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104화 (104/858)

제104화

그 말에 은정랑과 허서는 말문이 막혔다. 특히 허서는 엽연채를 독살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저를 비웃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외실의 아들이나 어머니를 따라 정안후부에 들어가는 의붓아들이나 뭐가 다르단 말인가? 어느 쪽이든 똑같다면 가장 좋은 것을 얻어야 했다. 기왕 참은 김에 원하던 것을 얻는 순간까지 좀 더 참으면 그만이었다.

“균이 공자…….”

은정랑은 조심스러운 눈빛으로 엽균을 쳐다보더니, 고개를 숙이며 감히 아무 말도 꺼낼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본 온씨의 두 눈에선 불꽃이 튀었다.

‘우리가 언제 자기에게 부당한 대우라도 했단 말인가? 설사 부당한 대우를 받았더라도 자기 아들을 쳐다보면 되지, 왜 내 아들을 쳐다본단 말인가? 내 아들이 자기를 위해 나서 주기를 바라기라도 한다는 말인가? 참 이상한 여인이로구나!’

“여기서 뭣들 하는 것이냐?”

그때 문 입구에서 고함소리가 들려왔다. 엽승덕이 돌아온 것이다. 그는 진녹색 관복도 벗지 않은 채 노기등등한 모습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러자 엽연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어째서 벌써 퇴청했단 말인가?

그녀는 아리따운 두 눈을 가늘게 뜨고는 엽승덕 뒤에서 몸을 낮추고 서 있는 진 마마를 힐끗 쳐다보았다. 순간 진 마마의 눈빛에 순간 비웃음이 어렸다.

‘상황을 전달하러 갔던 거구나!’

그러나 엽연채는 은정랑이 가만히 앉아서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은정랑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정안후부로 들어와 이낭이 되지는 않으리라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지금 이렇게 거듭 강요하는 것도 단지 자신의 우둔한 오라비에게 은정랑은 이낭이 되길 원치 않으며, 정실부인을 쫓아내고 그 자리를 꿰차려는 추악한 야심을 갖고 있다는 걸 똑똑히 보여 주기 위함이었다.

그리고 엽연채의 예상대로 엽균은 정말로 동요하고 있었다.

‘어머니께서 거듭 정안후부로 들어와 이낭이 되라고 말씀하는데도 정랑은 어째서 계속 거절하며 미루기만 하는 걸까?’

그런데 이때 엽승덕이 서둘러 돌아왔던 것이다. 엽승덕이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은정랑을 확 잡아끌어 자신의 뒤에 세운 뒤 온씨를 매섭게 노려보았다.

“이 지독한 것들. 이렇게 집으로 찾아와서 정랑에게 정안후부로 들어와 이낭이 되라고 강요하는 것이냐?”

온씨는 은정랑은 보호하며 자신에게는 손가락질하며 책망하는 그의 모습을 보더니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게 무슨 말입니까? 제가 언제 저자에게 정안후부로 들어와 이낭이 되라고 강요했다는 말입니까? 그럼 나리는 저자가 저보다 아래 신분인 이낭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제 자리를 저자에게 내줘야 한다는 겁니까?”

엽승덕은 어두운 얼굴로 반박했다.

“함부로 중상모략하지 마시오. 당신이 정랑 모자를 속여 정안후부로 들인 다음 핍박하려는 속셈인 걸 내가 모를 줄 아시오! 그게 아니고 정말 정랑을 위해서라면 왜 계속해서 강요하는 것이오? 허서가 시험 준비를 하고 있으니 향시를 치른 후 들어가겠다고 이미 말했는데 왜 꼭 요 며칠을 고집하는 것이오!”

“네?”

엽균은 깜짝 놀란 표정을 하고는 온씨 일행을 쳐다봤다.

“큰오라버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우린 스물닷새가 어머니의 생신이라 저들이 정안후부에 들어오면 함께 화기애애하게 생신 축하연을 즐길 수 있겠거니 생각했을 뿐이에요.”

보다 못한 엽영교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앞으로 나섰다.

“화기애애?”

엽승덕은 냉소를 짓더니 엽영교에게 삿대질을 해댔다.

