을 수가 없었다.

평 마마가 말했다.

“그게… 찾아도 없었어요. 전에 노마님의 홍목 함에 혼수 단자를 넣어두었는데, 수년 전 아씨께서 찾아달라고 하셔서 찾아봤더니 안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집안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찾지 못했어요. 다들 물건은 찾으려고 할 땐 코빼기도 안 보이지만 안 찾을 땐 제 발로 툭 튀어나온다고 말했었죠. 그런데 시간이 지나도 여전히 코빼기도 안 보이는 거예요.”

엽연채는 그 말을 듣고 표정이 어두워지더니 외할머니를 쳐다보며 물었다.

“할머니는 뭐 기억나는 거 없으세요?”

“시嘶…….”

그녀는 겨우 한 글자만 내뱉을 뿐이었다.

“할머니,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거세요?”

온남아가 눈썹을 살짝 찡그리며 물었다.

“시廝요? 사思요? 아님 사四 말씀이세요?”

엽연채는 침상 난간 위에 놓인 외할머니의 손가락이 살짝 움직이는 걸 보았는데, 언뜻 창문 쪽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엽연채는 창턱에 놓인 사계화四季花를 보더니 얼른 그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고 나서는 사계화를 들고 와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평 마마는 그 모습을 보더니 웃으며 말했다.

“사계화 화분에서 어떻게 혼수 단자가 나오겠어요? 그건 제가 며칠 전에 창턱에 둔 겁니다.”

하지만 엽연채는 할머니의 시선이 여전히 자신의 손에 들린 사계화에 향하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음, 할머니 무슨 말을 하고 싶으신 거예요? 시嘶… 혹시 꽃인가요? 사계화요? 아님 사화思花예요? 그것도 아니면 사월思月이나 사계思季에요? 혹시 사람 이름인가요?”

그러자 온 노부인이 ‘응’이라고 대꾸했다. 세 사람은 순간 어리둥절해하더니 곧이어 무척 기뻐했다.

“정말 사람 이름이에요? 사화, 사월, 사계 중 어떤 거예요? 누구의 이름인데요?”

온남아가 얼른 그녀에게 물었다.

“큰아가씨예요!”

평 마마가 큰 소리로 외쳤다.

“큰아가씨 존함이 사월이시잖아요.”

‘큰이모?’

엽연채는 이내 그녀가 누구인지 떠올랐다. 온씨에게는 자매가 둘 있었다. 적장녀는 온사월, 적차녀는 온사설, 막내딸은 온사우였는데 온사우가 바로 엽연채의 모친 온씨였다.

한때 온씨 가문이 돈에 쪼들렸던 적이 있었다. 그래서 적장녀인 온사월은 황상皇商(조정에서 경영하는 국영사업을 관리하는 관료)인 추씨 가문에 시집을 갔고, 적차녀는 도척백부都戚伯府의 서출인 넷째 아들에게 시집을 갔다. 막내딸이 가장 운이 좋아 정안후부 세자의 처가 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세월이 지나 보니 정말로 운이 가장 좋았던 건 누구일까?

어쨌든 엽연채는 둘째 이모를 잘 알았다. 둘째 이모가 도성 내 가문에 시집을 갔기에 명절 때마다 친척끼리 왕래하며 자주 봤기 때문이다. 둘째 이모는 평범하게 살아 그다지 특별하다고 할 점은 없었다.

하지만 큰이모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었다. 추씨 가문은 서북쪽에 가까운 정성定城에 위치해 있어 도성까지 왕복하는 데만 한 달 훌쩍 넘게 소요되니, 큰이모는 몇 년에 한 번도 도성에 오지 못했다. 엽연채가 일고여덟 살 정도 되었을 때 한 번 봤던 걸로 기억하며 그 뒤로 그녀는 이런저런 이유로 도성에 오지 못했다. 그래서 엽연채는 큰이모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었다.

“할머니, 혼수 단자가 큰고모와 관련이 있다는 건가요?”

온남아가 묻자 온 노부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엽연채는 그 모습에 두 눈을 번뜩이며 물었다.

“설마 큰이모가 가지고 계신 거예요?”

온 노부인이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엽연채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으나 이내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이모가 그걸 왜 가져갔어요?”

“그러게 말이다!”

온남아는 고개를 갸우뚱하더니 평 마마를 쳐다봤다.

“그건… 저도 잘 모릅니다. 다만 몇 년 전에 노마님께 여쭤 봤을 땐 지금처럼 손가락으로 가리키지 않으셨어요.”

평 마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그 문제는 제쳐두고 서신부터 쓰자. 큰고모에게 보내달라고 해야지!”

온남아가 말했다.

엽연채는 어쩌다가 어머니의 혼수 단자가 큰이모 손에 들어갔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단자를 가져오는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그런데 서신이 오가는 데만 거의 두 달이 걸릴 것이었다. 그 생각에 엽연채는 맥이 다 빠졌다.

“참, 비둘기로 서신을 보내는 방법도 있잖아!”

