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107화 (107/858)

제107화

엽균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찬바람이 쌩쌩 부는 얼굴로 엽연채를 쳐다보며 말했다.

“오늘 영존거에 온 진짜 목적이 무엇이냐? 정랑을 정안후부로 데려가 괴롭히려던 거 아니냐? 연채야, 난 네가 깨달은 바가 있다고 생각해 너의 생각을 바로잡아 놓으려고 했다. 그런데 다들 나를 이용해 정랑을 괴롭히고 짓밟으려고 했어.”

그 말에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리며 생각했다.

‘내 생각을 바로잡아 놓으려고 했다고? 내 오라버니지만 참 대단하다!’

그녀는 냉소를 지으며 입을 뗐다.

“내가…….”

“그 입 다물고 내가 하는 말 들어!”

그러나 엽균이 한발 앞섰다. 그는 또 한바탕 일장연설을 늘어놓으려고 했고 이번에는 목표를 바꾸었다. 그는 엽영교를 쳐다보며 말했다.

“고모, 우리가 명문대가의 자제이지만 권세를 이용해 빈곤한 백성들을 괴롭히고 억압하면 안 되지 않습니까?”

“당연하지.”

엽영교는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질문에는 이리 답하는 게 타당했다.

“그런데 오늘 어떻게 하셨나요?”

엽균은 말할수록 감정이 격양되었다.

“정랑은 그저 빈곤한 농촌 아낙네이며 과부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서슬 푸른 모습으로 몰려와 정랑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암암리에 그 사람을 괴롭히려고 했어요.”

“우리가 언제 그 여인을 괴롭히려고 했단 말이냐?”

엽영교는 분노가 극에 달하자 오히려 헛웃음이 나왔다.

“우리가 핍박한 적이 언제 있다고 벌써 결론부터 내는구나. 이건 우리에게 너무 불공평한 처사 아니냐?”

엽균은 냉소를 지으며 반박했다.

“왜 향시를 치른 후 정안후부에 들어가면 안 되는 건데요? 왜 꼭 지금이어야 하는 건데요? 그게 바로 저의가 있다는 걸 보여 주는 증거이죠.”

엽영교는 말문이 막혀 순간 대답할 말을 찾지 못했다. 그러자 엽연채가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요. 저의가 있었던 게 맞아요! 그 저의라는 게 바로 오라버니에게 그들의 진짜 모습을 똑똑히 보여 주는 것이었어요. 그 사람들은 단순히 정랑을 이낭으로 만드는 데 그칠 사람들이 아니에요. 그렇지 않으면 왜 갖가지 핑계를 대가며 회피하겠어요?”

“향시 때문이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엽균이 성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엽승덕이 마지막에 했던 말은요!”

엽연채의 얼굴이 점점 더 싸늘하게 변했다.

“그 사람 마음속에는 어머니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그건 그 사람 스스로도 인정했고요. 자, 이제 어떻게 반박하실 거예요?”

엽균은 눈살을 심하게 찌푸렸다.

“좀 관대해질 수는 없는 거니? 아량을 베풀 수는 없는 게야? 어머니는 가진 게 많은 분이시잖아. 귀한 신분에 재물도 많고 의식衣食 걱정도 안 하시잖아. 좋은 시부모님에 아들딸도 있고 말이야. 하지만 정랑에겐 아버지뿐이다. 그런데 그것마저도 갖겠다고 싸워야겠느냐?”

그 말을 들은 엽영교는 가슴을 부여잡더니 하마터면 피를 토할 뻔했다.

‘저 괴짜는 대체 어느 집 자식인 거지? 새언니가 출산할 때 실수로 친자식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왠 얼뜨기를 데려와 대신 키운 게 아닐까?’

이때, 옥패가 쿵쿵거리며 뛰어왔다.

“아가씨, 마님께서 일어나셨습니다.”

엽영교가 싸늘한 눈빛으로 엽균을 힐끗 쳐다보며 말했다.

“연채야, 얜 가망이 없다. 가자!”

“네.”

맞다. 엽균은 더 이상 가망이 없고 엽연채도 이미 그를 포기했다. 이미 포기했으니 더 이상 쓸데없는 이야기를 할 필요도 없다. 엽연채는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엽영교와 자리를 떴다.

“이……!”

