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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98화 (98/858)

제98화

엽연채 일행은 어리둥절했다. 관례대로라면 공주의 수족이 적당히 상대하다가 보내는 거 아닌가? 어째서 정말로 보자고 하는 걸까? 하지만 깊이 생각할 시간은 허락되지 않았다. 추길과 혜연은 각각 선물로 챙긴 병을 하나씩 들고 엽연채의 뒤를 쫓아 문을 나섰다.

엽연채는 고운 자태로 자갈길을 따라 걸어갔다. 일각쯤 가니 공주가 지내는 처소의 본채와 중앙의 뜰이 시야에 들어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석회벽이 한눈에 들어왔고, 그 안쪽에는 높고 널찍한 방이 여러 칸 있었으며 반죽斑竹(줄기 겉에 흑색의 아롱진 무늬가 있는 것이 특징인 대나무)이 빽빽이 늘어서 있었다.

수화문 안쪽으론 동쪽 곁채와 서쪽 곁채를 따라 본채까지 이어지는 낭하가 보였다. 엽연채 일행이 아죽을 따라 걸음을 옮기니 화려한 수화문 두 개가 서 있었고 그 너머로 세 칸짜리 커다란 본채가 보였다. 비첨飛檐의 모서리 부분은 하늘 높이 솟아 있었고 유리 유약을 발라서 구운 오지기와(잿물을 덮어서 질흙으로 구워 만든 기와)는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부인, 이쪽입니다.”

본채 앞에 다다른 아죽이 상서로운 기운을 내뿜는 영수靈獸가 수놓인 비단 문발을 걷어 올렸다. 엽연채 일행은 앞으로 걸어가 문발 안쪽으로 먼저 들어섰다. 아죽도 안으로 들어오자 일행은 다시 그녀의 뒤를 쫓아 걸어갔다.

아죽이 동차간 주렴 밑에 멈춰 서자 엽연채도 그녀를 따라 걸음을 멈추었다. 이윽고 아죽이 안으로 들어가더니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예를 올렸다.

“공주 마마, 태자비 마마. 주씨 가문 셋째 부인이 오셨습니다.”

찻잔을 들던 신양 공주와 태자비는 그 소리를 듣고는 순간 멈칫하더니 이내 찻잔을 내려놓았다.

신양 공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안으로 들여라!”

“부인, 안으로 드시지요.”

주렴이 걷히자 두 사람 눈에는 얼핏 봐도 대단히 아름다워 보이는 소녀가 천천히 들어오는 모습이 담겼다. 순간 방 안에 불이 번쩍 켜지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소녀가 걸친 암홍색 비단 치마는 아름답고 멋스러운 자태를 뽐냈다. 허리춤에는 벽옥 보금步禁(고대 장신구의 일종으로 치마를 누르는 데 사용됨)이 돋보였다. 또 머리에 꽂은 붉은빛을 띠는 노란색 화승華勝의 술이 살랑살랑 흔들리고 있었는데 칠흑같이 검은 머리카락에 꽂혀 있으니 더욱 화려하고 기품 있어 보였다.

앞으로 다가온 소녀는 다소곳이 인사를 올리며 부드럽고 아리따운 목소리로 말했다.

“소인은 엽연채라고 하옵니다. 공주 마마와 태자비 마마를 뵈옵니다.”

신양 공주와 태자비는 엽연채가 풍기는 분위기에 놀라워했다.

“일어나시게.”

태자비가 예를 면하게 해 주자 엽연채는 그제야 몸을 펴며 고개를 살짝 들었다. 그러자 신양 공주와 태자비는 깜짝 놀라 숨을 헉하고 들이켰다. 소녀는 예의 바르게 눈을 아래로 깔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 놀랄 만한 미모가 가려지는 건 아니었다.

엽연채의 얼굴에선 환한 빛이 흐르고 있었다. 그녀는 나뭇가지에 걸린 불그스름한 복숭아나 자두처럼 탐스러우며 가을 호수에 비친 꽃처럼 사랑스러웠다. 세상 모든 아름다운 색채는 전부 그녀가 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신양 공주는 놀라워하며 미소를 지었다.

“과연 선녀처럼 아름다운 미모를 가졌다고 할 만하네요.”

“이런 미모를 가졌으니 칭찬을 받을 만도 하죠.”

