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3화
그녀가 엽승덕을 만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이 이야기를 들었으면 분명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다고 수긍했을 것이다. 엽승덕이 망설여도 자신이 그를 설득해 정안후부로 들어가 이낭이 되겠다고 말했을 것이다. 당시는 자신 같은 사람은 후부의 이낭만 되어도 더없이 과분한 복을 누리는 셈이라고 생각하던 때였으니까.
하지만 이곳에서 무려 6년 동안 주인마님으로 살며 엽승덕의 총애를 독차지했고, 그는 그녀에게 더 많은 것을 줄 거라고 약속까지 했다. 그러니 당연히 더 좋은 것을 얻을 수 있었다. 정실부인이 될 기회가 있는데 뭣 하러 이낭이 되려 하겠는가? 아들에게도 적자가 될 기회가 온 것이었다. 그렇게 되면 후부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텐데 어째서 서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인가?
“차 드세요.”
이때 허서가 앞으로 다가서며 온씨가 만든 좋은 분위기를 흐려 놓았다. 그러고 나서 점잖은 미소를 지으며 찻잔을 하나씩 사람들 앞에 내려놓았다.
“고마워요.”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짓더니 시선을 살짝 위로 하여 그를 힐끗 쳐다보았다. 허서는 그런 그녀를 쳐다보며 더없이 아름다운 여인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이어지는 그녀의 말은 그 아름다움을 흔적도 없이 사라지게 만들었다.
엽연채는 기쁜 표정으로 엽균의 옷소매를 당기며 말했다.
“오라버니, 정랑과 허 공자를 데리고 함께 집으로 돌아가요.”
“그래! 그러자꾸나!”
엽균은 흥분한 표정으로 동조했다.
“말 나온 김에 지금 당장 가자꾸나! 이곳에 정랑과 허서가 없는 걸 아버지가 보시면 분명 기절초풍하시겠지. 그런데 집에 갔더니 정랑과 허서가 있는 걸 보시면 기뻐서 춤이라도 덩실덩실 추실걸!”
엽연채는 찻잔을 들고 이보다 더 유쾌할 수는 없다는 듯 깔깔거리며 웃었다.
‘열불이 터지겠지!’
엽균의 말을 들은 은정랑과 허서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정랑, 정랑?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엽균은 그녀에게 답변을 재촉했다. 그는 정랑과 허서를 집으로 데려가 두 사람에게 완벽한 가정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어… 그게…….”
은정랑은 어떻게 둘러대야 할지 한창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그러고 나서 변명거리를 찾아냈는지 미안해하는 얼굴로 엽균을 쳐다보더니 온씨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부인, 이렇게 신경 써 주시고 배려해 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허서가 지금 팔월에 있을 향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두 달 정도 남았는데 갑자기 환경이 바뀌면 공부에 영향을 줄까 염려가 됩니다. 그래서 지금은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부인의 깊은 배려와 관심은 일단 마음으로만 받겠습니다. 향시가 끝나면 다시 이야기하시죠.”
엽연채는 속으로 비웃음을 날렸다. 그녀의 대답 속에 후부로 들어가 이낭이 되겠다는 말은 단 한 마디도 들어 있지 않았다.
온씨와 채 마마도 정랑의 대꾸를 듣고는 미간을 찌푸렸고 ‘과거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아들이 있다는 게 이리 대단한 거구나.’라는 생각에 씁쓸하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대단해 봤자 엽씨 가문 핏줄이 아니니, 엽균이 가진 것을 빼앗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 온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에이, 그게 뭐 대수라고요.”
단오절에 엽승덕이 저 핑계로 이편의 입을 틀어막았기에 엽연채는 이미 대비책을 생각해 두었다.
