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1화
그 시각, 정국백부 일상원.
널찍한 홍목 침상 위에 바른 자세로 앉아 있는 진씨는 경직된 얼굴에 어두운 표정을 드리우고 있었다. 백 이낭도 침울한 표정이었는데, 권의에 앉아 주학해를 안고 있는 강심설만은 고소해하는 표정이었다.
“셋째가 정말로 오늘 신양 공주부에 갔단 말이냐?”
진씨가 차가운 목소리로 묻자 하좌에 서 있던 녹지가 이리 답했다.
“예, 확실합니다! 제가 물건을 사러 거리에 나갔다가 우연히 손씨를 모시는 여종을 만났는데, 그 아이가 셋째 마님이 신양 공주부에 가셨다고 이야기해 줬습니다.”
녹지가 마주친 여종은 바로 여설이었다. 엽연채가 정안후부를 떠나려는 찰나에 수화문에서 손씨와 마주쳤고, 그때 손씨가 떠올린 생각이란 바로 진씨에게 고자질을 하는 것이었다.
손씨는 적모인 진씨가 전부터 서자 며느리가 출신도 좋고 혼수도 많이 해온 걸 못마땅하게 생각하는 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 서자 며느리가 신양 공주부에 방문했다는 소리를 들으면 분명 마음이 편치 않을 것이고, 그럼 자연히 엽연채를 못살게 굴 것이라고 생각했다. 설령 못살게 굴지 않더라도 손씨는 손해 볼 게 전혀 없었다.
여설은 본래 시동을 시켜 주씨 가문 문지기에게 이 이야기를 흘리려고 했다. 그런데 정말 우연히 문밖을 나서는 녹지를 봤던 것이다. 여설은 얼른 녹지에게 다가가 엽연채가 신양 공주부에 방문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진씨는 속이 끓었다.
‘어째서 내가 공양을 올리러 갈 때마다 이렇게 기분을 잡치게 만드는 일이 생기는 걸까? 이 정도면 사찰과 원수를 진 게 아닌가. 앞으로는 가지 말든지 해야지!’
“신양 공주부는 왜 간 거라고 하더냐?”
강심설이 물었다.
“셋째 마님께서 얼마 전에 넘어져서 다치지 않으셨습니까? 그래서 다른 사람의 별장에 머물며 몸조리를 하셨는데, 글쎄 그 별장이 알고 보니 신양 공주 마마의 별장이었던 거죠. 셋째 마님은 어제 돌아오셨고 오늘 아침이 밝자마자 외출하셨어요. 감사 인사를 드리러 공주부에 가신 거죠.”
녹지의 설명을 들은 진씨는 가슴이 한층 답답했고 강심설도 질투가 났다. 어째서 좋은 일은 다 엽연채에게만 일어나는 걸까.
단오절이 지난 후 셋째 공자가 갑자기 달려오더니, 엽연채가 교외로 나들이를 갔다가 넘어져서 다쳤는데 근처에 있는 별장에서 호의를 베풀어 머물 수 있게 되었으니 그곳에서 한 달가량 몸조리를 한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 진씨 등은 고소해했다. 엽연채가 어디에서 몸조리를 하든 누가 상관한다는 말인가, 집에만 안 들어오면 되는 것을.
그런데 그곳이 신양 공주의 별장이었을 줄은 몰랐다. 진씨는 한편으론 화가 나고 한편으론 부러웠다.
“마님, 셋째 마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서쪽 측문으로 들어가셨어요!”
밖에서 녹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가자!”
진씨는 일각도 기다리고 싶지 않아, 엽연채를 불러오지 않고 직접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그렇게 진씨와 강심설, 백 이낭은 여종들을 데리고 서슬 푸른 모습으로 서과원을 향해 걸어갔다.
수화문을 지난 엽연채가 청석판이 깔린 길을 따라 서쪽으로 걸어가 궁명헌을 눈앞에 뒀을 때였다. 그런데 문 앞에 다다르기도 전에 진씨 일행이 잰걸음으로 다가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엽연채는 그 모습을 보며 어리둥절해하더니 얼른 그쪽으로 몸을 돌려 인사를 올렸다.
“어머님.”
