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5화
“진짜 혼사를 미루려는 거면 표숙께서 직접 어른들께 말씀드려야죠. 아니면 그분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든가요. 왜 고모에게 이런 일을 시켜요?”
“전에… 오라버니께서 혼례식 날짜를 한번 바꿨잖아. 그때도 외숙과 외숙모께서는 달가워하지 않으셨어. 그런데 또 날짜를 미루자고 하면 절대 허락하지 않으실 거야. 그래서 오라버니께서 내게 도움을 청하신 거지. 이번에 우리 쪽에서 미루자고 하면 연기할 수 있을 테니까.”
엽영교는 난감해하는 표정을 짓더니 엽연채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부탁했다.
“네가 우리 어머니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설득 좀 해 줘.”
엽연채는 입장이 참 난처했다. 할머니는 자리를 뜨기 전 자신에게 고모가 허튼 생각 하지 않도록 설득하라고 부탁을 했다. 그런데 지금 고모가 되레 할머니를 설득해 달라고 청할 줄이야.
엽연채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이런 책임감 없는 사내에게는 시집가지 않으면 그만이다. 하지만 고개를 들어 빙그레 웃는 엽영교의 얼굴을 보자 엽연채는 조금 고민이 됐다. 사실 묘기화는 아주 괜찮은 사내였다. 용모도 준수하고 집안도 좋고 재능이 넘치는 사내였다.
따지고 보면 고모에게는 좀 과분한 상대일지도 몰랐다. 엽영교 대신 자신이 화를 내기는 했지만 사실 묘기화가 그렇게 큰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때론 작곡에 필요한 영감과 느낌이란 게 불현듯 찾아오기 때문이다.
“오라버니께서는 금琴과 작곡밖에 모르는 사람이잖아.”
엽영교는 작게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갔다.
“오라버니와의 혼인이 정해진 후 난 이미 마음의 준비를 했어. 오라버니는 금 연주와 작곡을 위해 모든 걸 희생할 사람이니까.”
엽연채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듣다가 하품을 했다.
“피곤하니?”
엽영교가 물었다.
“물 좀 가져다주세요.”
“그래.”
엽영교는 밖으로 나가 물을 가져왔다. 그런 후에 엽연채에게 물 한 잔을 따라 주었고, 엽연채가 물을 다 마시자 이렇게 말했다.
“저택 관리인의 아내를 찾아가 내가 묵을 방을 준비해 달라고 해야겠어. 추길과 혜연을 안으로 불러다 주마!”
“네.”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였다. 엽영교는 자리에서 일어나 문밖을 나섰고 잠시 후 추길이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 곁에 영교 아가씨가 계셔서 저는 저택 관리인의 아내를 도와 채소를 따고 있었어요. 혜연이는 아가씨가 드실 약을 달이고 있고요.”
추길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남의 집에 머무르니 추길은 밉보이지 않으려고 눈치껏 일을 거든 것이다. 이 저택에는 관리인 부부와 어린 여종 그리고 시동 두 명이 지내고 있었다.
* * *
추길이 밖으로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엽연채는 잠이 들었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침상 곁에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누군가의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눈을 뜨자 꽃문양조차 없는 수수한 담청색 홑옷이 한눈에 들어왔다. 주운환이 곁을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몸은 좀 괜찮아졌어요?”
주운환이 물었다.
“네.”
엽연채가 싱긋 웃으며 대꾸했다.
“이번 일은 정말 고마워요.”
그에게 폐를 끼치지 않겠다고 말했었는데 결국 약속을 어기고 말았다.
“뭘요. 당연한 일 아닙니까.”
주운환의 눈에 아직 핏기가 돌지 않는, 그래도 곱고 아리따운 그녀의 얼굴이 들어왔다. 그녀는 맑고 투명한 두 눈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병석에 누워 있음에도 그녀의 미모는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주운환은 더는 그 얼굴을 쳐다보지 못하겠는지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일이 있어서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몸조리 잘하세요.”
“네. 그럼 가보세요!”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운환은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연채야! 밥 먹자!”
이때, 엽영교가 바람을 일으키며 빠른 걸음으로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다 문 입구에서 주운환과 마주쳤고, 두 사람은 고개를 살짝 끄덕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하며 서로를 지나쳤다. 엽영교의 여종 옥패와 엽연채의 여종 혜연이 찬합을 들고 그녀의 뒤를 따라 들어왔다.
