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00화
엽영교는 우울한 눈빛을 띤 채 창턱에 턱을 괴고 멍하니 앉아 있었다. 엽연채는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창문 밖에 서서 말했다.
“뭐 하고 계세요?”
엽영교는 눈을 아래로 깐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고모가 할 수 없는 일이면 거절하시면 돼요. 방법은 표숙이 직접 찾아야죠. 본래 그분의 일이잖아요. 그런데 왜 고모가 이렇게 고민하게 만들어요.”
엽연채가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러자 엽영교는 가슴이 뜨끔하더니 눈을 들어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네 말이 맞다. 방법은 오라버니 스스로 찾아야지!”
“그러니까요!”
엽연채가 맞장구를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나서는 손에 쥔 연꽃 둥글부채를 살랑살랑 흔들며 자리를 떴다.
엽영교의 거처에서 나온 엽연채와 여종들은 엽균을 보러 가기 위해 바깥뜰로 향했다. 하지만 그의 거처에 도착했을 때 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엽연채가 걸어가며 물었다.
“지금이 몇 시진이지?”
“방금 전 마님 방에서 물시계를 봤을 때 미시未時(오후 1시~3시) 이각이었습니다.”
추길이 답했다.
“이 시간이면 내 어리석은 오라버니께서 어디에 있을 것 같으냐?”
“분명 은정랑의 거처에 있을 겁니다!”
추길이 성난 목소리로 대답하자 엽연채는 콧방귀를 뀌었다.
“잠시 후 그곳에 가서 오라버니를 괴롭혀야겠구나.”
수화문을 넘어서던 엽연채와 여종은 호화스러운 마차 한 대가 멈춰 서는 모습을 보았고, 곧 여설이 손씨를 부축하며 마차에서 내렸다.
“아이고, 연채가 아니냐?”
마차에서 내린 손씨가 미소 띤 얼굴로 거드름을 피우며 걸어오고 있었다.
“난 이채를 보고 오는 일이다. 그 애한테 며칠 후면 할머니 생신이니 까먹으면 안 된다고 알려 주고 왔지. 그건 그렇고 연채 너는 어쩐 일로 왔느냐?”
“몸이 다 나았으니 돌아온 거죠!”
추길이 냉랭한 눈빛으로 그녀를 쏘아보며 주인 대신 대꾸했다. 이에 손씨는 엽영교가 어제 집으로 돌아왔음을 떠올렸다. 엽연채도 어제 함께 돌아왔을 테니 아마 오늘 아침에는 신양 공주부에 방문했을 터였다. 손씨는 냉소를 지으며 물었다.
“오늘 공주 마마께 감사 인사를 드리러 갔느냐?”
“그럼요! 공주 마마께서 저희를 만나 주시고 아가씨에게 산삼도 하사하셨어요.”
추길은 픽 웃으며 자랑하듯 말했다. 반면 혜연은 손씨와 말을 섞는 게 귀찮았다. 말해 봐야 입만 아팠다. 그래서 그녀는 엽연채를 재촉했다.
“아가씨, 늦었으니 이만 가시죠.”
“그래.”
엽연채는 손씨를 쳐다보지도 않고 자신의 마차 쪽으로 걸어갔다. 엽연채와 여종들이 마차에 오르자 경인이 말채찍을 휘둘렀고 마차는 곧바로 덜거덕덜거덕 소리를 내며 밖을 향해 나아갔다.
여설은 주씨 가문 마차가 떠나가는 뒷모습을 보며 콧방귀를 뀌었다.
“정말 운도 좋네요! 공주 마마를 알현하다니.”
“흥, 우리 이채 시댁에서는 곧 태자 측비가 나온다. 그럼 황제의 인척이 되는 거지! 엽연채 따위가 뭐라고. 분명 기를 쓰고 들러붙으니까 공주 마마께서 어쩔 수 없이 한 번 만나 주신 게지. 그거 가지고 뭘 저렇게 으스대는 건지, 원.”
비아냥대던 손씨는 갑자기 무슨 생각을 떠올렸는지 입꼬리를 씨익 올리며 웃었다.
“여설아, 가서 하인들을 좀 데려오너라. 내 시킬 일이 있다.”
