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5화
“균이 공자님!”
은정랑이 비틀거리며 걸어오더니 문틀을 붙잡고 멈춰 섰다. 그녀는 본디 왜소한 체구인 데다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이렇게 문틀에 기대어 있으니 더욱 가엽고 무력해 보였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사과했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어서 가서 어머니를 돌봐 드리세요! 전 그저 정안후부에 들어가는 시기를 조금 늦추고 싶었던 것뿐인데 마님께서 저리 화를 내실 줄은 생각도 못 했어요. 그리고 저리 되실 줄은…….
전 그저 허서가 안정된 상태에서 향시를 치르길 바랐을 뿐이에요. 그런데 마님께서 언짢으셨나 봐요. 바로 정안후부로 들어갈게요! 지금 당장이요! 허서가 올해 시험에 응시하지 않으면 돼요! 앞으로도 시험을 치지 않으면 돼요!”
“시험 안 볼게요! 안 보면 되는 거잖아요! 앞으론 공부하지 않을게요!”
허서는 정원에 서서 손에 들고 있던 유생모儒生帽를 땅에 집어 던지더니 동쪽 곁채로 뛰어 들어갔다.
엽균은 깜짝 놀라 멍하니 서 있었다. 그는 은정랑과 엽승덕을 조금 원망하고 있었다. 그런데 은정랑이 약한 모습을 보이며 허서에게 시험도 치지 말라고 하고 허서가 모자를 집어 던지는 모습을 보더니 이 모든 게 저들이 다 어머니를 위해 희생하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엽승덕이 정원에 서서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정랑을 정안후부로 들인 다음 괴롭히려고 했던 게지.”
“나리, 그렇게 말씀하지 마세요. 부인은 좋은 분이세요. 절 괴롭히려고 그런 게 아니세요. 절 정안후부로 데려가고 싶으셨던 것뿐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돌리더니 눈물을 주르륵 흘리며 애걸하는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래요. 그런 뜻이 아닌 걸로 합시다. 그런데 어째서 다른 때가 아닌 이때 굳이 그리해야겠다고 저러는 건지 원! 그런 뜻이 아니면 왜 시기를 늦추지 않는단 말이오? 허서가 향시를 치른 후에 해도 되지 않소?”
엽승덕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적잖이 화가 난 모양이었다.
“부모가 자식을 위해서 이러는 거 아니오. 자네가 허서를 아끼고 사랑해서 그러는 것뿐인데, 그저 허서가 안정된 상태에서 향시를 치르길 바라는 것뿐인데 이게 뭐가 잘못됐다는 거요? 왜 하필 이때를 골라 서슬 푸른 모습으로 나타났단 말이오? 한 사람의 이기적인 마음 때문에 모두가 희생해야 되는 거잖소. 허서가 십수 년간 어려움을 견디며 힘들게 학문을 닦아 왔는데 그 사람 말 몇 마디 때문에 수포로 돌아가 버렸잖소.”
그 말에 엽균은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 어째서 허서가 향시를 치를 때까지 기다리지 않고 굳이 이때를 고른 걸까. 어머니도 참 이기적이시지. 왜 다른 사람 생각은 조금도 하시지 않는 걸까?’
“부인은 후부의 정실이시잖아요. 전 그저… 외실이고요! 전 시골에서 태어난 촌사람이자 빈곤한 백성이었어요. 그리고 과부에 불과하죠. 아무것도 없는 과부요. 그러니 저와 허서가 부인을 위해 희생하는 건… 대수롭지 않은 일이에요.”
은정랑은 쓴웃음을 짓더니 원치 않는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엽균은 그녀의 ‘진실된’ 표정을 보고는 또 큰 충격을 받았다. 누가 저들을 빈곤한 백성으로 살게 했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사람으로 만들었는가? 권세와 지위가 있는 자들의 횡포와 모욕을 참아 가며 이렇게 구차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단 말인가?
엽균이 의분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정랑, 무슨 그런 터무니없는 소리를 해요! 고귀한 후부의 안주인과 가난한 시골 처자라고요? 누가 누구보다 고귀한 사람이라는 거예요? 나도 후부의 적자이기는 하나 난 모든 사람에겐 그들을 낳아 주고 길러 준 부모가 있다고 생각해요. 비천한 일반 백성이라고 후부의 고귀한 사람을 위해 희생해야 한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않아요?”