“우리 집안에서 제일 음흉한 사람이 바로 너다. 하루가 멀다 하고 아버지 어머니께 고자질과 이간질을 하며 두 분을 부추겨 문제를 일으키지 않느냐!”

그 말을 들은 엽영교는 화가 나 온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지금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지금 안 했다고 발뺌하는 게냐?”

엽승덕이 픽 냉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지난번에 이채에게 혼수를 빌려 주고자 했을 때도 네가 부모님과 나를 이간질하지 않았더냐? 그게 아니면 어째서 정랑에게 불똥이 튀었다는 말이냐?”

엽승덕은 그렇게 쏘아붙이더니 이번에는 엽연채에게 삿대질을 하며 말했다.

“우리 집안에서 가장 악랄한 사람은 바로 너다! 매일같이 못된 짓을 일삼으며 말썽을 일으키고 사실을 왜곡하는데 모든 게 다 네가 앞장서서 벌인 일이 아니더냐. 오늘 일도 분명 네가 부추긴 거겠지!”

“연채가 부추긴 거면 뭐 어떻다고요?”

온씨가 앞으로 다가서더니 매서운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제가 오늘 뭘 잘못했는데요? 당신이 저 여인을 사모한다니까 내가 정안후부로 들이겠다는 거잖아요! 그리고 적당한 신분을 부여해 세상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살라는 건데 그게 뭐 잘못됐어요?”

온씨는 그렇게 말하며 눈물을 뚝뚝 떨어뜨렸다. 그녀는 정랑을 보호하려고 안달이 난 그의 사나운 태도와 못마땅한 눈빛을 보더니 두 눈에 핏발을 세우며 울음 섞인 목소리로 울분을 쏟아냈다.

“알아요! 다 안다고요! 저 여인이 나에게 첩으로서 예를 올리는 걸 보고 싶지 않은 거겠죠! 나에게 차를 올리는 꼴도 보기 싫은 거고요! 내가 저 여인보다 위에 있는 게 싫은 거겠죠!”

마지막 말을 뱉고 나니 그녀는 목이 쉬고 힘도 다 빠져버렸다.

“엽승덕! 내가 그 정도를 받을 자격도 없어요? 난 당신의 정실부인이에요! 난 삼서육례三書六禮(육례란 격식을 갖춘 전통 혼례 과정을, 삼서란 육례에 사용된 문서를 뜻함)를 따랐고, 중매인을 통해 정식으로 맞이한 당신의 아내예요. 팔인교八人轎(여덟 명이 메는 큰 가마)를 타고 당당히 정안후부로 들어온 당신의 아내라고요!”

그 말에 엽승덕의 얼굴이 확 굳어졌다. 자신이 가장 한스러운 것이 바로 중매인을 통해 엉뚱한 여인을 본부인으로 맞이한 것이었다.

“부모님 뜻과 중매인의…….”

“부모님 뜻이라는 말 같지 않은 핑계는 대지도 말아요!”

말허리를 자른 온씨는 하하하며 냉소를 날렸다.

“부모님 뜻과 중매인의 말에 따른 것이라 하더라도 혼인 전에 우리는 서로를 봤어요. 모두가 만족하여 성사된 혼인이었죠. 3년가량 삼서육례를 따라 과정을 밟았고, 당신은 혼인 전 명절이 있을 때마다 내게 선물을 보내 왔어요.

매년 칠석에는 같이 연등회를 구경하고 원소절原宵節(정월 대보름날) 밤에는 등롱燈籠을 강물에 떠내려 보냈죠. 함께 시간을 보낼 땐 아주 즐거워하지 않았나요? 내가 마음에 안 들고 싫었으면 그때 혼인을 물릴 수 있었어요!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부모님 뜻과 중매인 말에 따랐을 뿐이라고 핑계를 대요! 왜 이제 와서 다른 여인 손을 붙잡고선 정실부인으로서 마땅히 누려야 할 내 존엄도 지켜 주지 않는 거예요! 난 다른 건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그런데 당신은 이 존엄조차도 지켜 주지 않는 건가요?”

엽연채는 목이 쉬고 힘이 다 빠진 온씨의 목소리를 들으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닐까, 오늘 오지 말았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녀는 자신의 선택이 후회스러워 숨이 다 막히는 듯했다.