여설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 * *
무더운 여름이었지만 송화 골목에 위치한 영존거는 그래도 시원한 편이었다. 동쪽 곁채에선 시험 준비에 여념없는 허서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려왔다. 본채에선 은정랑과 진 마마가 수를 놓고 있었고 엽균은 한쪽에 앉아 실을 나눠 주고 있었다. 모퉁이에는 얼음 분경이 여러 개 놓여 있어, 방 안은 서늘했다. 마당에선 어멈과 어린 여종이 옷을 널고 있었다. 영존거 전체가 편안하고 화목한 분위기였다.
“이것들만 나눠 주시면 돼요.”
은정랑은 미소를 지으며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균이 공자께서는 대장부이시니 여인들이나 하는 이런 일을 하시면 아니 되어요.”
그러자 엽균이 대수롭잖게 대꾸했다.
“이게 뭐 별것이라고요. 심심해서 하는 겁니다.”
“공자께서도 참…….”
은정랑은 살짝 미소를 짓더니 순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엽균은 따뜻한 미소를 지었다. 정랑과 허서는 늘 조심스레 지내야 했고 어쩔 수 없이 사람들의 비위를 맞춰야만 했다. 그러니 자신이 많이 도와주어야 선의가 전달될 수 있을 것이었다.
“가서 수박 좀 가져올게요.”
은정랑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주방으로 걸어갔다. 방 밖으로 나와 주방으로 간 은정랑은 얼음에 담가둔 시원한 수박을 자르며 자기도 모르게 입꼬리가 만족스레 올라갔다.
자신은 본래 농촌 아낙네에 불과했다. 남편이 세상을 떠나자 아들을 데리고 도성으로 와 친척에게 몸을 의탁하려고 했지만, 돈과 지위만 따지는 그치들은 가난한 모자를 모른 척했다.
할 수 없이 먹고살려고 자수 상점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마침 부인에게 자수 용품을 사다 주러 온 후부의 세자 눈에 들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하늘에서 떡이 뚝 떨어진 셈인데 마다할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그녀는 냉큼 엽승덕의 외실이 되었다. 그때부터 먹고 입는 건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고, 아들도 학문을 익힐 수 있게 되었다.
예전 같았으면 정안후부로 들어가 이낭이 되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하며 정실부인에게 굽실거리며 비위를 맞추려고 했을 것이다. 어쨌든 자신은 과부이고 농촌 출신인 데다가 혹도 달고 있지 않은가. 이 중에 하나만 해당돼도 비천한 몸인 셈인데 자신은 심지어 세 가지 모두에 해당됐다.
그런데 엽승덕은 기대한 것보다 자신을 훨씬 사랑했다. 그는 정실부인을 끌어내고 그 자리를 자신에게 주려고 안달이었다. 정실부인이 될 수 있는데 무엇 하러 이낭이 되어 그 수모를 당하겠는가?
사실 은정랑은 멀리서 온씨를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곱고 아리따운 얼굴에 단정한 자태를 갖추어 자신보다 훨씬 아름다웠다. 하지만 고귀한 출신에 빼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어도, 모든 면에서 자신보다 뛰어나도 소용이 없었다. 지금 온씨 남편의 마음은 전부 자신에게 향하고 있었고, 심지어 온씨의 아들조차 자신의 말을 믿고 따랐다.
한마디로 온씨 남편과 그 아들의 마음을 전부 자신이 쥐고 있었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은정랑의 입꼬리는 조금 전보다 더 높이 올라갔다. 그녀는 시원한 수박을 담은 접시를 들고선 문밖으로 나갔다.
“균이 공자, 수박 드세요!”
은정랑이 한편에 놓인 작은 탁자 위에 수박을 내려놓으며 말했다. 그러자 엽균은 그중 제일 빨갛고 신선해 보이는 수박을 은정랑에게 건네며 권했다.
“정랑, 먹어 봐요!”
“공자도 참.”
은정랑은 그의 행동에 고마워했다. 엽균은 이를 드러내고 활짝 웃더니 수박을 서너 조각이나 먹고서는 시원하게 트림을 하고 말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정랑, 내일 또 올게요.”
“그러세요.”
은정랑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배웅했다. 방 밖으로 나온 엽균은 비질을 하고 있던 여종들과 인사를 나눈 후 문을 나섰다.
송화 골목을 걷고 있는데 맞은편 길 어귀에 서 있는 마차 한 대가 눈에 들어왔다. 이내 그 안에서 아리따운 여인이 걸어 나왔다.
“오라버니.”
“연채구나.”
엽균은 어리둥절해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그녀 곁으로 달려갔다.
“여긴 어쩐 일로 온 게냐?”