태자비는 이렇게 공주의 말을 받으며 위아래로 엽연채를 훑어보았다. 그녀는 복잡한 눈빛을 언뜻 내비치다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주씨 가문 셋째 부인이라 했지요? 어느 주씨 가문을 말하는 건가요?”

“소인의 시댁은 정국백부이옵니다.”

엽연채가 말했다. 태자비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정신이 번뜩 들었다. 그 유명한 몰락한 가문이었던 것이다. 정국백부가 한때 세력이 컸을 때는 그들 일가의 눈에 들려고 알랑거리지 않았던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때는 태자마저도 그들의 비위를 맞추고는 했다. 그런데 이젠… 길바닥에 지나다니는 쥐들처럼 사람들에게 배척당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태자비는 그런 생각을 하며 눈길을 또다시 엽연채에게로 향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곱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도성 최고의 미녀라고 불리는 상관운도 그녀에겐 조금 밀리는 것 같았다.

“저택에선 지낼 만했습니까? 그곳에는 작약이 아주 예쁘게 피었죠?”

신양 공주는 분위기가 좀 어색해 보이자 얼른 이야깃거리를 꺼냈다. 그러자 엽연채도 저택의 풍경을 칭찬하더니 정원에 핀 작약이 얼마나 곱고 아름다운지도 이야기해 주었다. 그런 후에 자신이 준비한 작약 문양이 들어간 하얀 도자기 병과 말린 작약을 선물로 바쳤다.

태자비는 말린 작약을 손에 들고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참 잘 말렸네요. 꽃 모양이 제대로 보존되어 있으면서도 바싹 말랐어요. 향기도 거의 그대로 남아 있군요. 어떻게 한 건가요?”

“태자비 마마, 우선 꽃을 딴 다음에 물을 묻히지 않고 비단으로 살며시 닦아줘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일각 동안 쪄서 꺼낸 다음 3일 동안 햇빛에 말리면 됩니다. 사실 운이 좋아서 잘 말려졌을 뿐이옵니다.”

엽연채의 대답에 태자비가 옅은 한숨을 쉬며 대꾸했다.

“내가 말린 꽃을 가장 좋아해요. 그런데 시녀들 중에 쓸 만한 애들이 없어요. 밖에서 사는 건 늘 마음에 안 들었는데 부인께 이런 비방이 있는 줄은 몰랐네요. 그 비방이면 분명 마음에 드는 말린 꽃을 만들 수 있겠어요.”

엽연채는 황실 사람들은 말도 참 딱딱하게 한다고 생각했다. 꽃을 말리는 방법은 무슨 비방 같은 것이 아니라 평범한 방법이었다. 게다가 자신이 말린 꽃은 보통의 말린 꽃보다 조금 더 나은 정도였지 특별히 예쁜 것도 아니었다. 자신보다 꽃을 잘 말리는 사람들은 차고 넘쳤다. 채 마마만 해도 훨씬 더 꽃을 잘 말렸으니 말이다.

엽연채는 속으로 이리 생각하며 얼른 태자비의 칭찬을 사양했다.

“황공하옵니다. 소인은 어머니의 유모에게서 꽃을 말리는 법을 배웠습니다만 소인의 실력은 유모를 따라가지 못합니다.”

그러자 태자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겸손해하지 않아도 돼요.”

“선물로 준 흰 도자기 병과 말린 작약은 고맙게 받을게요. 마음에 들어요.”

신양 공주도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네요. 이제 막 회복했으니 어서 가서 푹 쉬어요. 아죽아, 약방에 가서 산삼을 가져오너라.”

아죽은 밖으로 나가더니 잠시 후 다시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의 손에는 길쭉한 옥 상자가 들려 있었다. 엽연채가 공주의 별장에 머무를 때 하사받았던 것과 같은 상자였다. 아죽은 상자를 들고 엽연채 앞으로 걸어와 그녀에게 상자를 건넸다.

“공주 마마, 태자비 마마. 황송하옵니다. 그럼 소인은 이만 물러가 보겠습니다.”

엽연채는 상자를 들고 물러났다. 그녀와 그녀의 여종 둘은 아죽의 뒤를 따라 문밖을 나섰고 마차에 오른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공주 마마와 태자비 마마를 뵙다니!”

추길이 두 눈을 반짝이며 감탄했다.