“신양 공주부에서 돌아오는 길이냐?”
진씨가 굳은 표정으로 다가서며 물었다. 본래도 표정이 근엄한 그녀인데 이렇게 얼굴을 굳히니 한층 쌀쌀맞아 보였다.
“예.”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제 집에 돌아왔는데 어머님과 아가씨들이 사찰에 향을 피우러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오늘 아침 날이 밝자마자 먼저 공주 마마께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갔던 겁니다.”
“신양 공주부에 가는데 왜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같이 가지 않았느냐?”
진씨가 물었다. 그러자 엽연채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어제 돌아왔으니 오늘 아침에 바로 찾아봬야 제 성의가 전달되겠다 싶어서 그랬습니다.”
“너와 안사돈이 나에게 뭐라고 했느냐? 묘서의 혼사에 도움을 준다고 약속하지 않았느냐? 한데 신양 공주부에 방문할 수 있는 좋은 기회에 어째서 부르지 않은 것이야!”
진씨는 화가 나 가쁜 숨을 시근덕댔다. 그러자 엽연채는 어두운 표정으로 대꾸했다.
“저는 공주 마마께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간 겁니다. 감사한 제 마음을 표현하려고요. 알랑거리며 빌붙으러 간 게 아니란 말입니다! 어머님, 설마 정말로 신양 공주부에 가서 큰아가씨의 혼담 이야기를 꺼내기를 바라셨던 건 아니죠?”
“그게 무슨 말이냐?”
진씨는 ‘알랑거리며 빌붙으러’라는 말을 듣고는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며느리가 자신을 그리 낮잡아 보는 것 아닌가!
“네가 묘서를 데리고 밖에 나가 그 아이의 견문을 넓혀 주기를 바란 것이다. 혼담 이야기야 어찌 되든 간에 이 또한 밖에 나가 견문을 넓히는 게 아니더냐? 그리고 공주 마마께서 묘서를 마음에 들어 할지 아닐지 네가 어떻게 아느냐!”
그녀의 억지에 엽연채는 말문이 막혔다.
진씨는 가슴이 콱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고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다음 달 칠월 이레에 묘서를 데리고 다시 공주부에 다녀오거라. 가서 도와주셔서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칠석 선물을 드리고 오너라.”
엽연채는 어이가 없어 죽을 지경이었다. 이게 알랑거리며 빌붙는 게 아니면 또 뭔가! 사실 진씨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공주부에 함께 가지 않은 건 진씨가 자신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할까 봐 걱정되어서 그랬던 것이다! 그럼 공주 마마께서 어떻게 생각하시겠는가? 찰싹 들러붙어 아무리 떼어내려 해도 떨어지지 않는 찰거머리라며 치를 떠실 것 아닌가!
엽연채는 마음을 가라앉히며 허허 웃었다.
“어머님, 공주 마마께서 절 구해 주신 거지 제가 공주 마마를 구해드린 게 아닙니다! 제가 공주 마마의 은혜에 보답해야 하는 거지, 공주 마마께서 제 은혜에 보답해야 하는 게 아니잖습니까! 그런데 지금 제게 그런 일을 하라고 시키시면 이게 어디 은혜에 보답하는 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은혜를 원수로 갚는 거지요!”
이 말에 진씨의 얼굴은 터질 듯 붉게 달아올랐다.
“그게 무슨 망발이냐! 내가 언제 너한테 은혜를 원수로 갚으라고 했느냐!”
“아, 그러셨나요?”
엽연채는 눈썹을 추켜세우며 말을 이었다.
“오늘 공주 마마께서 저에게 앞으로 일이 있으면 인편에 물건을 보내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직접 올 필요 없다고 하셨어요. 저와 왕래를 하고 싶지 않으신 거죠. 그런데 제가 큰아가씨를 데리고 공주 마마를 찾아뵈면 그분을 난처하게 해 드리는 거고, 그럼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게 아니겠습니까? 어머님께서는 정녕 그걸 바라시는 겁니까?”
“이……!”
화가 난 진씨가 명치를 누르며 말했다.
“그럴 리가 있겠느냐!”
