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99화 (99/858)

제99화

“안 된다.”

묘씨는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즉시 거절 의사를 밝혔다. 그러고 나서 진지한 표정으로 엽영교를 쳐다보며 강조했다.

“사내는 좀 늦춰져도 상관없지만 여인은 늦춰져서는 안 된다!”

사실 할 말이 더 있었지만 묘씨는 그 말을 차마 입 밖으로 꺼낼 수 없었다. 묘기화는 혼인보다 작곡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단 말인가? 그가 엽영교를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게 명백했다. 그렇다면 더욱더 빨리 혼례식을 올려 묘기화를 꽉 붙잡아야 했다.

조카는 용모와 재능 모두 출중하니 딸에겐 과분한 상대라고 볼 수 있었다. 이렇게 질질 끌다가 나이는 먹을 대로 먹었는데 그가 혼사를 없던 일로 하자고 하면 딸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어쨌든 혼례식 날짜는 바꿀 수 없다.”

묘씨는 냉랭한 얼굴로 쐐기를 박았다. 그러자 엽영교는 발을 동동 구르더니 울면서 밖으로 뛰쳐나갔다.

“이 녀석이!”

화가 난 묘씨는 고개를 돌리더니 엽연채에게 말했다.

“공주 마마를 찾아뵙고 감사 인사는 드렸느냐?”

“방금 전 다녀오는 길입니다.”

“그럼 됐다. 네 어머니를 보러 이만 가 보거라!”

묘씨는 언짢은 기색으로 엽연채를 내보냈고 엽연채는 인사를 올린 후 밖으로 나갔다.

영귀원에 도착하니 채 마마가 귀비탑에 앉아 실로 구럭을 뜨고 있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고 엽연채에게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제 영교 아가씨께서 돌아오셨으니 오늘은 아가씨가 오시겠거니 했답니다. 마님께서 아가씨를 기다리시다가 너무 졸려서 잠깐 눈만 붙이려고 하셨는데 그만 잠이 드셨어요.”

엽연채는 귀비탑 끝에 앉으며 그녀에게 물었다.

“저번에 내가 아버지 행동에 대비해야 한다고 했잖아요. 뭐 눈에 띄는 거라도 있었어요?”

그러자 채 마마가 진지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니요. 없었어요.”

그러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덧붙였다.

“아가씨께서 너무 이것저것 복잡하게 생각하시는 걸지도 몰라요. 어쨌든 큰공자님은 세자야의 친아드님이시잖아요.”

엽연채는 뭐라 더 말하길 포기했다. 도리어 채 마마의 눈에 너무 지나쳐 보일 터였다. 채 마마와 다른 사람들은 직접 겪어 보지 않았으니 엽승덕이 얼마나 음흉하고 악독한 사람인지 상상도 할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연채가 온 것이냐?”

그때 침실 쪽에서 나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렴 너머로 수홍색水紅色(회색빛을 띤 연한 붉은색) 옷을 입은 사람의 형상이 보였다. 온씨가 머리카락이 부스스하게 헝클어진 모습으로 걸어 나왔다.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불렀다.

“어머니, 이리 오세요. 제가 머리를 묶어 드릴게요.”

“그러자꾸나.”

온씨는 작은 거울과 빗을 가져오더니 수돈을 엽연채 곁으로 끌어당겨 그 위에 앉았다. 엽연채는 빗을 들고 천천히 머리를 빗기더니 수운계隨雲髻 머리를 해 주었고 순금 개나리 장식에 백옥을 상감한 꽃 모양 머리 장식을 꽂아 주었다.

온씨는 작은 거울을 들고 자신의 모습을 비춰보더니 흡족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정말 곱구나. 우리 딸 손재주가 아주 뛰어난걸.”

그렇게 말하며 거울을 내려놓더니 엽연채의 손을 꼭 잡았다. 가늘고 부드럽던 조그마한 손이 이렇게 고운 손으로 변해 있었다. 어릴 적에는 그녀의 손에 폭 들어오던 손이었다. 딸이 어릴 땐 그녀가 딸의 머리를 이렇게 묶어 주고는 했는데 이젠 딸이 자신의 머리를 묶어 주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온씨는 가슴이 벅차올랐다.

