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6화
채 마마의 호된 질책에 추풍의 퉁퉁한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그가 일어서서 달아나려고 하자 채 마마가 그를 붙잡더니 다시 땅바닥에 내동댕이치며 을렀다.
“어딜 가려는 게냐!”
“마마, 그냥 놔줘요!”
엽연채가 채 마마를 말렸다. 추풍은 채 마마의 손아귀에서 풀려나게 되자 마음을 놓고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암홍색 매화 문양이 들어간 상의와 치마를 입은 엽연채가 방실거리며 천천히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위로 쓱 올라간 입꼬리에서는 당장이라도 가시 돋친 말을 쏟아낼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졌다.
“가서 네 상전에게 아뢰거라. 오지 않으면 매일 영존거에 가서 차를 마실 거라고 말이다! 정랑이 차 하나는 정말 기가 막히게 우리더구나!”
그 말을 들은 추풍은 깜짝 놀라더니 감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쏜살같이 달아나 버렸다. 채 마마는 추풍의 뒷모습을 쳐다보며 화가 나 씩씩거렸다.
“저 빌어먹을 놈. 내 언젠가는 그 뒤룩뒤룩한 몸뚱이에 붙은 기름을 쫙 다 짜 버릴 것이다!”
엽영교와 추길은 그 말에 그만 웃음보가 터질 뻔했으나 아직 침상에 누워 있는 온씨를 생각하고는 웃음을 꾹 참았다. 본래 엽균이 안뜰에서 다른 곳으로 거처를 옮기기 전에 그를 모시던 시동은 온씨가 붙여 준 사람이었다.
하지만 거처를 옮긴 후 엽균은 그 시동을 내보냈고, 엽승덕이 그에게 새로 추풍을 붙여 주었다. 엽균은 편안하고 자유로운 삶을 동경해 그에게 추풍, 즉 ‘바람을 좇다.’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추풍은 도망치듯 백초의관을 빠져나와 동쪽 거리를 지나 한 골목으로 들어갔다. 엽균은 그 골목의 나무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 추풍을 기다리고 있었고, 그가 돌아오는 모습을 보자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물었다.
“어떻게 됐니? 어머니는 아무 일 없으시지?”
추풍은 아픈 엉덩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마님은 보지 못했습니다. 의관에 도착하자마자 채 마마가 절 잡아끌어다 내동댕이쳤거든요.”
추풍은 통증이 꽤 심한지 미간을 찌푸렸다.
엽균의 낯빛이 확 변했다. 채 마마가 추풍을 발견하다니! 그는 몸을 부르르 떨었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는 낭패감을 느끼면서 한편으론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추풍이 말은 안 했지만 채 마마가 뭐라고 호통을 쳤을지는 뻔한 것 아닌가. 어머니가 몸져누워 있는데 어떻게 아들이라는 사람이 와 보지도 않을 수 있냐고 했을 터였다. 엽균은 부끄러운 나머지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채 마마가 그렇게 난리를 친 걸 보니 어머니는 분명 별 탈 없으실 게다.”
엽균은 그리 말하며 헤벌쭉 웃었다. 꺼림칙한 기분을 떨쳐 버리고 싶었다.
“큰아가씨… 큰아가씨께서…….”
추풍이 쭈뼛쭈뼛하며 엽균을 쳐다봤다.
“큰아가씨께서 도련님께 마님을 보러 오라고 하셨습니다. 안 오시면 매일 영존거로 차를 마시러 가시겠다고도 말씀하셨습니다.”
엽균은 그 말을 듣고 안색이 확 변하더니 금세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는 버럭 화를 냈다.
“그, 그게 무슨 말이냐? 걔가 이젠 나를 협박한단 말이냐?”
“그럼… 가실 건가요?”
추풍은 겁먹은 눈으로 엽균을 쳐다봤다. 엽균의 표정은 더욱 어두워졌다. 평소에도 동생은 저를 보기만 하면 온갖 설교를 늘어놓는데 이제 이런 일까지 벌어졌으니 자신을 산 채로 잡아먹으려 들지 않을까?
추풍은 엽균이 가기 싫어한다는 걸 눈치채고는 이렇게 말했다.
“그분들 기세를 보니… 마님은 분명 별 탈 없으실 겁니다.”
