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8화
“내가 혼수품 대부분을 기록해 놓았어요. 노균팔릉현문병爐鈞八楞弦紋瓶 한 쌍과 백옥토도 어머니의 혼수품이었는데 오늘 은정랑의 진열장에서 봤어요.”
“뭐, 뭐라고 하셨어요?”
채 마마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쉿!”
엽연채는 얼른 그녀의 입술에 손가락을 갖다 대며 말했다.
“조용히 말해요. 어머니가 쉬고 계시잖아요.”
그 말에 채 마마가 홱 몸을 돌려 침실 쪽을 바라보니 침실 주렴 너머로 염교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는데, 그녀는 소리를 못 들었는지 이쪽을 쳐다보지 않았다. 채 마마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뻔뻔한 인간! 첩실을 데리고 살라면 살라고! 그런데 감히 마님의 물건을 그 천한 여편네한테 갖다 바쳐!’
“아가씨, 확실히 보신 거 맞죠?”
채 마마가 얼른 엽연채에게 확인했다.
“확실히 봤어요. 틀림없어요.”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장담했다.
“세상에 어떻게 그런 우연이 있을 수 있겠어요? 어머니 혼수품이랑 똑같은 게 몇 개나 있었어요. 공교롭게도 영존거는 엽승덕이 꾸민 공간이잖아요.”
“맞아요. 그렇죠!”
채 마마는 이를 갈며 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런 뻔뻔한 일을 벌이다니. 아가씨, 가서 주인마님과 노마님께 이 사실을 이야기하세요. 어떻게 변명하는지 한번 지켜봐야겠네요!”
혼수품은 부인의 개인적인 물품이기 때문에 남편이라도 함부로 가져갈 수 없었다. 깐깐하게 따지고 들면 이는 벌을 내릴 수 있는 행위였다. 하지만 이런 일은 보통 집안일에 속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일을 크게 만들지 않을 뿐이었다.
엽연채는 싸늘한 눈빛을 번뜩이며 말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을 손봐 주려면 혼수 단자가 있어야 돼요. 증거도 없이 그 물건들이 어머니 것이라고 주장하면 그 말을 누가 믿어 주겠어요?”
“저희 쪽 혼수 단자는 사라졌지만, 혼수 단자는 본래 두 장입니다. 한 장은 마님이 갖고 계셨고 다른 한 장은 친정집에 있죠. 신부를 맞이하러 올 때 양가에서 혼수 단자에 서명한 뒤 날인했으니 발뺌하지 못할 겁니다.”
“외조부 댁에 다른 한 장이 있는데 왜 혼수 단자를 잃어버렸을 때 외조부 댁에 가서 단자를 가져와 물건들을 하나하나 맞춰 보지 않았어요?”
채 마마의 말에 엽연채는 이해가 안 간다는 목소리로 물었다.
“당연히 갔었죠. 혼수 단자를 보관하던 분은 아가씨 외조모이셨어요. 그런데 단자를 찾으러 갔을 때 외조모님은 중풍 탓에 침상에 누워 꼼짝도 못 하시고 말씀도 못하셨어요.”
채 마마는 옅은 한숨을 쉬며 한탄했다. 그 말을 들은 엽연채는 마음이 몹시 울적해졌다. 재수가 없으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진다더니.
“외조부 댁에 가서 여쭤봐야겠어요.”
“아가씨, 마마. 우선 뭐 좀 드세요!”
이때 추길이 찬합을 들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벌써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가 지났어요.”
“배고픈 것도 잊고 있었구나. 어서 음식을 차리거라.”
엽연채가 재촉하는 투로 말했다.
“아직 날이 밝으니 밥을 먹고 온씨 가문에 가 보자꾸나.”
이에 추길은 소청 원탁에 밥과 반찬들을 하나하나 올려놓았다.
“추길이와 마마도 와서 앉아요. 함께 먹어요.”
엽연채가 권하자 채 마마는 조심스럽게 사양했다.
“아가씨, 외조부 댁에 가더라도 선물은 준비해야 하니 추길이와 함께 드시고 계세요. 저는 가져갈 선물을 준비하겠습니다.”
“알겠어요. 그럼 부탁 좀 할게요.”
엽연채와 추길이 대충 몇 술 뜨고 있는데 채 마마가 다시 돌아왔다. 그녀는 찻잎 단지와 ‘만卍’ 자 무늬가 들어간 짙은 남색 적삼을 가져왔다.
