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7화
“셋째 마님, 돌아오셨군요.”
“그래.”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인사를 받았다.
“의복을 갈아입은 후 어머님께 문안 인사를 드리러 갈 것이다.”
“그러실 필요 없으세요. 마님께서는 큰아가씨와 둘째 아가씨를 데리고 명도산明道山으로 중매인을 만나러 가셨어요. 이낭 두 분과 둘째 공자님도 함께 가셨죠. 적어도 내일 오후는 돼야 돌아오실 거예요.”
녹엽의 말을 들은 엽연채와 혜연은 좀 어이가 없었다. 진씨가 주묘서와 주묘화를 데리고 중매인을 만나러 간 건 말이 되는데, 주종과는 무슨 연유로 그 틈에 껴서 함께 갔단 말인가? 그는 곧 혼례식을 올릴 정혼녀가 있는 사람이 아닌가.
“녹엽이 너도 앉아서 함께 차를 마시자꾸나.”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권했다.
“감사합니다, 셋째 마님. 그런데 견사絹紗를 사러 밖에 나가 봐야 해서요. 한 달 전쯤 셋째 마님께서 교외에서 넘어져 다치시는 바람에 이제야 돌아오셨잖아요. 그래서 얼굴을 뵈러 잠깐 와 본 겁니다.”
사양하는 녹엽에게 엽연채는 더욱 호의를 베풀었다.
“내 방에 견사가 많이 있단다. 쓸 만한 게 있는지 한번 보거라. 그럼 괜히 밖에 나가지 않아도 되잖니.”
엽연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이리 말했다. 진씨를 모시는 대시녀는 둘이었는데, 바로 녹지와 녹엽이었다. 진씨는 중요한 일은 냉정한 성격의 녹지에게 맡겼고, 무른 성격었던 녹엽은 주로 심부름을 도맡아 했다.
“정말요?”
녹엽은 기쁜 목소리로 반색했다.
곧 혜연이 방 안으로 들어가 견사를 한 아름 들고 나왔고, 녹엽은 쓰기에 적당한 견사를 꽤 많이 고르더니 거듭 감사의 인사를 건넨 후 돌아갔다.
“아가씨, 공주 마마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러 언제쯤 가실 거예요?”
추길이 안으로 들어오며 물었다.
“내일 아침에 가자꾸나. 아직 날이 밝으니 추길이 네가 지금 배첩拜貼(예를 갖춰 다른 사람의 집을 방문할 때 사용하는 명함)을 전달하려무나.”
돌아오자마자 바로 인사를 드리러 가야 아무래도 성의가 있어 보일 것이었다.
“혜연아, 너는 동쪽 곁채에 한번 가 보거라. 아마 작약 문양이 들어간 하얀 도자기 병 한 쌍이 있을 거야. 그리고 저택에서 말려 놓은 작약도 챙기렴. 지금 계절에 딱 어울리는 것들이지.”
그러고 나서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렇게 덧붙였다.
“내일 공주부에 들른 다음 친정에도 가 봐야겠구나. 가서 할머니와 어머니께 인사를 드려야지. 우리도 예의를 제대로 차려보자꾸나.”
추길과 혜연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혜연이 도자기 병을 들고 안으로 들어왔고 엽연채는 그것을 보고는 아주 흡족해했다.
어스름이 깔리자 추길이 돌아왔다. 그녀는 오는 길에 진귀루에서 맛있는 음식을 사 왔고 엽연채는 그것을 먹은 뒤 바로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 * *
이튿날 아침, 채비를 마친 엽연채는 가문 소유의 마차에 올라타 공주부로 향했다. 공주부 측문에 도착하자 엽연채는 배첩을 건넸고 그러자 시동이 그녀들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엽연채 일행이 수화문에서 기다리고 있자 매화 금잠을 머리에 꽂고 백등白藤 문양이 들어간 비갑을 입은 어여쁜 시녀가 걸어왔다.
“부인, 소인을 따라오시면 됩니다.”
