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2화
원래 엽연채는 엽영교와 동행할 생각이 전연 없었다. 그런데 전날 저녁에 온씨 거처에 잠깐 들른 엽영교가 온씨와 채 마마가 이튿날 아침 송화 골목에 간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두 눈을 반짝이더니 자신도 따라가겠다고 했던 것이다. 온씨는 머릿수가 많을수록 대담해진다고 여겨 선뜻 그녀를 데리고 왔다.
“어…….”
방 안에 있던 은정랑과 허서는 갑자기 사람들이 안으로 우르르 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은정랑은 그들을 보자마자 엽연채 모녀뿐만 아니라 뒤에 선 아가씨가 누군지도 알아보았다. 다들 자신이 나중에 상대하고 어울려 지내야 하는 사람들이라 생각해 엽씨 가문 상전들을 암암리에 관찰했던 것이다.
“무슨 일이에요?”
안색이 살짝 창백해진 허서가 은정랑과 함께 방에서 나왔다. 엽균은 낯빛이 새파랗게 질린 은정랑과 허서를 보고는 그들이 적잖이 놀랐음을 알아챘다. 미안하고 초조해진 그는 얼른 다가가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해 주고 싶었지만, 온씨 앞이라 은정랑 모자와 친근한 모습을 보일 수 없었다.
한편 온씨도 은정랑을 쳐다보고 있었다. 삼십 대로 보이는 이 여인은 둥글고 큰 눈에 오이씨같이 갸름한 얼굴을 가지고 있어 생김새가 꽤 곱상했다. 그러나 온씨는 그녀보다 자신이 더욱 아름답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자신만만해했다. 한데도 남편의 마음을 전부 저 여인이 가로채다니, 이상한 일이었다.
“부인…….”
은정랑은 쭈뼛쭈뼛 앞으로 다가서더니 조그만 몸을 덜덜 떨었다. 놀라서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이었다.
온씨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그 모습을 보자 허탈한 마음이 들었다. 방금 전 문안으로 들어설 때까지 겁에 질려 있던 사람은 바로 자신이었다. 그녀는 상대가 아름답고 여우같은 계집이리라고, 분명 총애를 믿고 오만한 자세로 자신을 쓸모없는 본처라고 깔보고 조롱하리라고 여겼다.
그런데 예상과는 딴판으로 자신이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저렇게 사시나무처럼 떠는 것이다. 이에 온씨는 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좀 전보다도 더 용기와 담력이 붙었다.
엽연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은정랑을 쳐다보았다.
“정랑, 두려워할 것 없어요. 당신에게 따지려고 온 게 아니라 당신을 받아들이려고 온 거예요.”
엽연채는 분명 상냥한 눈빛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건만 은정랑은 왜인지 모르게 계속해서 심장이 두근거렸다. 순간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조차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요! 걱정 말아요, 정랑.”
엽균은 은정랑을 쳐다보며 눈을 깜박거렸다. 엽연채가 그녀를 정랑으로 부르자 그도 따라서 온씨 앞에서 대담하게 그녀를 정랑이라고 불렀다.
은정랑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그들을 들였다.
“부인, 큰아가씨……. 그리고 함께 오신 아가씨께서도 방 안으로 들어가시죠.”
은정랑은 엽영교가 누구인지 모르는 척하면서 그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온씨 일행이 안으로 들어가니 아담한 세 칸짜리 가옥과 가운데에 자리한 소청, 동쪽에 위치한 침실과 서쪽에 위치한 거실 용도인 차간次間이 시야에 들어왔다.
서차간에는 ‘만수萬壽’라는 글자가 새겨진 기다란 이목梨木 침상이 놓여 있었고, 가운데에는 옻칠을 한 자개 탁자가 놓여 있었다. 좌우 하좌에는 옻칠한 권의가, 다층 진열장에는 각종 도자기 병과 분경, 백옥토白玉兔(백옥으로 만든 토끼 모양 장식) 등이 놓여 있었다.
온씨는 진열장에 놓인 물건들을 쳐다보고는 어디서 본 것 같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하지만 어디서 보았는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하기야 이런 장식품들은 대부분 비슷하게 생겼다며 그녀는 그대로 넘어갔다.