그러자 엽균이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 그래……. 맞다. 네 말이 맞아!”
그런데 추풍이 또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데… 영존거는 어떻게 하죠? 큰아가씨가 정말 하루도 거르지 않고 영존거로 오실까요?”
“가자. 가서 은정랑과 허서에게 당분간 밖에서 지내라고 해야겠구나.”
엽균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송화 골목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는 이런 시기에 어머니나 누이동생을 만나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가슴이 미어진다는 듯 고함을 지르고 눈물 섞인 목소리로 저를 나무라는 모습을 떠올리니 생각만으로도 몸서리가 쳐졌다.
자신이 아무리 도리로 설득해도 지금 그들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것이었다. 시간이 좀 지나 어머니 몸이 회복되고 그들의 분노가 가라앉으면 그때 다시 설득하는 편이 나았다. 모두가 마음을 가라앉히고 냉정하게 문제를 마주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그는 두어 걸음 가다가 갑자기 발걸음을 멈추었다. 뒤를 따르던 추풍은 하마터면 부딪힐 뻔했다.
“큰공자님. 왜 그러세요? 송화 골목으로 가지 않으실 겁니까?”
“안, 안 되겠다!”
엽균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안 가는 건 별로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내가 안 가면 아버지와 정랑에 대한 그들의 오해가 점점 더 깊어질 게야. 내가 안 가면 분명 어머니를 보지 못하게 정랑이 날 붙잡아 뒀다고 생각할 테니까.”
그러더니 자신의 머리를 퍽퍽 때리며 말했다.
“나는 어쩜 이리 어리석을까! 가자!”
그렇게 말하더니 걸음을 되돌렸다.
두 사람은 골목을 나가서 거리를 두 번 지나 백초의관에 도착했다. 엽균이 백초의관 안으로 들어가니 채 마마가 노기등등한 모습으로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놀란 엽균은 억지웃음을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채 마마.”
“큰공자, 방금 전에 왜 바로 오지 않으셨나요?”
채 마마는 굳은 표정으로 쌀쌀맞게 물었다. 그녀가 음산한 눈길로 엽균을 힐끗 훑어보자 그는 온몸을 덜덜 떨었다. 그나마 채 마마는 자신과 정랑과 이미 알고 지내던 사이라는 걸 모르고 있으니 자세히 설명할 필요가 없었지만, 누이동생 앞에서는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랐다.
엽균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입을 열었다.
“내가 조금 늦게 나왔더니 연채와 다른 사람들의 모습이 이미 보이지 않았네……. 그래서 추풍을 보내 찾았던 거 아니겠나……. 그런데 이 아이를 붙잡고 내동댕이칠 줄 누가 알았겠소.”
그 말에 채 마마의 표정이 어두워졌고 그녀가 반박하려는 찰나에 의원의 목소리가 들렸다.
“거기 두 분, 말씀은 뒤쪽 정원에 가서 나누시죠!”
의원은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앞으로 다가서며 둘을 말렸다. 여긴 영업하는 곳인데 소란을 피우면 되겠는가!
“큰공자님, 마님을 보러 안 가실 거예요?”
채 마마가 물었다.
“당연히 보러 가야지.”
엽균은 머쓱한 얼굴로 자신의 가슴팍을 탁탁 두드리며 말했다.
“채 마마, 어머니는 별 탈 없는 거지?”
“화를 못 이겨 각혈을 하셨는데, 공자님 생각에는 어떠실 것 같으세요?”
채 마마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쳤다. 그러나 엽균은 눈알을 굴리며 그 말을 다르게 해석했다. 어머니 상태가 정말로 심각했으면 채 마마가 절대로 이곳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엽균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두 사람이 곁채로 들어가니 엽연채와 엽영교가 온씨 곁을 지키고 있었다. 엽균은 엽연채를 보자마자 위축이 됐고 마지못해 침상 곁으로 다가갔다. 온씨는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는데, 아름답고 단아한 얼굴에는 핏기가 하나도 없었다. 그 모습을 보자 엽균은 씁쓸한 기분이 들더니 마음이 무척 괴로웠다.
그가 고개를 돌리자 엽연채가 싸늘한 얼굴로 그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엽균은 깜짝 놀라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뻔했다.