“네. 고마워요.”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시녀는 엽연채를 슬며시 흘끗 쳐다보더니 속으로 그녀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엽연채는 그녀를 따라 수화문 안으로 들어섰다. 자갈길을 따라 걸어가니 주위로 정자가 보였고 활짝 핀 꽃과 우거진 나무, 기암괴석 그리고 구불구불 이어져 있는 기다란 낭하도 보였다. 누각에는 꽃무늬가 새겨진 격자 창문이 달려 있었는데 대단히 우아하고 정교한 모양새였다.
시녀는 화원에 자리한 운치 있는 응접실로 엽연채를 안내했다. 그러고 나서 차와 과자류 간식거리를 내오며 말했다.
“공주 마마께서 지금 손님을 만나고 계십니다. 소인이 가서 부인께서 도착하셨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물러났다.
“보아하니 공주 마마께서 저희와 만날 생각이 없으신 것 같아요.”
추길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런 것 같구나. 우리 성의가 전달되면 그것으로 된 거야.”
엽연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방금 전 그 시녀는 공주가 시간을 낼 수 없다고 에둘러댄 것이었다.
이런 일은 정안후부에도 있었다. 소위 친척이라든가 벗이라는 사람들이 종종 방문했는데, 대부분 신분이 낮고 한몫 챙기기 위해 친한 척하려는 자들이었다.
어쩔 수 없이 부 안에 들이기는 했으나 온씨는 그 사람들을 상대하기가 귀찮았다. 그래서 바쁘다고 말하고는 채 마마를 보내 상대하게 했고 그럼 그 사람들은 마마에게 대신 안부를 전해달라고 부탁한 뒤 발길을 돌렸다.
지금 엽연채와 그녀의 여종들이 공주의 도움에 감사 인사를 드리러 왔지만 공주는 그녀를 만나는 게 귀찮으니 마마나 시녀를 보낼 것이다. 그럼 이편에서는 그쪽에 감사 인사와 선물을 전달하면 그만이었다.
응접실을 나선 시녀는 회랑을 따라 걸어가더니 정교해 보이는 정원으로 들어선 후 본채로 걸어갔다. 동차간에는 매화 절지화折枝畫(꽃이 피어 있는 가지의 일부를 그린 그림) 문양이 들어간 자단목紫檀木 침상이 놓여 있는데, 그 위로는 서화瑞花를 입에 문 새 문양이 수놓인 비단 방석이 깔려 있었다. 그곳에선 다리 끝부분이 안쪽으로 휜 탁자를 사이에 두고 귀부인 둘이 앉아 있었다.
왼쪽에 앉은 귀부인은 삼십 대 정도로 보였고 앞섶이 좌우로 교차하는 자미화紫薇花 문양이 들어간 흰색 상의와 가루분처럼 반짝이는 광택이 나는 은색 실로 ‘복福’ 자를 수놓은 소주蘇州 지역 비단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녀의 비선계飛仙髻(정수리 부근에 머리카락을 양쪽으로 둥글게 감아 매듭을 지은 형태. 흔히 떠올리는 선녀 머리와 흡사함) 머리에는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는 듯한 화려한 오봉五鳳 장식과 구슬 술 장식이 달린 장신구가 꽂혀 있었다.
둥그스름한 얼굴 위,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동그랗고 큰 눈에서는 귀티가 흘러넘쳤다. 밝고 화사한 모습의 이 여인이 바로 신양 공주였다.
오른쪽에 앉은 여인은 스물다섯 정도로 보였는데, 신양 공주만큼 예쁘진 않았지만 평균보다는 나은 외모에 이목구비가 단정했다. 그녀는 목단계牡丹髻(높이 틀어 올린 쪽 머리가 여러 개라 마치 모란꽃처럼 보이는 형태) 머리를 하고 있었는데, 봉긋한 쪽 머리 사이에는 녹옥을 상감하고 순금으로 장식된 조그만 화전을 꽂은 채였다. 그리고 조롱박 문양과 쌍희雙喜 문양이 전체적으로 수놓인 금색 배자를 입고 있어 평범한 외양임에도 고귀한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동차간 안으로 들어온 시녀가 두 사람에게 예를 올리며 말했다.
“공주 마마, 태자비 마마, 어제 배첩을 보낸 주씨 가문 셋째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그래?”
신양 공주가 대수롭지 않다는 목소리로 대꾸했다.
“주씨 가문 셋째 부인이라뇨?”
태자비가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신양 공주를 쳐다봤다. 공주는 작게 한숨을 쉬며 사정을 설명했다.