온남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은화 몇십 냥을 주고 관아의 전서구傳書鳩를 쓰면 며칠이면 도착할 거야.”

그 말에 엽연채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맞아, 그 방법이 있었지!

“그런데 전서구가 관아에서 잘 훈련받아 서신을 잃어버릴 확률이 극히 적다고는 하지만… 만에 하나라도… 잃어버리게 되면 그땐 정말 완전히 사라져 버리는 거예요.”

평 마마가 미간을 찌푸리며 염려했다. 그러자 엽연채가 말했다.

“요 며칠 안에 못 받고 향시가 지난 후에 받으면… 쓸모가 없거든요. 게다가 지금 갖고 계신지 아닌지도 모르니 일단 물어봐야 돼요.”

“우선 서신부터 쓰자. 소동아, 가서 붓과 먹을 가져오너라.”

온남아의 분부에 소동은 얼른 붓과 먹을 가지러 가더니 금세 돌아와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엽연채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우선 인사말을 적었다. 그러고 나서 혼수 단자가 필요하니 찾아서 최대한 빨리 보내 달라, 급히 필요해서 그렇다 등등의 내용을 분명히 써 넣었다.

엽연채는 서신을 단단히 밀봉한 후, 외할머니와 몇 마디 더 나누었다. 마지막으로 스무닷샛날 정안후부에서 묘씨의 생일 축하연이 열리니 잊지 말고 참석해 달라고 부탁한 후 자리를 떴다.

아직 날이 어두워지지 않아 엽연채는 바로 관아의 역참驛站에 가서 은화 오십 냥 정도를 들여 가장 훈련이 잘된 전서구 편에 서신을 보냈다.

* * *

엽연채는 정안후부를 나서기 전 채 마마에게 이튿날 온씨의 몸 상태를 알려달라고 신신당부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아침 식사가 차려진 지 얼마 되지 않아 채 마마가 보낸 어린 여종이 엽연채를 찾아와 온씨의 상태가 나쁘지 않다고 전해 주었다. 그러자 엽연채의 지시를 받은 추길이 그 여종에게 돈을 조금 쥐여 주고는 그녀를 돌려보냈다.

“아가씨, 별로 멀지도 않은데 걱정되시면 직접 가서 마님을 뵙고 이야기도 나누세요.”

추길의 말이 끝나자마자 혜연이 추길을 쏘아보며 핀잔했다.

“아가씨께서 아직도 정안후부의 상전이시니? 주씨 가문은 관리가 엄격하지 않아 서쪽 측문으로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지만, 정안후부 쪽 사람들은 뭐라고 하겠니? 문을 지키는 하인이 매일같이 우리가 드나드는 걸 보면 또 어떤 귀에 거슬리는 말을 지어내 떠들어 댈지 몰라.”

이에 엽연채가 좋게 말하며 두 사람을 앉혔다.

“모레가 할머니의 생신 축하연이니 그때 가서 뵈면 된다. 다들 와서 같이 아침이나 들자꾸나.”

세 사람이 탁자에 둘러앉아 만두와 죽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경인이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가씨! 아가씨!”

“뭐야? 우리 만두라도 뺏어먹으려고 그러니?”

추길이 입을 삐죽 내밀며 말했다.

“소식이 왔습니다!”

경인이 거친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엽연채는 죽을 먹으며 물었다.

“무슨 소식인데? 너도 아침 먹을래?”

“아, 아닙니다!”

경인이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지난번에 그러니까 두 달 전에 아가씨께서 저한테 오씨 아저씨를 시켜 그 은정랑이라는 사람의 뒤를 캐보라고 하셨잖아요?”

그 말에 엽연채는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랬지!”

엽연채는 젓가락을 내려놓았고 추길과 혜연도 두 눈을 반짝이며 경인을 쳐다봤다. 경인은 안으로 들어오지 않고 계단에 앉아 땀을 닦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런데 오씨 아저씨가 찾아낸 건 모두가 다 아는 이야기입니다.”

“그거면 충분해. 어서 말해 봐.”

엽연채가 재촉했다.

“그 은정랑이라는 여인은 상주의 허가촌許家村 사람이라고 합니다. 혼인 전에는 허가촌에서 2리里 떨어진 청석구靑石溝에 사는 처녀였고요. 친정과 시댁 모두 지극히 평범한 농가였답니다.

그런데 그 여인에게 남들과는 다른 두 가지 특징이 있었는데, 첫째는 아주 곱상하게 생겨 동네방네 소문이 난 예쁜 처녀였다는 겁니다. 둘째는 글을 배웠다는 거예요. 은씨 집안은 평범한 농가라 글을 익히는 사람이 없었는데, 그 이웃 중에 나이 든 서생이 있었대요.

그 서생이 자기 딸에게 글을 가르쳤는데, 은정랑도 옆에서 함께 배웠던 거죠. 그 서생은 은정랑에게 학문적 자질이 뛰어나다며 사내로 태어났으면 과거 시험도 칠 수 있었을 거라며 칭찬을 했다고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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