엽균은 한창 의기양양하게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요점을 딱 집어서 이야기했다고 생각했는데, 누이동생과 고모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등을 돌려 가 버렸다. 하지만 감히 그들의 앞을 가로막을 수는 없었다.

엽연채와 엽영교가 방으로 돌아오니 온씨가 채 마마의 몸에 기대 힘겹게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어머니!”

엽연채가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갔다.

“집으로 돌아가자꾸나!”

온씨가 창백한 얼굴로 처량한 미소를 지었다.

“네, 어머니. 마부에게 마차를 가져오라고 할게요. 일단 어머니는 좀 더 누워 계세요”

엽연채가 그러겠다고 말할 때 영민한 추길은 이미 밖으로 뛰어가고 있었다. 온씨는 다시 침상에 누워 두 눈을 감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마차가 정원으로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채 마마는 온씨를 업고 마차에 올랐고 다른 사람들도 분주히 움직였다. 잠시 후 마차는 후문을 나섰다.

한쪽에 숨어 있던 엽균은 서둘러 떠나는 그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가슴이 답답하고 괴로웠다. 왜 다들 자신을 이해해 주지 않는 걸까?

* * *

마차는 일각을 달린 후 정안후부 수화문 밖에 멈춰 섰다. 엽영교는 하인에게 연교軟轎(특히 집 안에서 여인들이 많이 타는 가마)를 가져오게 해 온씨를 태워 영귀원으로 보냈다. 그리고 패자牌子(신분증)를 가지고 태의원太醫院에 가서 태의를 모셔왔다.

태의는 진맥을 하더니 백초의관 의원과 비슷한 진단을 내렸다. 그러고 나서 백초의관에서 처방해 준 약을 살펴보더니 그중에서 용안龍眼을 뺐고 집 색깔이 붉은색을 띠는 제비집을 매일 2냥二兩(兩은 무게 단위로 현대 중국 기준에서는 약 50g이나 시대별·항목별로 차이가 있음)씩 먹으며 몸조리를 하면 된다고 알려 준 뒤 돌아갔다.

발보상 위쪽에는 묵직해 보이는 휘장이 늘어뜨려져 있었다. 온씨는 침상에 누워 두 눈을 감고 있었으나 엽연채는 그녀가 깨어 있음을 알고 있었다. 엽연채는 침상 곁에 앉아 있었고 엽영교와 채 마마는 한쪽에 서 있었다.

“어머니… 죄송해요. 어머니를 그곳에 모시고 가는 게 아니었어요.”

엽연채의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커다란 눈망울에 눈물이 고였다.

“아니다…….”

온씨는 눈을 뜨더니 창백한 얼굴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게 고맙구나. 내가… 현실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게 해 주지 않았느냐. 그동안 나는 하염없이 엽승덕을 그리면서 그 마음을 짐작해 보려고 했단다. 힘들었지……. 너무 힘들었단다. 그런데 이젠… 마음을 짐작해 보지 않아도 되잖니.”

그렇게 말하며 그녀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눈가를 따라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내렸다.

“마님, 오랜 시간 동안 괴로움을 견디느니 한순간의 고통을 참고 문제를 매듭짓는 게 낫습니다. 세자야의 마음을 똑똑히 알았으니 앞으론 홀가분한 마음으로 사시면 되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채 마마는 눈물을 머금고 주인을 위로했다.

“그래.”

온씨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수긍했다. 제대로, 똑똑히 알게 되었고 단념은 했으나 마음은 여전히 아팠고 눈물 역시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러나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 주리라.

엽연채는 그제야 십 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기분이 들었다. 오늘 송화 골목에 갔던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는 어리석은 오라비에게 은정랑의 진짜 모습을 똑똑히 보여 주기 위함이었고, 둘째는 어머니에게 엽승덕의 본모습을 똑똑히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어머니는 엽승덕의 본 모습을 똑똑히 보게 되었지만 분을 이기지 못하고 각혈을 하고 말았다.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모습을 마주한 탓에 대가를 좀 크게 치른 셈이었다. 그러자 엽연채는 자신이 잘못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방금 전 온씨의 말을 듣고는 걱정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연채야, 걱정 말거라. 난 괜찮다.”

온씨는 간신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오랫동안 마음속에 눌러만 놓다가 오늘에서야 이 말을 꺼내게 됐구나. 나는 잘 살 것이다! 다른 건 다 제쳐놓고 분해서라도 잘 살 것이야. 난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죽으면 그 첩실에게 내 자리를 내주는 것 아니냐? 절대로 그것들 뜻대로 되게 할 수는 없다!”