온씨의 말을 들은 엽승덕의 낯빛은 보기 흉할 정도로 창백해졌다. 칠석에 같이 연등회를 구경하고 원소절 밤에는 등롱을 강물에 떠내려 보냈다는 이런 이야기를 이제 와 꺼내는 이유가 뭔가? 자신이 다른 여인과 사이가 좋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정랑의 기분이 얼마나 나쁘겠는가.

엽승덕은 싸늘한 목소리로 부정했다.

“그땐 어리고 무지해서 사랑이 뭔지 몰랐소. 이제야 진정한 사랑이 뭔지 알게 되었고, 평생토록 사랑할 사람을 만나게 되었소. 그땐 눈이 삐었던 게지!”

“지금 눈이 삐었다고 했어요? 눈이 삐어?”

온씨는 차갑게 헛웃음을 지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녀는 이내 ‘캑’ 소리를 내며 각혈을 하더니 뒤로 쓰러져 버렸다.

“어머니!”

엽연채는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더니 달려가 온씨를 부축했다.

“새언니! 새언니!”

엽영교도 얼른 곁으로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마님!”

채 마마와 추길 등 다른 하인들도 깜짝 놀라 그녀 곁으로 모여들었고 엽균은 놀란 나머지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어머니…….”

어째서 말다툼이 벌어진 걸까. 어째서 이렇게 되어 버린 걸까!

“균, 균이 공자…….”

은정랑은 엽승덕 뒤에 서서 덜덜 떨고 있었다. 깜짝 놀란 그녀는 걱정스러우면서도 미안함이 가득 묻어나는 작은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그러나 엽균은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고, 들은 건 엽승덕이었다. 가슴이 철렁한 그는 엽균을 염려했던지 얼른 성이 난 목소리로 말했다.

“홧김에 몇 마디 했다고 저 꼴이 되다니! 저런 도량으로 정랑을 데리고 들어가겠다고? 어서 데리고 나가지 않고 뭐 하느냐? 가서 의원을 부르거라!”

“우리 마님도 간통이나 하는 이런 더러운 곳에 더는 머물고 싶지 않으실 걸요!”

추길이 핏발이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대거리했다.

“이……!”

그 말에 엽승덕의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 추길은 엽승덕이 그러든 말든 신경 쓰지 않고 엽연채를 쳐다보며 말했다.

“아가씨, 근처에 의관醫官이 있습니다. 우선 마님을 그곳으로 모시죠.”

“그래.”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자마자 채 마마는 온씨를 번쩍 들어 등에 업더니 황급히 밖으로 나갔다. 엽영교와 추길, 여종들도 채 마마를 따라 후다닥 밖으로 뛰쳐나갔고, 엽연채는 그들을 쫓아가다가 고개를 돌리더니 스산한 눈빛으로 서차간을 쳐다봤다.

‘감히 어머니를 저 지경으로 만들다니. 거기다 어머니의 물건을 가져다 외실에게 바쳐? 인간말짜 같으니라고. 어디 제 명에 살다 가나 보자!’

엽연채는 이내 온씨 일행을 쫓아 문밖으로 나갔고, 이 상황이 너무 혼란스러운 엽균도 그들의 뒤를 쫓아갔다. 엽연채가 대문을 나서려 하자 엽균이 그녀를 붙잡으며 말했다.

“연채야, 어머니는…….”

그러자 엽연채가 돌아서더니 한기가 느껴지는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

“봤죠? 저 사람들이 어떻게 어머니를 몰아세우는지요! 엽승덕이 한 말 다 들었죠? 저자의 마음속에는 어머니의 자리는 눈곱만큼도 없어요! 그 외실밖에 없다고요! 좋은 건 전부 그 여인 앞에 갖다 바칠 거예요! 그런데도 저 외실을 보호할 거예요?”

말을 마친 엽연채는 그의 손을 확 뿌리치고는 온씨 일행을 쫓아갔다.

엽균은 뜰 입구에서 완전히 넋이 나간 모습으로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대체 무엇을 잘못할 걸까. 자신은 그저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려던 것뿐이었다. 그리고 모두가 화기애애하게 지내길 바랐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어머니가 이 꼴이 되어 버린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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