“그럼 집을 옮기는 건 잠시 미뤄 두죠! 그래도 신분은 가급적 빨리 부여해야죠.”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어제 어머니께서 어서 정랑과 허서를 정안후부에 들이고 싶어 책력을 펼쳐 보셨어요. 오늘이 유월 스물이틀이고 유월 스물닷새가 할머니 생신이에요. 그리고 유월 스물나흘, 그러니까 모레가 길일이더라고요. 그날을 혼례식 날짜로 정한 사람들이 많다고 해요! 그러니 그날 정랑과 허 공자가 정안후부로 들어와 집안사람들에게 예를 올리며 의식을 치르도록 하죠. 음……. 정랑, 허 공자와 함께 소분교小粉轎를 타고 들어올 건가요?”
그 말에 정랑과 허서의 안색이 급속도로 어두워졌고 온씨와 채 마마는 ‘큭’ 소리를 내더니 웃음을 참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엽영교는 그만 피식 웃었다. 조그만 입을 손으로 눌렀으나 들썩이는 어깨는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보통 첩을 들일 때 남편 집안에서 첩에게 신경을 써 줄 경우 소분교를 보냈다. 아이가 있는 몸으로 첩살이를 하러 들어올 때는 그 아이도 함께 소분교를 타고 들어와야 했다. 그리함으로써 가정의 새로운 일원이 되었다는 걸 증명했다.
하지만 은정랑은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여인이라 소분교를 타면 도리어 체면이 깎일 뿐이었다. 더군다나 허서는 성인이었다. 그것도 재능 있는 젊은 서생이,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겠다는 포부를 품은 사내대장부가 어찌 소분교를 타고 들어간다는 말인가. 그리되면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살 수 있겠는가? 나중에 정말 관리가 된다 하더라도 그 일로 사람들의 입에 매번 오르내릴 것이었다.
“소, 소분교는 타면 안 되지!”
엽균도 그 정도는 생각할 줄 아는지라 소분교 이야기를 딱 잘랐다. 허서는 앞으로 관리가 될 몸인데 어떻게 소분교를 타고 들어오면 체면이 깎일 터였다.
“그럼 의식을 간소화하자는 이야기인 거죠?”
그렇게 말하며 엽연채는 엽균을 쳐다봤다.
‘우리가 이 모자에게 야박하게 구는 것이 아니라 이 모자가 원치 않는 거예요.’
“그래……. 간소하게 치르는 게 좋지! 정랑이 사치스러운 걸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고 말이야. 늘 검소하고 소박하게 살아 왔거든. 웃어른께 차를 올리는 예식 정도면 충분해!”
“네.”
엽균의 말에 엽연채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뭐 크게 준비할 것도 없고 두 사람만 오면 되는 거네요. 정랑, 모레 새 옷으로 갈아입고 치장한 다음 정안후부로 와요. 와서 우리 어머니께 먼저 머리를 조아리고, 차를 올리며 절을 올린 다음, 조부모님께 차를 올리고 절을 올려요. 그러고 나서 아버지의 두 이낭에게도 절을 올리고요. 그리하면 정랑은 우리 아버지의 이낭이 되는 거고 의식은 그렇게 끝나는 거죠!”
은정랑과 허서는 엽연채가 머리를 조아리고 차를 올리고 절을 올리고 따위를 언급할 때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이보다 더한 굴욕은 없으리라. 그들은 이미 이곳에서 마님과 도련님으로 사는 데에 익숙해진 후였다. 그러니 다른 사람에게 억압당하며 살고 싶은 마음이 들겠는가.
게다가 그들 위에 있을 사람은 온씨 하나가 아니었다. 이낭이 두 명이나 더 있었다. 은정랑이 정안후부에 들어가면 가장 낮은 신분이 되는 것이다. 심지어 은정랑은 나이가 두 이낭보다 더 많은데 그럼 얼마나 난처하고 거북하겠는가.
은정랑은 굴욕감에 치를 떨며 탁자 아래에 놓인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허서 또한 음험한 눈빛을 내비치고 있었다. 저들은 하나같이 악독한 사람들이었다.
“그게…….”
