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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96화 (96/858)

제96화

그 후 엽이채가 가문에 들어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찬의 생일 축하연이 열렸다. 태자 측비로 간택된 백씨 아가씨도 축하연에 참석했는데, 장만만 앞에서 거들먹거리기 위함이었다.

그날은 몸 상태가 그런대로 괜찮아 밖에 나가 햇살을 쬐고 싶었던 엽연채는 화원 한편에 자란 관목 뒤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때 백씨 아가씨가 장만만을 끌고 엽연채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두 사람은 엽연채의 모습을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엽연채는 우쭐거리며 비웃는 백씨 아가씨의 목소리를 들었다.

“소저께서는 정말 오라버니와 새언니 일로 간택 후보에서 탈락했다고 생각하세요? 그럴 리가요. 전하께서는 소저가 전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거예요!”

‘쿠구궁’ 소리와 함께 장만만의 마음은 무너져 버렸고 그때부터 그녀는 풀이 죽어 지냈다.

엽연채는 장만만을 마음에 안 들어 한 사람이 태후인지 황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어쨌든 한 가지는 분명했다. 자신 때문에 장만만이 간택에서 탈락한 건 아니라는 사실. 자신과 장박원의 불화가 간택에 영향을 끼쳤다는 건 그저 핑계에 불과했다.

자, 이번 생에서 난 장씨 가문에 시집가지 않았다. 장만만이 간택 후보에서 탈락하게 되면 이번에는 모든 책임을 누구에게 돌릴까? 그리고 높으신 분들은 또 무슨 핑계를 대려고 할까?

이때 손씨가 웃으며 말했다.

“오는 길에 보니 이곳 풍경이 기가 막히더구나! 오늘은 연채 네 덕분에 이런 곳에 와서 경치를 즐겼는데, 앞으로는 장씨 아가씨 덕을 보게 생겼네.”

그녀는 자신이 마치 황제의 친척이라도 된 양 의기양양한 얼굴로 거들먹거렸다. 그 모습에 엽연채는 한층 어이가 없었다. 장만만의 후보 탈락은 일단 제쳐두고, 설사 정말로 간택된다 하더라도 그녀는 장씨 가문 여식이었다. 또 정비正妃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손씨는 마치 자신의 딸이 간택되기라도 한 듯이 우쭐대고 있었고 장만만의 의사는 물어보지도 않고 그녀를 이용해 위세를 부리고 있었다.

“윽……!”

이때 엽이채가 갑자기 가슴을 부여잡더니 구역질을 하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엽영교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엽이채가 쑥스러운 표정으로 말꼬리를 흐렸다.

“영교 아가씨도 나이가 차서 이제 곧 출가하는데 이런 것도 모르세요?”

손씨는 만면에 희색을 띠며 말했다.

“이 아이가 회임을 했어요.”

그 말에 엽영교와 엽연채의 표정이 굳어졌다. 순간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아이가 들어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기어코 사람을 찾아와서 들쑤셔 대다니, 정말 징글맞은 사람들이었다.

“이채가 사월 열사흘에 혼례식을 올렸잖아요. 이제 유월 상순이니 회임을 했다 하더라도 두 달 정도밖에 안 됐는데 이렇게 밖으로 돌아다니면 돼요? 거기다 이렇게 사람들에게 떠벌리고 다니면 어떡해요!”

보통 회임 후 3개월 동안은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는 법이었다. 그러자 손씨와 엽이채의 표정이 굳어졌다.

손씨는 황급히 변명을 늘어놨다.

“의원이 태아 상태가 안정적이니 신선한 공기를 많이 마시고 기분 전환도 자주 하라고 했어요. 그리고 회임한 지 얼마 안 됐어도 친척들에겐 말할 수 있잖아요.”

엽연채와 엽영교는 그녀의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 알 수 없었다. 사실이라면 회임한 지 얼마 안 됐음에도 부득부득 찾아와 자랑을 하고 싶었던 거고, 거짓이라면 혼인 전에 사통하여 아이를 가진 것이다. 어쨌든 둘 다 좋은 행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건 그렇고 연채는 혼인한 지 한참 됐는데 어째서 아무 소식도 없는 거니?”

손씨의 말에 엽연채는 짜증이 확 났다. 그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엽영교도 언짢아져 성난 목소리로 손씨를 면박 줬다.