“무서운 분들이실까 봐 걱정했는데……. 이렇게 온화하고 상냥한데도 범상치 않은 기품이 흐르는 분들이실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이에 혜연은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다를 게 뭐가 있어. 다 같은 사람이지. 아가씨와 마님도 초야의 백성들 눈에는 범상치 않은 기품이 흐르는 분들로 보일 거야. 하지만 그렇다 해도 다 같은 사람일 뿐이야. 입는 옷만 좀 더 좋은 것뿐이지, 뭐.”

한편, 엽연채는 태자비를 생각하며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녀가 태자비이기 때문일 것이다. 주운환은 양왕과 손을 잡고 있으니 그녀와는 적대 관계에 놓인 셈이었다.

마차가 출발하자 엽연채는 마차 벽을 두드리며 일렀다.

“경인아, 친정으로 가자꾸나. 어머니와 할머니께도 인사를 드려야지.”

마차 밖에 있는 경인은 엽연채의 말을 듣고 말고삐를 세게 당기더니 모퉁이를 돌아 사람들로 북적이는 동쪽 거리로 향했다. 잠시 후, 송화 골목을 지나자 엽연채는 잠시 발을 들어 올려 눈을 가늘게 뜨고 밖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곧 다시 발을 확 내려 버렸다.

일각쯤 더 지나니 마차는 정안후부에 도착했다. 정안후부 측문에 당도한 마차는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고 엽연채와 여종 둘은 수화문에서 내린 후 안녕당을 향해 걸어갔다. 마음 같아서야 당연히 온씨를 먼저 보러 가고 싶었지만 예법상 묘씨를 먼저 만나야 했다.

엽연채 일행이 안녕당 회랑을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아직 방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엽영교가 어리광을 피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니, 허락해 주세요!”

그러나 묘씨는 호락호락 넘어가지 않고 매섭게 호통쳤다.

“허락은 무슨!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녀석이! 노처녀 주제에 아직도 혼인을 하지 않겠다고 하는 것이냐!”

“제가 뭐가 늙었다고 그러세요. 전 이제 겨우 열여섯이에요.”

“이제 두 달만 지나면 열일곱이다.”

“큰아가씨께서 오셨습니다!”

밖에 있던 여종이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아뢰었다. 묘씨와 엽영교가 고개를 돌리니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안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어머, 고모, 창피하지도 않아요. 다 큰 어른이 응석이나 부리고 말이에요.”

“그러게 말이다.”

묘씨가 엽영교의 손을 밀치며 동조했다. 그러자 엽영교는 입을 삐죽 내밀더니 하좌에 놓인 수돈으로 돌아가 앉았다.

“연채 네가 설득 좀 하거라.”

묘씨가 언짢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엽영교가 엽연채를 힐끗 쳐다봤다.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리더니 그 옆 수돈에 자리를 잡으며 말했다.

“그게… 조금 늦추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묘씨는 깜짝 놀랐다. 당연히 온 가족이 자신의 의견에 동조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이게 무슨 소리란 말인가. 그리고 특히 엽연채에게는 엽영교를 설득해 줄 거라고 기대했는데, 설득하기는커녕 되레 엽영교의 꼬임에 넘어갔을 줄은 몰랐다.

엽연채는 엽영교가 이렇게 오랫동안 묘씨를 설득했는데도 완강한 걸 보고는 묘씨에게 솔직히 털어놓기로 했다.

“할머니, 표숙이 아주 중요한 노래를 만들어야 해서 팔월에 변경 지역으로 가야 한대요. 그러니 표숙이 작곡할 수 있도록 할머니께서 좀 도와주세요.”

“연채야!”

엽영교가 깜짝 놀라 말했다.

“뭐라? 그 아이가 혼례를 늦추자고 한 것이냐?”

묘씨의 홀쭉한 얼굴이 확 굳어지더니 그녀는 엽영교를 사납게 쏘아보았다. 엽영교는 찔렸는지 고개를 푹 숙였다.

“요것아, 네 코가 석 자야!”

묘씨가 엽영교의 허리를 꼬집자 엽영교는 아파서 ‘아얏’ 소리를 냈다. 어차피 이렇게 다 알려져 버렸으니 그녀도 더는 거리낄 게 없었다. 엽영교는 묘씨의 손을 잡으며 애걸하는 표정을 지었다.

“어머니, 오라버니를 도와주세요! 오라버니께는 작곡이 아주 중요한 문제란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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