그렇게 말하고 나니 엽균은 감정이 격양됐다. 자신은 생각이 깨어 있는 사람이었다. 모든 사람들을 앞서나가는, 남들과는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 말이다.
자신도 고귀한 신분인 후부의 적자이기는 했지만 단 한 번도 평범하고 가난한 백성들을 업신여긴 적이 없었다. 자신은 자신보다 밑에 있는 백성들을 짓밟으며 즐거워하고 백성들의 목숨을 지푸라기처럼 하찮게 여기는 부잣집 공자들과는 달랐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는 스스로 고결한 인품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균이 공자, 어서 어머니를 보러 가세요…….”
은정랑이 조심스럽게 그를 설득했다.
“어서 가 보거라.”
엽승덕도 무덤덤한 눈빛으로 그를 쓱 쳐다보며 말했다.
“안 그러면 우리가 널 꾀어서 붙잡아 두고 못 가게 했다고 할 게다. 진 마마, 가서 물 좀 가져와 이곳을 닦으시게.”
엽승덕은 진 마마에게 서둘러 집안을 정리하도록 지시했다. 마음에 찔리는 기색은 조금도 보이지 않고 아주 당당해 보였다.
“아, 그리고 균이 공자님, 앞으로는 이곳에 오지 마셔요. 집에서 부인께 효도를 다하세요. 얼른 가셔요!”
은정랑은 연신 그를 재촉했다. 엽균은 눈시울이 붉어지더니 초라한 모습으로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뒤에서 영존거의 대문이 덜컥 소리를 내며 닫히더니 빗장을 단단히 걸어 잠그는 소리가 들렸다. 엽균은 돌아서서 영존거를 바라보더니 평온하고 아늑했던 예전 모습을 떠올렸다.
어째서 이런 사달이 나고 만 것일까. 그는 코를 훌쩍이며 발걸음을 멈추고는 단단히 잠긴 대문을 바라봤다. 가슴이 너무도 아프고 괴로웠다.
이곳만이 그에게 집이라는 느낌을 주었다. 아버지는 자애롭고 관대하며 정랑은 온화하고 이해심이 깊었으며 허서는 똑똑하고 공부를 좋아하는 아이였다. 그는 이곳에서 자유를 느꼈고 이곳에서는 편안함과 화목한 분위기만 느껴졌다.
정안후부는 어떤가. 할아버지는 늘 깐깐한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그리고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온종일 공부하라고 잔소리만 해댔다. 자신을 위해 하는 소리인 건 알지만 그들은 이쪽의 이상과 포부를 이해하지 못했다.
어머니와 누이동생은 그저 맹목적으로 공명과 관록官祿만 추구했고, 우매하고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을 갖고 있었다. 정랑처럼 식견이 있고 남의 마음을 잘 헤아리지 못했다. 그에게 집은 차갑고 불편한 곳이었고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이곳뿐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 유일한 안식처마저 사라진 것이다.
* * *
백초의관百草醫官은 도성 중심에 위치한 평범한 의관이었고 의원의 의술도 그렇게 뛰어난 편이 아니었다. 하여 평소 이곳에 드나드는 환자들은 모두 평범한 백성이었다.
이때, 갑자기 먼 곳에서 몇 사람이 달려오는 모습이 보였는데, 하나같이 화려한 비단옷을 입고 있었다. 안에 앉아 있던 의원은 깜짝 놀라 벌떡 일어서더니 앞으로 다가가 그들을 맞이했다.
“아이고, 이런…….”
의원은 나이 든 여인이 아름다운 귀부인을 업고 있는 모습을 보더니 얼른 그녀에게 물었다.
“어찌 된 겁니까? 어서 안으로 들어오세요.”
의원은 환자가 귀부인임을 알아채고는 극진한 태도로 그들을 대했다. 그는 의관 뒤뜰에 위치한 단독 병실로 사람들을 데려갔다.