시간은 참 빨리도 흘렀다. 눈 깜짝할 사이에 딸은 늘씬한 자태를 뽐내는 여인으로 성장했고, 자신은 그만큼 나이를 먹었다. 그리고 온씨는 저도 모르게 젊은 시절 소녀였던 자신의 모습과 혼인 후 금슬 좋던 부부의 모습, 부부 곁에 함께 있던 아들딸의 모습, 그리고 지금은 사이가 틀어져 따로 지내는 부부의 모습을 떠올렸다.

과거를 떠올리자 온씨의 눈은 슬픔으로 가득 찼다. 엽연채는 풀이 죽어 시들시들한 어머니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안타까웠지만, 다른 수가 없었다. 자기 혼자만의 노력으론 충분하지 않은 일도 있었고, 지금이 바로 그런 때였다. 어머니가 함께 노력해 줘야만 했다. 그러니 현재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어머니가 상처를 가장 적게 받도록 하는 것이었다.

“어머니, 제가 생각해 봤는데요…….”

엽연채는 입술을 오므리며 운을 뗐다.

“아버지가 은정랑을 데리고 정안후부로 들어오게 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아요. 내일 저희가 직접 송화 골목에 가서 은정랑에게 이야기해요.”

“지금 뭐라고 했느냐?”

깜짝 놀란 온씨의 낯빛은 새파랗게 질렸고 가슴이 쿵쿵쿵 뛰기 시작했다. 그녀의 머릿속에도 수없이 떠올랐던 생각이었다. 엽승덕이 자신에게 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도 상상해 봤고 그리되면 어떻게 그를 괴롭힐지도 생각해 봤다.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엽승덕이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니 가슴만 답답해지던 차였다.

그런데 딸이 이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다. 딸은 전부터 은정랑을 극도로 혐오했고 그녀가 정안후부로 들어오는 걸 결사반대했다. 그런데 갑자기 자기가 먼저 은정랑을 들이자고 하는 것이다.

이 뜻밖의 제안에 온씨는 고민스러웠다. 사실 그녀는 은정랑과 마주하고 싶지 않았다. 그 여인은 이미 충분히 의기양양해하고 있을 것이었다. 남의 남편을 꾀어내어 정실부인과 집에 있는 두 이낭에겐 눈길도 안 주게 만들었으니까.

그 여인이 들어오게 되면 그 우쭐거리는 꼴을 봐야 하는데, 온씨는 그 모습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리고 엽연채는 온씨가 내심 두려워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때 채 마마가 엽연채의 말에 적극적으로 동의하고 나섰다.

“아가씨께서 생각을 정말 잘하셨습니다. 그 여인이 정안후부에 들어오게 되면 아무리 세자야의 총애를 받고 있다고 하더라도 그저 첩일 뿐입니다. 어디 지금처럼 ‘마님’ 행세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 여인이 들어오면 저희는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저 매일 조석으로 문안 인사를 드리게 하고 차 시중을 들게 하는 것만으로도 못 견뎌 할 겁니다. 노마님께서도 그 여인을 마음에 안 들어 하시니 그 여인이 어떻게 우쭐거릴 수 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온씨는 은정랑이 몸을 낮추고 자신의 비위를 맞춰가며 알랑거릴 모습을 그렸다. 상상만으로도 속이 다 후련해지는 느낌이었다.

“게다가 그 여인이 정안후부에 들어오면 세자야께서 온종일 집을 비우실 까닭도 사라지는 거죠. 그리고 시간이 좀 지나면 마님께서 꽃처럼 어여쁜 통방通房들을 세자야께 붙여 주시는 겁니다. 보송보송한 아이들이 세자야 곁에서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이는데, 세자야께서 마음이 안 동하고 배기시겠습니까?

그리되면 둘 사이에 틈이 생길 거고 그럼 그때부터 조금씩 천천히 이간질을 하면 됩니다. 그리고 그 여인이 총애를 잃으면 아들놈과 함께 내치면 되는 거죠! 호호호!”

채 마마는 말할수록 기쁘고 흥분되는지 음험한 웃음소리를 냈다. 엽연채는 그 모습을 보며 말없이 하늘을 쳐다봤다. 저택 깊숙한 곳에서 일하는 늙은 어멈답게 보통 간악한 게 아니었다.