“아가씨 외조모님은 차 중에서도 대홍포大紅袍를 가장 좋아하세요. 그리고 이건 마님께서 직접 만드신 옷이에요. 외조모님께 드리려고 준비한 겁니다! 아가씨께서 마님을 대신해 전해드리면 되겠네요!”
“그래요.”
엽연채는 ‘만卍’ 자 무늬가 들어간 짙은 남색 적삼을 만지며 옅은 한숨을 쉬었다. 시간이 생기면 자신도 어머니께 옷 한 벌 지어 드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전에도 손수 만든 물건을 온씨에게 선물한 적이 있었다. 선물한 건 말액이었는데, 온씨는 말액을 차고 다니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았다. 자신도 굳이 차고 다니라고 강요하고 싶지 않았기에 두 개를 만들어 드리고 그 뒤론 만들지 않았다.
“마마, 안녕당에 안 들를 거니까 마마가 나 대신 할머니께 안부 좀 전해 줘요.”
“예. 지금 그쪽에는 영교 아가씨가 계실 테니 노마님께서는 아가씨가 인사드리러 가지 않으셔도 신경 쓰지 않을 겁니다.”
이렇게 한마디씩 주고받은 후 엽연채는 채 마마에게 온씨를 잘 돌봐 달라고 부탁한 뒤, 선물을 들고 추길과 함께 문을 나섰다.
* * *
정안후부 밖으로 나온 마차는 흔들거리며 대로를 지나갔고 외조모를 떠올린 엽연채는 옅은 한숨을 쉬었다. 시집간 뒤로 외조모를 한참 동안 찾아뵙지 못했기 때문이다.
온씨 가문은 도성에서 학자 가문으로 통했다. 몇 대에 걸쳐 벼슬아치를 배출했고 가장 높은 직위를 맡았던 사람이 그녀의 외조부였다. 외조부는 호부상서户部尚書였는데 십 년 전 사직한 후에 곧 세상을 떠났다. 그가 작고한 후 온씨 가문은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다. 가문에 글재주가 있는 자손이 하나도 없던 탓이었다.
그러나 황제는 조정과 나라를 위해 온 힘을 다했던 외조부를 생각해 엽연채의 큰외숙에게 5품관五品官 한직閑職을 내렸다. 황은 덕분에 온씨 가문에서 어쨌든 다시 관리가 배출됐으나 당연히 가세는 예전만 못했다. 더군다나 온씨 가문은 두 세대에 걸쳐 적통嫡統 자손이 거의 없어 엽연채에겐 외숙부 한 분과 이모 두 분밖에 없었다.
마차는 대략 일각을 달린 후 온씨 가문 동쪽 측문에 도착했고 엽연채는 패자牌子를 건넨 후 마차는 안으로 들어갔다. 수화문에 도착한 그녀가 마차에서 내리자 여종들이 그녀를 반겼다.
“아가씨, 오셨습니까!”
이때 깔깔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 엽연채가 고개를 들자 살구꽃 문양에 앞섶이 좌우로 교차하는 등적색 유군襦裙(짧은 상의와 치마가 한 벌로 이루어진 전통 복장)을 입은 어여쁜 소녀가 보였다. 온남아였다.
“연채가 왔구나.”
온남아가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섰다.
“방에서 이번 달 주방 장부를 보고 있는데 여종이 와서 네가 도착했다고 알려 줬어. 그래서 이렇게 마중 나온 거란다.”
“언니.”
엽연채는 배시시 웃으며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팔짱을 끼었다.
“할머니를 뵈러 온 거지?”
온남아가 물었다.
“네.”
자매는 이야기를 나누며 문턱을 넘었다. 온남아가 할머니의 거처가 있는 방향으로 걸어가자 엽연채가 그녀에게 물었다.
“외숙모를 뵈러 안 가요?”
“어머니는 아침 일찍 출타하셨으니 신경 안 써도 돼. 할머니를 뵈러 가자.”
협문夾門으로 들어간 두 사람이 오른쪽으로 돌아 조금 더 걸어가자 흰 벽에 검푸른 기와로 지어진 뜰이 보였고 편액에는 영복원永福院이라고 쓰여 있었다. 두 사람이 문으로 들어서자 오십 대로 보이는 간편한 차림의 어멈이 화초를 돌보고 있었다. 그녀는 두 자매를 보더니 반기며 앞으로 다가갔다.
“연채 아가씨가 아닙니까? 정말 오랜만에 뵙네요. 어서 안으로 들어오시죠!”