하지만 기억력이 좋은 엽연채는 진열된 장식품들을 보고는 구역질이 날 것만 같았다. 어릴 적 그녀는 온씨의 광에 가서 물건들을 구경하길 좋아했다. 그래서 그녀는 이곳의 분경 두 개와 백옥토가 온씨의 혼수품임을 단번에 알아챘다. 엽연채는 속이 부글부글 끓어 올라 숨을 씩씩 몰아쉬었다.
‘엽승덕, 첩을 데리고 살고 싶으면 그렇게 해! 그런데 감히 어머니 혼수품을 저 외실에게 갖다 바쳐? 이 비열한 놈!’
온씨는 아담한 방이지만 그래도 갖출 것은 다 갖추었다고 생각했다. 사치스럽고 화려하진 않아도 하나하나 예쁘고 정교한 걸 보니 적잖이 공을 들였음을 알 수 있었다.
거기까지 생각한 온씨는 속에서 화가 치밀었다. 이 외실이 무슨 능력으로 이런 것들을 수집하고 마련했겠는가. 분명 엽승덕이 마련해 줬을 것이다. 그가 이 여인에게 이리 마음을 쓴다고 생각하자 온씨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아렸다.
“온 부인, 앉으시지요!”
진 마마는 은정랑이 수모를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얼른 앞으로 다가서며 말했다. 이 집에선 은정랑이 안주인이었다. 그러니 하인 된 자로서 어찌 자기 주인이 남에게 비굴하게 굽신거리는 꼴을 눈뜨고 지켜볼 수 있겠는가. 그래서 온씨를 부를 때도 온씨의 성을 붙여 부른 것이었다. 마치 온씨는 은정랑의 상전이 아니라는 듯 말이다.
그러자 엽연채가 배시시 웃더니 온화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진 마마가 수고가 많네. 이제 밖으로 나가 봐요. 정랑이 탕도 끓이고 밥도 할 줄 아니 차도 아주 잘 따르겠지.”
그 말에 진 마마의 표정이 확 굳어졌지만 쪽수에서 밀리는 통에 감히 뭐라고 더 말하지 못하고 조용히 밖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다.
온씨가 상석에 앉으려고 하자 엽연채가 슬며시 그녀를 잡아당겼다. 미리 만나 이곳으로 올 때 엽연채는 온씨에게 너무 서슬 푸른 모습은 보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었다. 하지만 온씨와 채 마마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았다. 이왕 오게 됐으니 상전의 위엄을 보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안주인이 첩실 앞에서 위엄을 보이지 못할 까닭이 뭐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엽연채의 목적은 위세를 부리며 은정랑을 괴롭히는 게 아니라 엽균의 마음을 돌리는 것이었다. 엽균에게 자신들이 은정랑을 받아들이지 않는 게 아니라 은정랑이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원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오자마자 안주인 행세를 하며 은정랑을 괴롭히면 어떻게 되겠는가. 약해 보이는 사람은 가련한 사람이고 그런 사람이 하는 말은 다 옳다고 생각하는 이 어리석은 오라버니는 바로 은정랑의 편에 설 것이었다.
온씨는 엽연채의 뜻에 동의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딸의 말을 잘 듣는 사람이라 상석에 앉기를 포기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하좌의 권의에 앉으면 자신이 상좌에 앉을 수는 없다고 물러서는 듯 보일 것이었다.
“여긴 좀 답답한 거 같아요. 밖에 있는 소청으로 가는 건 어떨까요?”
이때 엽연채가 손수건으로 부채질을 하며 온씨가 난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주었다. 자신의 자리를 온씨에게 빼앗기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던 은정랑은 소청으로 가자는 엽연채의 말을 듣고는 얼른 반기며 그들을 밖으로 안내했다.
“이쪽으로 가시지요.”
그렇게 그들은 소청으로 갔다. 소청에는 홍목으로 만든 자개 장식 원탁이 놓여 있었고 가장자리에 대여섯 개의 둥근 걸상이 놓여 있었다. 그리고 벽 쪽에도 권의 두 개와 조그만 찻상이 있었다. 엽연채 일행은 원탁에 둘러앉았다.