채 마마의 설득에 마음이 움직인 온씨가 그녀에게 물었다.

“이 방법을… 왜 진작에 말하지 않은 것이냐?”

정말로 은정랑을 내쫓을 수만 있다면 엽승덕의 마음도 다시 가져올 수 있을 것이다.

“전에 집안으로 들이는 편이 더 낫다고 넌지시 말씀드렸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말을 꺼내자마자 큰아가씨께서 안 된다고 말씀하셨어요. 뭣 하러 그 여인을 들이냐고 하셨죠. 차라리 신분을 부여하지 않고 밖에서 지내게 하는 편이 더 낫다고 말씀하셨어요. 마님은 더 말할 것도 없으시고요…….”

채 마마는 쭈뼛쭈뼛하며 엽연채와 온씨를 번갈아 쳐다봤다.

엽연채는 기대를 살짝 품고 있는 듯한 온씨의 얼굴을 보고 가슴이 먹먹해졌다. 채 마마의 계획대로는 절대 되지 않을 것이었다. 애초에 온씨가 바라는 결과를 얻기 위해 세운 계획이 아니니 그의 마음을 다시 가져올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자신이 이 계획을 짠 건 엽승덕과 은정랑의 사이를 이간질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오라비를 그들에게서 끄집어내기 위함이었다. 그러니 정확히는 엽승덕, 은정랑과 오라비의 사이를 이간질하고, 오라비에게 은정랑은 이낭 자리에 만족할 단순한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려 주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은정랑을 정안후부로 들이자는 계획으로 인해 온씨는 엽승덕에게 계속 기대를 품을 것이었다. 엽연채는 온씨가 완전히 단념하지 못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오라버니가 친어머니는 살갑게 대하지 않고 되레 그 첩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받을 충격은 엽승덕이 첩실에게 마음을 전부 줘 버렸을 때보다 훨씬 클 터였다. 전생에 어머니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난 이유 중 하나가 오라버니의 행실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아들딸이 모두 나락으로 떨어졌으니 누구라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이제 엽승덕의 일로 어머니의 기대는 산산이 조각날 것이다. 우선 그 과정에서 마음을 단련하게 한 뒤 오라버니 이야기를 꺼내면 된다.

“그럼 내일 아침 송화 골목에서 가까운 주루인 합덕루合德樓 앞에서 만나기로 해요. 제가 오라버니도 부를게요.”

“뭐? 균이도 부른다고?”

엽연채의 말에 온씨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아들은 종내 집에 붙어 있지도 않고 자신이 불러도 오지 않는 녀석인데 여인들끼리의 불화에 개입하려고 할까?

“아가씨, 공자님을 불러올 수 있으세요?”

반면 채 마마는 기대하는 얼굴로 물었다.

“보장할게요. 불러올 수 있어요!”

엽연채는 하늘을 두고 맹세만 안 했을 뿐 확신에 찬 어조로 말했다.

“그렇게 되면 정말 좋죠! 이런 일에는 모자와 모녀가 한마음으로 행동해야 돼요!”

채 마마가 온씨를 쳐다보며 말을 이었다.

“그럼 큰아가씨뿐만 아니라 큰공자님께서도 마님 곁에서 떡 버티고 계시게 될 것 아닙니까! 사람이 많아지면 힘도 세지는 법이니 그 여인이 무서울 리가 없죠. 만약 그 여인이 마님께 불손한 행동을 하면 큰공자님께서 따귀라도 올려붙이실 겁니다!”

“그래.”

온씨는 고개를 끄덕였으나 엽연채는 채 마마의 말을 듣고 입을 삐죽거렸다.

‘아휴, 그 입 좀 다물 수 없어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인데! 하지만 오라버니가 그럴지 안 그럴지 시험은 해 봐야겠죠!’

“그럼 이만 가 볼게요.”

엽연채는 빙그레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일 진시辰時(오전 7시~9시) 말末*에 송화 골목 부근 합덕루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 한 시진은 2시간, 즉 120분이기에 두頭, 중中, 말末로 나누어 표현할 땐 각각 40분씩을 뜻함.)

엽연채는 그렇게 말하고 방에서 나오더니 엽영교의 거처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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