은정랑은 고민스러움과 미안함이 뒤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렇게 복잡하게 하실 필요 없어요. 당장 거처를 옮길 게 아니니 허서가 향시를 치른 후에 다시 이야기하시죠.”
그 말을 들은 온씨는 기분이 좀 언짢았다. 이편에서 정안후부로 들어오라고 거듭 이야기하는데도 또 거절한단 말인가? 도대체 뭘 하고 싶은 걸까? 설마 내 자리를 내주기라도 하라는 말인가?
“그러면 안 되죠.”
이때 엽영교가 나비와 난초 문양이 들어간 비단 둥글부채를 가볍게 흔들며 끼어들었다.
“곧 우리 어머니 생신이에요. 두 사람이 정안후부에 들어올 생각이 있으니 어서 들어와서 어머니를 기쁘게 해드려요. 모레 들어오면 글피가 어머니 생신이니 어엿한 정안후부 사람으로 어머니의 생신을 축하드릴 수 있죠!”
“맞아요.”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 엽균을 쳐다봤다.
“오라버니 생각은 어때요?”
“맞다. 고모 말씀이 일리가 있어.”
엽균이 찬성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는 정랑과 허서가 하루빨리 정안후부로 들어와 가족의 일원이 되기를 바랐다.
“저도 노부인의 생신을 축하드리고 싶습니다. 하지만 허서의 향시가 얼마 남지 않았고 또 생신을 축하드리러 가면…….”
거기까지 말한 은정랑은 마침내 그럴싸한 핑곗거리를 찾아냈기에 두 눈을 번뜩이며 말했다.
“생신을 축하드리러 가면 분명 사람들이 허서가 누구인지 물어볼 겁니다…….”
은정랑은 차마 허서가 엽승덕의 의붓자식이라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그녀는 말을 하면서 조심스러운 모습으로 엽균을 쳐다봤다. 그러고 나서 입을 살짝 오므리고 이어서 말했다.
“사람들은 단번에 허서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할 겁니다. 그럼 또 얼마나 비웃음을 당할지…….”
그렇게 말하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엽균은 허서 걱정에 괴로워하는 은정랑의 모습을 보자 마음이 아려 왔다. 생각해 보니 이 가련하고 딱한 모자가 생신 축하를 드리러 오면 분명 사람들에게 질문세례를 받을 것이었다.
엽균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온씨에게 이리 말했다.
“어머니, 할머니께서 분명 이해해 주실 거예요. 허서는 지금 과거 시험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요. 그런데 할머니 생신 축하를 드리러 왔다가 손님들이 허서를 보게 되면… 수군거릴 겁니다. 과거 시험을 준비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마음가짐이잖아요. 괜한 소리가 허서의 마음을 흔들어 놓으면… 그럼 좋은 결과를 볼 수 없겠죠.
할머니는 도량이 넓은 분이시니 화내지 않으실 겁니다. 그리고 허서가 과거 시험에 붙으면 할아버지께서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 할아버지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학문을 익히는 사람이니까요!”
‘누가 아니랬나. 얼마나 좋아했으면 네 다리몽둥이를 분질러 집안에서 내쫓았을까!’
엽연채는 눈을 내리깔고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온씨는 엽균이 일장연설을 늘어놓는 모습을 보며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전에 자신이 아들과 이야기를 좀 나누려고만 하면 아들은 질색했는데, 지금은 적극적으로 은정랑 일에 관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치 이곳을 자신의 집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게다가 계속해서 은정랑을 변호하고 있지 않은가, 자신의 아들이 말이다.
‘아들은 내게 힘을 보태 주려고 온 걸까, 아님 은정랑을 돕기 위해 온 걸까?’
“오라버니, 그건 아니죠.”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반론을 꺼냈다.
“지금 허 공자의 신분이 더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지 않을까요? 학문을 익히는 서생의 어머니가 제대로 된 신분도 없이 밖에서 첩살이를 하고 있잖아요. 평판은 중요해요. 이낭과 서자의 신분을 부여받아 떳떳한 게 훨씬 낫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