“우리 평 마마가 기뻐서 죽으려고 하네.”
온남아가 낄낄 웃으며 말했다.
“연채만 보이고 나는 안중에도 없나 봐.”
“아가씨는 저리 가세요. 하루에 세 번씩이나 뵈니 성가셔 죽겠어요.”
평 마마도 놀림조로 대꾸했다.
평 마마가 고개를 들어 엽연채를 쳐다보았다. 좀 도도한 인상이었던 아가씨는 예전과 다름없이 아름다웠고, 독보적인 미모를 뽐내고 있었다. 다만 등 뒤로 길게 늘어뜨렸던 머리를 쪽 졌더니 성숙한 분위기가 더해져 예전에 느껴지던 도도함은 살짝 옅어진 느낌이었다.
평 마마는 엽연채의 혼사 문제를 떠올리고는 다시금 가슴이 아파 엽연채의 손을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아가씨, 어서 안으로 드시죠. 노마님께서 아가씨를 오랫동안 못 보신지라 무척 보고 싶어 하세요.”
“그래요.”
엽연채는 눈시울을 붉혔다. 기억이 전생에서 숨을 거두던 그 시기에 머물러 있는 게 분명했다. 전생에서 자신은 무려 삼사 년을 장씨 가문에 묶여 살았고, 그 젊은 시절에 많은 사람 그리고 많은 일이 멀어져 갔다. 그리고 환생한 뒤에도 너무 많은 일이 벌어져 자신을 아끼고 사랑해 준 사람들을 돌아볼 시간이 없었다.
평 마마가 발을 걷어 올리자 엽연채와 온남아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방 안에선 다소 진한 말리화 향이 풍겼다. 중풍에 걸린 외조모를 평 마마를 비롯한 다른 하인들이 아무리 살뜰히 보살핀다 하더라도 냄새가 좀 날 수밖에 없었다. 밤낮으로 창문을 열어 놓아도 별 도움이 되지 않아 향을 피워놓은 것이었다.
세 사람이 침실로 들어가니 침상 위에는 육칠십 대로 보이는 노부인이 누워 있었다. 살짝 통통한 이 노부인의 얼굴에는 주름이 가득했다. 그녀는 국화 문양이 들어간 검은색 긴 윗옷을 입고 있었으며, 머리에는 마름모 형태의 백옥을 상감하고 은실로 수를 놓은 검은색 비단 말액을 차고 있었다. 입이 돌아간 그녀는 엽연채가 들어오는 모습을 보더니 반가움에 ‘우우’ 소리를 냈다.
“할머니.”
엽연채가 얼른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 노부인은 힘겹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가만히 누운 채로 외손녀를 바라봤다.
“제가 일이 너무 많아서 이곳에 오는 걸 깜빡하고 말았어요. 오늘 친정에 들렸다가 일이 있어서 찾아뵈어야겠단 생각이 든 거고요. 전 정말 맞아도 싸요.”
그때 추길이 옷과 찻잎 단지를 들고 앞으로 다가왔다.
“이건 어머니가 할머니께 드리려고 만드신 옷이에요. 그리고 이건 할머니가 제일 좋아하시는 대홍포고요. 제가 준비한 건 없고 어머니가 준비하신 선물만 드리고 있네요.”
엽연채는 이리 말하며 조금 겸연쩍어했다.
“연채 아가씨께서 오신 것만으로도 충분하실 겁니다.”
평 마마가 미소를 지으며 옷과 찻잎 단지를 건네받더니 옷을 만져 보며 말했다.
“예나 지금이나 아가씨는 손재주가 좋으세요. 마님께서도 아가씨가 만든 옷을 입을 때 가장 편안해하세요! 자주 만들면 힘드실 텐데 나중에 연채 아가씨께서 친정에 가시면 눈이 상할 수도 있으니 쉬엄쉬엄하시라고 말씀드리세요.”
“알겠어요.”
온 노부인도 평 마마의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옆에 놓인 의자를 쓱 쳐다봤다. 그녀는 중풍에 걸려 늘 침실에서 지냈기 때문에 응접실에서 손님을 맞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녀를 문병 온 사람들은 모두 곁에 앉았다. 그래서 침상 근처에는 기다란 의자 또는 등받이가 없는 의자가 여러 개 놓여 있었다.
“아가씨, 노마님께서 앉으시랍니다.”
평 마마가 말하자 엽연채는 외할머니와 가장 가까운 곳에 놓인 수돈 위에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