“아이고……. 부인께서는 그저 셋째 부인께서 큰아가씨와 함께 공주 마마를 찾아뵙고 감사 인사를 드리길 바라셨던 거예요. 공주 마마께서 찾아오는 걸 원치 않으시니 가지 말아야겠어요. 다 오해였네요.”
보다 못한 백 이낭이 나서서 얼른 상황을 수습했다.
“아, 저도 오해했던 거네요!”
엽연채가 몸을 살짝 낮추며 말했다.
“제가 큰아가씨를 모시고 밖으로 돌아다니겠다고 약속드렸죠. 전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아니에요. 며칠 후면 저희 할머니의 생신 축하연이 있습니다. 어머님, 큰아가씨와 함께 꼭 오셔야 해요.”
낯빛이 새파랗게 질린 진씨는 너무 화가 나서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백 이낭은 그런 진씨를 부축하더니 미소를 지으며 이리 말했다.
“셋째 부인, 피곤하실 텐데 어서 돌아가서 쉬시지요.”
그러고는 진씨의 팔을 잡고 발길을 돌렸다.
일상원으로 돌아온 진씨는 침상에 기대어 화가 나 ‘아이고’ 소리를 연발했고 백 이낭은 곁에서 그런 그녀를 한참이나 다독거렸다.
* * *
궁명헌으로 돌아온 엽연채는 저녁을 먹고 푹 잔 뒤 이튿날 아침이 밝자마자 추길, 혜연과 함께 문밖을 나섰다.
관리들이 타는 붉은색 작은 가마가 송화 골목에 위치한 영존거 대문 앞에 멈춰 섰다. 동지同知(지부知府의 보좌관)의 복식인 녹색 관복을 입은 엽승덕이 영존거에서 걸어 나오더니 가마에 탔다. 그러자 간편한 옷을 입은 건장한 두 가마꾼이 얼른 몸을 일으켜 가마를 메고 걸어갔다.
한편 영존거 안은 평소와 마찬가지로 분주했다. 주방은 가마솥에 닭죽을 끓이고 있었고 찜통에 교자를 찌고 있었다. 그리고 진 마마는 그 옆에 서서 양념을 치고 있었다. 본채에서는 은정랑이 몸치장을 하고 있었고 동쪽 곁채에선 서책을 읽는 또랑또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집 전체에 따스하고 평온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허서는 최근 두 달 동안 서원에 나가지 않았다. 요 선생이 허서가 기초가 완벽히 다져지지는 않았지만 과거 시험을 치를 실력은 되니, 서원에서 수업을 듣지 말고 점심에 자기 집에 와서 일대일 지도를 받으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아침밥을 먹은 후 아들은 다시 서책을 낭독할 준비를 했고, 어머니는 수를 놓을 준비를 마쳤다. 이때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큰공자님께서 또 수업을 빼먹고 오셨나 보네요.”
진 마마가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키더니 밖으로 걸어 나가며 외쳤다.
“나가요!”
대문 앞에 선 진 마마가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을 열자 과연 엽균이 서 있었다. 그녀는 그 모습을 보고는 미소를 지었다.
“아이고, 큰…….”
“쉿!”
엽균은 말하지 말라는 뜻으로 가운뎃손가락을 입술에 대고는 소곤소곤 말했다.
“나랑 모르는 사이인 척해요.”
진 마마는 어리둥절했다. 이건… 또 뭐 하자는 거지?
엽균은 뒤로 돌더니 자신의 뒤에 서 있는 사람들의 기분을 맞추려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연채야, 어머니. 이쪽으로 들어오세요. 제가 문을 열어두었습니다.”
진 마마는 두 사람을 부르는 호칭을 듣고는 깜짝 놀라더니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뭐야. 그쪽 아가씨가 또 온 거야? 거기다 방금 공자님이 또 뭐라고 했지? 어머니? 설마, 정안후부 마님을 말하는 건가?’
엽균이 문턱을 넘어서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소녀가 장미처럼 찬란한 자태를 뽐내며 뒤따라 들어왔고, 그녀의 뒤로 삼십 대로 보이는 아름답고 단정한 부인과 열여섯 정도 되어 보이는 귀엽고 아리따운 소녀가 함께 걸어 들어왔다. 엽연채, 온씨 그리고 엽영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