“혼인한 지 몇 달이나 됐다고 그래요. 어디 이채처럼 저렇게 애가 불쑥 들어서겠어요! 이채는 혼례식을 올린 지 두 달밖에 안 됐는데 배는 벌써 삼사 개월은 된 것처럼 불렀네요.”

손씨와 엽이채의 낯빛이 확 어두워졌고 손씨는 역정을 냈다.

“그, 그게 무슨 망발입니까!”

“아, 제가 헛소리를 했나 보네요. 됐죠?”

엽영교는 ‘흥’ 하고 콧방귀를 뀌었다.

“전 그저 연채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뿐이에요. 몸에 무슨 문제라도 있는 거면 빨리 치료를 해야지. 치료를 포기하면 되겠어요?”

손씨가 엽연채의 몸을 훑어보며 말했다.

“큰언니 상태가 어떤지 확인했으니 이제 그만 돌아가 볼게요.”

그때 엽이채가 가녀린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래.”

엽연채는 무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손씨는 직접 엽이채를 데리고 방을 나섰다. 뜰로 걸어 나간 그녀는 조롱 섞인 목소리로 비아냥댔다.

“꼴을 보아하니 애를 못 낳는 게 분명하다. 하긴 낳을 수 있다 해도 주씨 가문에 반길 사람이 누가 있겠느냐! 아이를 못 낳는 게 도리어 온 집안을 화목하게 만들어 주는 방법일지도 모르지.”

엽이채는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하늘은 참 자신에게 관대했다. 자신은 지체 높은 가문의 적자이면서 동시에 제 마음에 쏙 드는 멋진 귀공자에게 시집을 갔다. 어디 그뿐인가.

시부모는 유달리 잘해 주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공연히 트집을 잡지는 않았고, 시누이는 좀 쌀쌀맞은 구석이 있긴 해도 자신을 난처하게 하진 않았다. 하인들은 자신이 남편의 사랑을 듬뿍받는 걸 보고는 눈치껏 깍듯이 모셨다.

이제 임신까지 했으니 단번에 아들을 낳게 되면 장씨 가문에서 완전히 입지를 굳히게 된다. 자신은 인생의 승리자였다. 엽이채는 달콤한 꿈에 빠져 그야말로 날아갈 듯했다.

* * *

유월의 날씨는 점점 무더워졌다. 엽영교는 방 안에 서서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오늘은 큰비가 내려 저택의 전경이 더욱 청신해 보였고, 정원에는 곱디고운 꽃이 활짝 피어 있었다.

작약芍藥은 앞다투어 꽃망울을 터뜨렸고 잎사귀와 줄기도 무성했다. 사발 크기만 한 꽃은 산뜻하고 아름다운 빛깔을 뽐냈는데, 윗부분에는 빗방울이 맺혀 있었다. 꽃들은 습기를 축축히 머금은 바람에 하늘거리고 있는데 그 모습이 더없이 우아하고 아름다웠다.

꽃밭에 서 있는 엽연채는 매화 문양이 들어간 새하얀 윗옷에 촘촘히 짜인 해당화 문양이 들어간 선홍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고운 눈을 가진 그녀가 천천히 뒤돌아서자 주위에 핀 작약이 순간 빛과 생기를 잃은 듯한 느낌을 주었다.

“쟤 좀 봐, 세상에 어떻게 저런 애가 있을 수 있지? 꽃이 다 질투하겠어!”

엽영교는 미소를 지으며 뒤에 있던 추길에게 이리 말했다. 그러고 나서는 밖으로 걸어 나오며 엽연채에게 당부했다.

“연채야, 너 비가 오고 나니 물 만난 고기처럼 아주 팔딱거리는구나. 넘어지지 않게 조심해.”

“제가 보기에는 고모야말로 물 만난 고기 같은데요. 가만히 있지를 못하잖아요!”

엽연채가 연꽃 문양이 들어간 반투명한 둥글부채로 그녀의 머리를 톡 치며 말했다.

“아얏!”

엽영교는 그녀를 흘겨보며 말했다.

“이제 다 나은 것 같으니 어서 돌아가자! 유월 스무닷새에 네 할머니 생신 축하연이 있으니 서둘러 돌아가야지.”

“제가 보기에는 할머니 때문이 아니라 표숙 때문에 조급해하는 것 같은데요! 고모가 돌아가서 할머니 속을 또 썩이면 생신 축하연이 즐거울 리가 있겠어요? 남편이 생기니 어머니는 안중에도 없나 봐요.”