지난번에 엽연채가 혈옥분경도 내주었기에 엽균의 기대는 점점 더 커져갔다. 누이동생이 은정랑을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는 기대 말이다. 또 동생은 교화가 가능한 아이이니 언젠간 생각을 바로잡을 수 있을 거라고도 믿었다.
“오라버니께 이야기할 게 있어요.”
엽연채는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무슨 일인데?”
“제가 어머니를 설득했더니 정랑을 정안후부에 들이는 것에 동의하셨어요.”
“그게 정말이냐?”
그 말에 엽균은 감격해 마지않았다.
“너한테 방법이 있을 줄 알았어. 그런데 지난번 단오절에 이야기했듯이 들어가더라도 허서가 과거 시험을 본 다음에 들어가야 해.”
“그래요!”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그런데 어머니께서 정랑을 집으로 들이는 일에 동의하시면서 그 일에 관해 정랑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하셨어요. 내일 저와 어머니가 송화 골목으로 올 테니 오라버니도 오세요.”
“당연히 와야지!”
엽균은 기뻐하며 자신의 가슴팍을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아버지가 퇴청退廳하시면 다 함께 가서 화목하게 이야기를 나누자꾸나.”
그러나 엽연채는 두 눈을 살짝 깜빡이며 거절했다.
“아버지에겐 말씀드리지 말아요. 깜짝 선물을 드리는 거죠. 그리고 정랑에게도 말하지 말아요. 내일 그 사람에게도 깜짝 선물을 줄 거예요!”
엽연채는 이렇게 말하며 가느다란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댔다.
“좋은 생각이야!”
엽균은 아주 기뻐하며 하하하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갑자기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한데… 있잖니…….”
“왜요, 오라버니?”
엽연채가 입을 삐죽거리며 물었다.
“그게… 내일 어머니께… 내가 평소에 은정랑 거처에 들른다고는 말하지 말렴……. 이번이 처음인 거다.”
엽균은 퍽 난처한 듯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알겠어요.”
엽연채는 기가 막혀 허허 웃었다. 그의 뺨을 후려갈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쁜 자식! 아들이 돼서 친어머니에겐 살갑게 굴지 않고 첩실에겐 살갑게 구는 게 말이 안 되는 행동이란 건 알긴 아나 보구나! 알면서도 그런 짓을 해?’
“헤헤, 그럼 부탁 좀 할게.”
엽균은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재차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역겨운 표정을 쳐다보고 있자니 엽연채는 또다시 뺨을 냅다 후려갈기고 싶다는 충동이 치밀었지만 꾹꾹 참고 화제를 돌렸다.
“그건 그렇고 제가 얼마 전에 교외로 나들이를 갔다가 넘어져서 다쳤는데 오라버니께서는 얼굴 한번 보러 오지 않으셨죠.”
엽연채가 볼멘소리로 말했다.
“아? 그랬느냐?”
엽균은 어리둥절해하며 머리를 긁적이다가 말했다.
“아, 분명 들었던 것 같구나.”
그러나 엽영교든 온씨든 자신만 보면 붙잡아 놓고 훈계를 늘어놨고 갖가지 구실을 대며 못살게 굴었다. 얼마 전 온씨가 그를 보고는 누이동생이 넘어져 다치는 바람에 교외의 저택에서 몸조리하고 있다고 말했으나 그는 어머니가 또 일을 부풀려 이야기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버지도 별일 아니라며 동생이 교외의 별장에 놀러 갔을 뿐이라고 이야기했다.
“그냥 좀 넘어진 거고, 별장에서 놀며 시간을 보낸 거 아니었어?”
엽균의 태평한 말에 엽연채의 표정이 굳어졌다.
“함께 수학하는 벗과 선약이 있어서 먼저 가 봐야겠구나!”
엽균은 엽연채가 서운함을 드러내자 마음이 영 찜찜해 얼른 핑계를 대며 자리를 뜨려고 했다.
“너도 어서 돌아가 보렴!”
“그럼 먼저 가 볼게요.”
엽연채는 피식 웃으며 마차에 올랐다. 경인이 채찍을 내리치자 말이 ‘히이잉’ 소리를 냈고 이내 마차는 덜거덕덜거덕 소리를 내며 앞으로 나아갔다. 엽균은 흐뭇한 표정으로 뒤에서 손을 흔들었고 마차가 모퉁이를 돌며 모습을 감추자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뒤돌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