“작은 탁자를 침상 옆으로 옮기거라.”
엽영교의 분부에 옥패와 혜연은 탁자를 가져와 그 위에 음식을 하나씩 올려놓았다. 차려진 음식은 청증배골淸蒸排骨(갈비찜), 은어계사銀魚鷄絲(뱅어에 채 썬 닭고기를 더한 요리), 수자채심水煮菜心(채소 고갱이를 데쳐 간을 한 요리), 계탕鷄湯이었다.
“밥은 여럿이서 함께 먹어야 더 맛있지.”
엽영교가 웃으며 말했다.
“어머니와 새언니들이 가시기 전에 관리인 부부에게 돈을 줘서 우리가 먹고 싶은 대로 먹을 수 있대.”
“하지만 전 죽만 먹을 수 있는 걸요.”
엽연채는 쓴웃음을 지으며 대꾸했다.
“그건 그렇고 고모의 거처는 어디로 정해졌어요?”
“이곳 곁채란다. 방금 전에 옥패와 방을 깨끗이 정리했어. 관리인의 아내가 침구도 가져다줬고.”
엽연채가 지내는 처소는 세 칸짜리 본채와 그 좌우에 곁채가 하나씩 자리한 아담한 뜰이었는데, 엽영교가 머무를 곳은 오른쪽 곁채였다.
이 저택은 아주 선선한 곳이었다. 격자 창문을 활짝 열어 두면 상쾌한 바람이 방 안으로 솔솔 불어 왔다. 그렇게 한 달가량 머물고, 어느덧 유월 상순이 되었다.
* * *
엽연채가 침상에 기대어 앉아 있는데 추길이 언짢은 표정으로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아가씨, 둘째 마님과 둘째 아가씨께서 오셨어요.”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밖에서 손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큰아가씨, 어쩌다 이렇게 다친 거예요!”
이리 말하는 손씨는 엽연채를 나무라는 듯한 표정을 지은 채 이미 방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녀는 침상 쪽으로 걸어오더니 허허 웃으며 말했다.
“왜 우리에겐 알리지 않았대요. 어머님과 형님, 동서는 이미 왔었다고 들었어요. 우리만 안 오면 인정머리 없어 보이잖아요.”
엽연채는 뜨뜻미지근한 표정으로 그녀를 쓱 쳐다봤다.
“여긴 무슨 일이에요?”
손씨는 그녀가 인사치레로 하는 말도 하지 않자 표정이 어두워졌다.
“방금 전에 문병 왔다고 말했잖아요. 이곳은 귀한 곳이라 우리가 올 장소가 안 된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새언니, 또 쓸데없는 소리를 하네요!”
엽영교가 둥글부채를 흔들면서 쿵쿵거리며 걸어 들어왔다. 그러더니 몸을 돌려 문밖을 쳐다보며 말했다.
“이채, 넌 뭘 그리 꾸물대는 거야?”
모본단模本緞(짜임이 곱고 윤이 나며 무늬가 아름다운 고급 비단)으로 만든 번쩍거리는 다갈색 치맛자락이 보이더니 엽이채가 류아의 부축을 받으며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그녀는 연꽃 문양이 수놓인 진홍색 배자를 입고 머리에는 홍옥 장신구를 얹은 채였다. 전형적인 귀부인의 차림새였다.
“영교 아가씨, 왜 호통을 치고 그래요? 여기는 공주 마마께서 시집가실 때 혼수로 받은 귀한 별장이라 저희가 올 곳이 못 된다, 그거예요?”
손씨가 코웃음을 치며 말을 덧붙였다.
“이곳에서 지내니 주인이라도 된 것 같나 봐요?”
“그런 거 아니거든요. 새언니는 남의 뜻을 곱새기는 데 참 일가견이 있어요.”
엽영교도 불쾌하다는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언니, 우린 언니를 보러 온 거예요.”
엽이채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주변을 살펴보며 말했다.
“언니, 참 대단하네요. 공주 마마와 다 알고 지내다니.”
손씨가 허허 웃으며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면 감사 인사를 드리러 공주부를 방문하겠네요! 그분이 안 만나 주시더라도 체면 깎이는 행동은 하지 마세요.”