“연채야, 할 말이 있으면 둘이 밖으로 나가 이야기하자꾸나!”
“굳이 사람들을 피해 밖으로 나갈 필요 있어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다 장님으로 보이나 봐요!”
엽연채는 차가운 말투로 비꼬듯이 말했다. 그러자 엽균의 표정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채 마마와 엽영교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흘겨보고 있었다. 그러자 엽균은 도둑이 제 발 저리듯이 안절부절못하더니 이내 부끄러우면서도 노여운 마음도 들었다.
방금 전 영존거에서 보인 엽균의 언행은 은정랑 모자를 감싸고 있음을 너무도 분명히 드러냈다. 그 까닭을 모를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게 어디 온씨에게 힘이 되어 주려고 온 사람의 행동인가. 그는 은정랑에게 힘이 되어 주려 왔던 것이다.
“그래요. 밖으로 나가요. 어머니가 계시는데 소란 피우면 안 되죠!”
엽연채가 콧방귀를 뀌며 방을 나섰다.
“채 마마, 마마는 여기서 큰 새언니를 돌봐 줘요.”
엽영교도 엽연채 뒤를 쫓아갔다. 세 사람은 곁채 밖으로 나가 정원으로 갔고 엽연채가 엽균에게 따져 묻기도 전에 그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서 내가 여기 못 오게 붙잡아 두신 게 아니다……. 내가……,”
“알아요. 오라버니가 겁먹고 못 온 거겠죠.”
엽연채가 코웃음을 치자 엽영교는 ‘피식’ 실소를 하더니 웃음을 참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고 나서 냉랭한 목소리로 물었다.
“균아, 이게 어찌 된 일이야? 어째 너랑 그 외실이 잘 아는 사이인 것 같더라. 어머, 설마 너 바깥뜰로 거처를 옮긴 후부터 그 여인이랑 가깝게 지낸 거니?”
그러자 엽균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왜 다들 나한테 정랑과 가까이 지내는지만 묻고 왜 내가 그 사람과 가까이 지내는지 그 이유는 안 묻는 겁니까?”
엽영교는 그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 두 눈을 부릅뜨고 물었다.
“나도 그 이유가 알고 싶었다. 대체 왜 그러는 게냐?”
“정랑은 케케묵은 사고방식을 가진 어리석은 연채와 고모와는 달리 시야도 넓고 식견도 있거든요.”
엽균이 이리 대꾸하는 동안 엽연채의 두 눈에는 순간 싸늘한 냉기가 돌았다. 전생에서도 한 번 들었던 이야기였다.
“우리가 케케묵은 사고방식을 가진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엽영교가 성난 목소리로 되받아쳤다.
“그게 무슨 말이냐? 어째서 우리가 케케묵은 사고방식을 가진 어리석은 사람이라는 게야?”
“사실 오라버니는 그저 안일함을 추구하는 사람일 뿐이에요.”
엽연채가 찬찬히 말을 꺼냈다.
“솔직히 말해 고생을 견디지 못하고 매일 노력 없이 성취할 생각만 하잖아요. 집안사람들이 공부하라고 강요하는데 공부는 하기 싫으니 집에 못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거겠죠. 온종일 그 첩실의 집에 들러붙어 있는 것도 그곳 사람들은 모두 오라버니를 떠받들어 주니까요.”
“교만에 빠지게 해서 장래를 망쳐 놓으려는 거지!”
엽영교가 냉소를 지으며 맞장구를 쳤다.
“교만에 빠지게 해서 장래를 망쳐놓는다고요?”
엽균이 성난 목소리로 말했다.
“날 그렇게 만들어 정랑이 무슨 이득을 본다고요? 그 사람에게 아들이 있다 해도 아버지 친자식도 아닌데 뭘 어쩌겠어요? 됐어요. 이런 이야기나 하려고 이곳에 온 게 아니에요. 제가 말하려던 건 오늘 벌어진 일은 다 오해에서 비롯됐다는 겁니다.”
엽영교는 참지 못하고 불같이 화를 냈다.
“오해? 큰새언니께서 아직도 침상에 누워 계셔! 그런데 지금 오해라고 했니?”
“어머니께서 안 내도 될 화를 내신 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