모두 착석했으니 이제 차를 내와야 했다. 한데 진 마마가 밖으로 나갔으니 정랑이 차를 내올 수밖에 없었다. 온씨가 상석에 앉지는 않았지만 그녀의 하인이 정랑에게 차를 내오라고 하면 정랑 역시 하인처럼 비칠 게 뻔했다. 정랑은 영존거에서 지낸 후로 지금처럼 굴욕적인 순간이 없었다.
“제가 차를 내오겠습니다!”
허서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는 미소 띤 얼굴로 점잖고 예의 바른 서생 티를 냈다. 그가 가서 차를 내오면 부인과 이낭이라는 신분 차이가 드러나지 않게 될 터였다.
엽연채는 훼방을 놓지 않았다. 이런 사소한 일로 상대를 난처하게 만들 생각이 없었다. 제대로 한 방을 먹여야 했다. 그래서 여 엽연채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은정랑에게 앉길 권했다.
“정랑, 어서 앉아요.”
온씨는 내키지 않았지만 딸을 따라 입을 열었다.
“정랑, 앉게나!”
“맞아요, 정랑. 어서 앉아요!”
엽균은 누이동생뿐만 아니라 어머니도 은정랑에게 자리를 권하는 모습을 보자 모두 정랑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하고는 기쁜 얼굴로 말했다.
“괜찮아요. 다 한 가족인걸요.”
은정랑은 온씨 모녀에게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것 같다고 생각했지만, 서둘러 온씨의 맞은편에 앉을 뿐이었다.
앉을 사람이 전부 앉자 온씨는 본론에 들어갔다.
“세자야와 벌써 오륙 년을 함께 지냈다지!”
“예. 육 년 정도 되었습니다.”
은정랑은 이 사람들의 목적이 무엇인지 간파하지 못했기에 상황을 봐 가며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오랜 세월 억울했겠구나.”
온씨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억, 억울하기는요.”
은정랑은 안 좋은 예감이 들었다.
“나리도 참. 그 오랜 세월 정랑에게 적당한 신분을 줘야 한다고 집안에 한 번도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으시니, 원.”
이야기를 꺼내자 긴 세월 품어온 모든 집착을 훌훌 털어 내는 것처럼 온씨는 마음이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데려오려면 데려오라지!’
보아하니 은정랑은 불여우과도 아니었고 그렇게 밉살스럽지도 않았다. 그러니 자신도 구태여 은정랑을 괴롭히거나 난처하게 할 필요가 없었다. 엽승덕이 은정랑을 찾아가고 싶다고 하면 가라고 하면 그만이었다.
자신도 그의 총애 따위는 필요 없었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고 딸도 시집을 갔는데 이제 와 총애 다툼은 해서 무엇하겠는가. 채 마마가 말한 것처럼 아들딸만 생각하며 살면 된다. 은정랑이 정안후부에 들어와 본분을 지키며 얌전하게 지내면 그냥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온씨는 더욱 태연한 미소를 지으며 조금 전보다 더 진심 어린 이야기를 꺼냈다.
“그동안 내가 너무 고집스럽게 굴었지. 생각도 꽉 막혔고. 밖에서 데리고 사는 첩이란 다 나쁜 것들이라고 생각했다네. 그런데 이렇게 직접 보니 자네는 내가 생각했던 것만큼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더 이상 밖에서 지내지 말게. 매일 사람들에게 손가락질당하며 이게 무슨 꼴인가? 그래서 내 자네에게 적당한 신분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나와 함께 정안후부로 들어가세. 정안후부에 들어오는 데 필요한 의례를 치르고 나면 자넨 우리 가문 사람이 되는 걸세.”
차를 들고 안으로 들어오던 허서의 눈빛이 어둡게 변했다. 그들이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온 줄이야 진작에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이 정도로 못된 흉계를 품고 왔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어머니에게 정안후부로 들어가 이낭이 되라고 강요하는 것이었다.
온씨의 말을 들은 은정랑도 가슴이 내려앉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눈을 내리깔고 있었는데 순간 눈빛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굴욕감과 불만이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