“맞습니다. 마님. 그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채 마마가 그녀의 말에 동의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새언니, 앞으로 오라버니는 죽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버리세요. 우린 모두 새언니 편이에요.”

엽영교의 동조에 엽연채는 입을 약간 오므리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그녀는 그렇게 하기보다는 어머니가 엽승덕과 헤어지기를 더 바랐다.

“마님, 탕약을 달여 왔습니다.”

이때 염교가 쟁반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쟁반 위에는 흑갈색 탕약이 올려져 있었다. 엽연채는 온씨를 부축하며 탕약을 먹였고 온씨는 탕약을 다 마신 후 눈을 감고 쉬려 했다.

“아가씨, 노마님께서 일이 있으니 아가씨를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안녕당의 어린 여종이 안으로 들어오며 엽영교를 불렀다. 이에 엽영교는 고개를 끄덕이며 온씨 모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새언니, 연채야. 저 먼저 가볼게요.”

“네, 고모.”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를 배웅했다.

엽영교가 떠나자 엽연채는 염교에게 온씨를 부탁하더니 채 마마를 잡아끌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마마, 나 좀 봐요.”

채 마마와 엽연채는 침실 밖으로 나가 서차간으로 갔다.

“마마, 어머니 혼수 단자는 어디에 있어요?”

엽연채는 목소리를 낮춘 채 물었다.

“혼수 단자요?”

채 마마는 미간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아가씨, 그건 왜 갑자기 물으시는 거예요? 마님의 혼수 단자는 오래전에 잃어버렸어요.”

“어쩌다가 잃어버렸어요?”

그 말을 들은 엽연채는 어안이 벙벙했다.

“수년 전의 일이에요. 아가씨가 혼약을 맺으셨을 때 마님께서 아가씨 혼수를 준비하려고 광에 가서 물건들을 하나하나 점검하시려는데 혼수 단자가 보이지 않는 거예요. 혼수 단자가 없으면 물건들을 점검할 수가 없잖아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마님께서 새로 기록하셨죠.”

“하지만 그건 원래 가지고 있던 혼수 단자가 아니잖아요.”

엽연채의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뭐 없어진 건 없었어요?”

“혼수품이 한두 개도 아닌데 혼수 단자가 없어졌으니, 그걸 다 기억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게 하나 있어요. 바로 불꽃이 타오르는 듯 새빨간 혈옥血玉 팔찌였지요. 마님께서는 젊었을 때 몸이 차셨어요. 그래서 아가씨 외조모님께서 큰돈을 들여 그 팔찌를 구해 마님에게 드렸지요. 몸을 따뜻하게 하는 효과가 있어 아주 귀한 물건이었어요.

마님께서 시집오신 후 늘 차고 다니셨는데 아가씨가 일고여덟 살쯤 됐을 때 마님이 그 팔찌를 망가뜨릴 뻔하신 거예요. 그래서 차고 다니기 아까워 아가씨 혼수품으로 남겨두려고 그 팔찌를 광에 가져다 놓고 자물쇠로 잠가두었죠. 그런데 혼수 단자가 사라진 거예요. 어쨌든 아가씨 혼수는 준비해야 되니 그 팔찌를 찾았는데 결국 찾지 못했죠.”

채 마마는 씩씩거리며 욕했다.

“어느 칼 맞아 뒈질 놈이 여기 와서 훔쳐갔을지도 모르죠! 그래서 나중에 광의 자물쇠를 크고 무거운 놈으로 바꿨어요. 그건 그렇고 아가씨 혼수 단자는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내가 어릴 때 한동안 광에 가서 노는 걸 좋아했잖아요?”

“예, 그러셨죠.”

채 마마는 엽연채를 핀잔하는 듯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당시에는 어린아이 머리에 대체 무슨 생각이 들어 저러시는 걸까 했었죠. 다른 집 어린 아가씨들은 화원에서 나비를 쫓아다니거나 물고기에게 밥을 주며 노는 걸 좋아하는데, 아가씨는 광에 가서 마님의 혼수품을 세어 보는 걸 좋아하시더라고요.”

“제가 어릴 때 하던 행동이 옳았음이 증명됐네요.”

엽연채가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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