엽연채가 어쩔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하자 엽영교는 난처해하는 웃음을 지었다.

“아가씨, 저희도 돌아가긴 해야 돼요. 오늘이 벌써 유월 스무날이니 돌아가서 생신 선물도 준비해야 되고 공주부公主府를 방문해 감사 인사도 드려야 하니 한나절은 정신없을 거예요.”

추길이 끼어들었다. 이곳 풍경이 아무리 아름답다 하더라도 한 달 넘게 머무니 슬슬 지겨워졌다. 게다가 어쨌든 남의 집에 얹혀 있는 처지라 무엇을 하든 이곳 사람들의 눈치를 봐야 했다. 그러니 추길은 자기 구역인 궁명헌을 그리워했다. 그곳에선 가끔씩 거리에 나가 놀며 시간을 보낼 수도 있었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가서 관리인 내외와 작별 인사를 하자꾸나!”

엽연채 일행은 관리인의 부인에게 그동안 보살펴 줘서 고맙다고 인사를 건넸다. 관리인은 그들에게 점심 식사를 대접했고, 그들은 식사를 마친 후 떠날 채비를 한 다음 길을 나섰다.

엽연채가 이곳에서 몸조리하는 동안 경인도 이곳에서 지냈다. 그리고 엽영교가 이곳에 남을 때 정안후부 사람들은 비상용으로 이곳에 호화롭고 편안한 커다란 마차를 두고 갔다. 그래서 엽연채는 추길, 혜연과 함께 엽영교는 옥패와 함께 마차에 올랐고 경인이 마차를 몰았다.

마음씨 착한 관리인은 그들을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미시未時(오후 1시~3시) 삼각에 도성을 향해 출발한 그들은 대략 반 시진 후 성문에 진입했다. 마차는 곧장 도성 북쪽을 향했고 이각쯤 지난 후 장승가에 들어섰다. 모퉁이를 도니 정국백부 서쪽 측문이 보였다.

마차가 측문 밖에 멈춰 서자 엽연채와 여종들은 마차에서 내렸다. 그들은 엽영교 일행과 작별 인사를 나눈 후 저택으로 들어갔다.

서과원으로 돌아온 그들은 난죽거를 지나가다 안쪽을 슬쩍 들여다봤는데 대문은 굳게 잠겨 있고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엽연채는 주운환이 처리해야 할 일이 있어 또 외출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엽연채와 여종들은 이내 궁명헌에 도착했다. 엽연채는 익숙한 나한상 위에 누워 기지개를 켰다.

“역시 이곳이 편해!”

“여기가 아가씨께서 화본을 보시던 자리죠. 다른 곳에 앉아서 보면 그 느낌이 안 나잖아요.”

혜연이 찻주전자를 들고 안으로 들어오며 농담조로 대꾸했다.

“맞아.”

엽연채는 미소를 지어 보였고 혜연의 손에 들린 매화 문양이 새겨진 백자 찻주전자를 보며 물었다.

“차니?”

“예.”

혜연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천천히 차를 따라주었다. 엽연채는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들은 한동안 이곳에서 지내지 않았는데 어떻게 차가 준비되어 있는 걸까? 설령 남아 있었다 하더라도, 그렇다면 한 달 넘게 방치된 차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혜연 성격에 그런 차를 따라주는 실수를 할 리가 없었다.

엽연채가 의문에 잠겨 있는 동안 찻물이 쪼르륵 백자 찻잔 안으로 떨어지더니 금세 찻잔을 가득 채웠다. 그러자 향긋한 말리화 향이 몰씬 풍겨왔다.

“아가씨.”

혜연이 찻잔을 건넸다. 엽연채는 허리를 피고 찻잔을 받아 들더니 안에 손을 집어넣어 온도를 확인했다. 보아하니 두세 시간 정도 우린 것 같았다.

“향아가 우려 놓은 것 같아요!”

혜연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칭찬했다.

“참 괜찮은 아이에요.”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서 잘했다고 돈을 좀 쥐여 주거라.”

“아가씨, 녹엽이가 왔습니다.”

그때 밖에 있던 추길이 그녀를 불렀다. 엽연채는 몸을 꼿꼿이 세워 녹엽을 기다렸다. 잠시 후 녹엽이 서차간에 도착하자 엽연채는 나한상에 기댄 채로 그녀를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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