백초의관 앞쪽은 환자를 맞이하는 공간이었고 뒤쪽에는 널찍한 뒤뜰이 있었다. 본채는 의원이 생활하는 공간이었고 본채 양쪽으론 각각 세 칸짜리 곁채가 있었는데, 그중 동쪽 곁채는 병실로 사용해 환자들이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병실이라고는 하지만 백초의관은 평범한 백성들을 대상으로 운영하는 곳이라 병실에서 여러 날 지내는 환자가 극히 드물어 내부는 아주 깨끗했고 보통 집안의 곁채와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채 마마가 온씨를 내려놓자 의원이 맥을 짚더니 이렇게 말했다.
“분노가 극에 달해 기혈이 막혀 의식이 혼미해지면서 각혈을 한 겁니다. 큰 문제는 아니나 푹 쉬어야 하고 최대한 화를 내지 마셔야 합니다. 우선 정신을 안정시키고 허한 기를 다스리는 약을 써서 기혈을 풀어 주도록 하죠.”
엽연채와 다른 사람들은 그 말을 듣더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생각했던 것만큼 심각하지 않아 정말 다행이었다.
“마님이 언제 깨어나실까요?”
추길이 눈시울을 붉히며 물었다.
“지금 침을 놓거나 코담배를 피우면 바로 정신을 차리실 겁니다. 그러나 주무시면서 푹 쉬는 게 더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푹 쉬시게 놔두죠!”
이리 대꾸한 엽연채는 문득 이곳이 송화 골목 바로 옆 골목에 있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온씨가 정신이 들면 또다시 화를 낼까 봐 걱정이 됐다.
“어머니를 집으로 모셔가도 될까요?”
그러자 의원이 말했다.
“그럼요. 살살 움직이면 됩니다. 가서 처방약을 가져오겠습니다. 하나는 달여먹는 약이고 다른 하나는 인삼양영환人蔘養榮丸입니다. 우선 인삼양영환을 드시게 한 뒤 집으로 모셔가시죠. 약 가지러 갈 사람을 보내 주시고요!”
“알겠어요. 감사합니다, 의원님.”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채 마마에게 일렀다.
“마마, 마마가 가서 약을 가져와요.”
“예.”
채 마마가 의원을 따라가자 추길도 그들을 따라 밖으로 나갔다. 엽영교는 그래도 마음이 안 놓였는지 이리 당부했다.
“조금 있다가 집에 도착하면 태의太醫를 부르자. 그래야 확실하지.”
“네, 고모.”
기분이 축 가라앉은 엽연채는 침상 곁에 앉아 손수건으로 온씨의 식은땀을 닦아 주었다.
잠시 후, 추길이 인삼양영환을 가지고 돌아왔다. 엽연채는 온씨를 자신의 품에 기대게 했고 추길은 환약을 청자기 그릇에 넣고 물에 녹인 후 엽연채에게 건넸다. 엽연채는 환약을 녹인 물을 조금씩 온씨의 입으로 넣어 주었다.
“이런 잡놈을 봤나! 여기 몰래 숨어서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것이냐?”
갑자기 밖에서 채 마마의 서릿발 같은 호통이 들려왔다. 그 소리에 엽연채와 엽영교는 어리둥절했다.
엽영교가 고개를 돌려 옥패를 쳐다보며 말했다.
“새언니를 잘 돌봐드리고 있거라.”
“예.”
옥패가 얼른 다가오더니 그녀를 도와 온씨를 침상에 눕혔다.
엽연채와 엽영교가 곁채를 나서 대청으로 가자 채 마마가 열여덟 살쯤 먹어 보이는 검은 모자를 쓴 뚱뚱한 시동을 붙잡고 있었다. 이 사람은 바로 엽균의 시동인 추풍이었다.
“마마, 무슨 일이에요?”
엽연채가 물었다.
“의원님이 약을 조제하시는 동안 기다리고 있는데, 글쎄 이놈이 문밖에 숨어서 슬그머니 엿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붙잡아 놨습니다.”
채 마마가 어두운 표정으로 말하며 추풍을 땅바닥으로 확 밀쳐 버렸다.
“네 상전은 왜 안 보이느냐? 어? 의관에 계신 친어머니가 생사를 예견하기 어려운 지경인데 네 상전은 와보지도 않고 달랑 시동 하나를 보내 몰래 숨어서 엿보게 한다는 말이냐?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이냐!”
의관에 있던 환자와 문밖에서 지나가던 백성들이 채 마마의 호통소리를 듣고 하나둘씩 모여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