“한 달 전쯤 도성에 인신매매범들이 나타나지 않았습니까? 그때 귀족 아가씨들도 납치를 당했었죠. 다행히도 정 부윤이 제때에 이 소식을 듣고 사람들을 구출했어요. 주씨 가문 셋째 부인도 그 틈에 끼어 있었는데, 그만 산비탈 아래로 구르는 바람에 정 부윤과 함께 돌아오지 못했다더군요. 나중에 그 부군이 찾아 나섰고 결국 찾아냈는데, 떨어질 때 늑골이 부러졌던 겁니다.
중상을 입은 데다 날도 어두우니 움직이기 어려웠겠지요. 그런데 마침 그 근처에 제 별장이 있었기에 그 부군이 문을 두드렸던 겁니다. 저택 관리인이 그들을 보고는 얼른 객실을 내어 줬고, 이튿날 나에게 와서 알렸습니다. 그 이야기를 듣고 내가 마음 편히 몸조리하라고 했습니다. 이제 몸이 회복되어 도성으로 돌아왔으니 감사 인사를 전하러 온 모양이에요.”
이야기를 들은 태자비는 미소를 지으며 공주를 추켜세웠다.
“공주 마마는 참 심성이 고우십니다.”
“별것 아닙니다. 사람 목숨이 달린 일이었어요. 도울 수 있으면 당연히 도와야죠.”
신양 공주는 사양한 후에 마저 말을 이어 갔다.
“밖에는 교외에서 나들이하다가 넘어졌다고 말했나 봐요. 하지만 나에겐 숨길 수 없었죠. 인신매매범 이 몹쓸 것들! 여하튼 부인의 평판에 흠이 갈 수도 있으니 밖에는 절대로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다 같은 여인이니 평판이 목숨보다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잖아요.”
“물론입니다.”
“어제 관리인이 부인을 도성으로 바래다준 후 나에게 와서 보고를 했어요. 그 관리인도 참 실없는 사람이에요. 글쎄, 나한테 주씨 가문 셋째 부인이 선녀처럼 고운 외모를 가졌다고 말하는 거예요. 다 늙어서 창피한 줄도 모르고. 다음에 보면 쫓아내야겠어요!”
신양 공주는 자신의 관리인이 너무 방정맞다고 생각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아죽아, 가서 내가 짬을 낼 수가 없다고 전하거라. 제 마마를 보내면 될 것이다.”
아죽이 명을 받들고 돌아서려는 찰나에 태자비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기다려 보거라.”
그러더니 고개를 돌려 신양 공주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바쁜 것도 아닌데 감사 인사를 전하러 온 사람이니 한번 만나 보면 어떠세요?”
그 말에 신양 공주가 미간을 찌푸렸다. 만나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태자비는 신양 공주가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그들 같은 황실의 자제들에게는 빌붙으려는 사람들이 너무 많았기에 가급적 안면이 없는 이들은 만나지 않는 게 좋았다. 일단 그런 자들과 엮이면 떼어내는 데도 적잖이 애를 먹기 때문이었다.
“그럼 그렇게 하죠. 아죽아, 가서 이리로 모셔오너라.”
신양 공주도 더는 물리기가 귀찮았던지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러고 나서 태자비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나보다는 태자비께서 더 귀하신 몸이니 빌붙으려고 해도 태자비께 빌붙으려 들겠죠!”
“공주 마마께서 또 농을 치시는군요.”
태자비는 겸손하게 웃어 보였으나 눈빛은 득의양양했다. 태자에게 빌붙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황제 다음으로 가장 존귀한 사람이 태자 아닌가. 그리고 자신은 태자비이니 태후와 황후 다음으로 제일 존귀한 여인이었다. 공주들도 자신을 보면 알아서 몸을 낮추었다.
아죽은 예를 갖춘 후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엽연채는 응접실에서 유유히 차를 마시고 있었다. 겨울에 말린 매화 잎으로 끓인 차라 상쾌한 향기를 풍겼다. 거기다 팥소가 들어간 달콤한 매화떡을 곁들이니 맛이 아주 그만이었다.
그때 아죽이 안으로 들어오며 말했다.
“부인, 소인을 따라오시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