엽연채는 어이가 없어 하하 웃으며 그녀를 쳐다봤다. 다른 사람들이 다 자기처럼 윗사람에게 알랑거리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이채 시댁에서도 태자 측비 한 분이 나오시는 게 고작인데 말이죠.”
손씨가 뛸 듯이 기쁘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었다. 그 말에 엽연채와 엽영교는 입을 삐죽거렸다. 이 모녀가 왜 여기까지 달려왔는지 그 이유가 명백해진 순간이었다.
엽연채가 다치는 바람에 우연히 공주의 저택에서 머물게 되자 이 모녀는 배가 아팠던 것이다. 엽연채가 공주와 작은 인연을 맺게 되는 뜻밖의 행운을 거머쥐는 것을 이 모녀가 어찌 이를 그냥 보고 넘기겠는가. 그래서 이리 달려와 들쑤셔 대는 것이었다.
“태자 측비라니요?”
엽영교가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제 시누이가 태자 측비 후보거든요.”
엽이채는 장만만의 이야기를 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손씨는 조만간 자신도 황제의 친척이 된다며 대단히 자랑스러워했다. 그들은 공주가 선의를 베풀어 엽연채를 이곳에 머물게 해 준 일 따위보다 훨씬 대단한 일이라 생각했다.
그러자 엽연채가 까만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
“후보?”
이 물음에 엽이채는 표정을 홱 굳히더니 즉시 말을 보탰다.
“해가 서쪽에서 뜨지 않는 한, 제 시누이가 측비로 간택될 거예요.”
감히 저렇게 장담하다니! 엽연채는 싸늘한 눈빛으로 엽이채를 흘겨봤다. 누가 엽이채에게 이야기를 흘렸는지 알 수야 없지만, 열에 아홉은 장박원 그 아둔한 놈일 것이었다.
장만만, 오 시랑侍郞의 여식 오설매, 장국후부의 큰소저인 포모가 태자 측비 후보였는데, 암암리에 장만만이 태자 측비로 결정되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누가 감히 그걸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단 말인가? 엽연채는 엽이채의 지능에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저렇게 설레발을 쳐도 결과란 무릇 나와 봐야 아는 법이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순간 엽연채의 눈빛에서 복잡한 감정이 보였다. 그녀는 고소해하는 눈빛으로 엽이채를 쳐다봤다. 전생에 장만만은 태자 측비의 자리를 거머쥐지 못했다. 그녀가 간택되는 게 확실했던 그 자리는 후보에도 없던 백씨 가문 아가씨에게 돌아갔다.
황후와 태자는 틀림없이 장만만을 간택할 거라고 약속했는데 돌연 마음을 바꿨고, 이에 장씨 가문은 울화가 치밀었다. 그래서 맹씨가 입궁하여 그 이유를 캐묻자 황후는 이리 답했다.
“장씨 가문이 화목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네. 아들 내외가 사이가 안 좋아 하루가 멀다 하고 말다툼을 벌이고 3일에 한 번씩 크게 싸운다고 하더군. 그러나 우린 뭐 큰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오. 중요한 건 장 대인과 소저의 행실 아니겠소. 그런데 태후 마마께서 반대하셨지. 그런 분위기에서 자란 아가씨는 모가 날 수밖에 없다고 하셨네.”
황후에게서 이유를 들은 장씨 가문은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떨어진 것만 같았다. 장씨 일가는 모든 잘못을 엽연채에게 돌렸다. 황후는 ‘부부의’ 불화를 언급했지만 장씨 가문에서 어떻게 자기 아들을 탓할 수 있겠는가. 모든 잘못을 며느리가 한 것으로 돌리는 게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전까지는 엽연채의 편에 섰던 맹씨도 바로 돌변해 그녀를 분풀이 대상으로 삼았으니, 장박원이야 오죽하랴. 그에게는 엽연채를 비웃고 비아냥댈 수 있는 그럴싸한 이유가 더 생기게 된 셈이었다. 그는 그녀가 장만만의 인생을 망쳤고 장씨 가문에 화를 입혔다고 말했다. 그리고 장만만은 누구보다도 더 엽연채를 원망했다. 물론 오라버니인 장박원도 미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