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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94화 (94/858)

제94화

“하지만… 그래도 큰공자님을 아끼시잖아요……. 설마 큰공자님만 곁에 남겨 두려시는 걸까요?”

엽연채는 냉소를 지었다.

“때가 되면 큰오라버니마저도 치워 버릴지도 모르죠. 그 허서라는 놈에게 적자의 자리를 내주면서 말이에요!”

“설마 그렇게까지 하실까요?”

채 마마는 더욱 질겁했다. 그러고는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훅’ 하고 숨을 내쉬더니 두 눈을 한층 크게 떴다.

“설마……! 그 허서라는 놈이 세자야의 씨는 아니겠죠?”

그 말에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렸다. 그것이야말로 엽승덕이 가장 바라는 그림 아니겠는가. 채 마마마저도 저런 생각을 하니 전생에 엽승덕이 허서가 자신의 아들이라고 공표했을 때 모든 사람들이 그의 말을 철석같이 믿은 것이었다.

거기다 적골법滴骨法이라 불리는 친자 확인법은 빼도 박도 못 할 확실한 증거였다. 아무도 그가 친아들마저 곤경에 빠뜨릴 정도로 악독한 사람이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어쨌든… 엽승덕이 어머니를 건들지 못하게 마마가 잘 대비해 줘요.”

“예!”

엽연채의 당부에 채 마마는 간담이 다 서늘했다. 아가씨의 걱정이 기우이든 아니든 잘 대비해서 나쁠 건 없었다. 이때 엽영교가 끼어들었다.

“추길에게 큰 새언니를 모셔오라고 해서 직접 새언니에게 말씀드리면 되잖아.”

“어머니가 성격이 좀 급하잖아요. 마음에 담아두지 못하고 입 밖으로 꺼내실지도 몰라요.”

“하긴 그렇긴 해요.”

채 마마는 엽연채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허서가 세자야의 씨인 걸 마님께서 알게 되시면 어떤 난리가 일어날지 모를 일이죠.”

그 말에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렸다.

‘그놈은 엽승덕의 씨가 아니라고!’

“허서는 그자의 씨가 아니에요.”

엽연채가 단정했다.

“오라버니의 씨이든 아니든 공부는 아주 잘하는 거 아냐?”

엽영교는 허서가 향시를 볼 거라고 했던 엽연채의 말을 떠올리며 그녀에게 물었다.

“아버지는 공부 잘하는 사람을 제일 좋아하잖아.”

그 말에 채 마마의 낯빛이 창백해졌다. 이때,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발소리의 주인은 염교였다.

“채 마마, 왜 여기 있는 거예요? 다들 찾고 있어요.”

“이제 갈 거다. 큰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 말하다 보니 시간이 이렇게 흐른 줄 몰랐네.”

채 마마는 엽연채를 쳐다보며 인사했다.

“큰아가씨, 그럼 가보겠습니다.”

“그래, 이만 가봐요.”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채 마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전생을 떠올렸다. 전생의 자신은 장씨 가문에 시집가 온갖 억울함 속에서 분통 터지는 생활을 했고 어머니는 딸 걱정으로 병을 얻었다. 그러자 엽승덕은 그런 부인이 언젠가는 화병으로 죽을 거라고 생각해 조급해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는 엽이채라는 비장의 패도 있었다.

결국 엽이채가 장씨 가문으로 들어가자 어머니는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하지만 허서가 향시에 급제하고 ‘본래의 부모 밑으로 입적’한 것은 3년 후의 일이자 엽연채가 별채에서 병으로 사경을 헤매기 전의 일이었다.

‘그럼 올해 허서가 향시에 급제하지 못하는 건가?’

엽연채는 죽음을 앞두고 있을 때 엽균이 자신을 찾아와 허서와 은정랑에 대해 늘어놓은 이야기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올해 단오절에 허서와 함께 용주 경기를 본 뒤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돈을 훔치려는 도둑놈들을 맞닥뜨렸다고 했다. 자신과 허서가 돈주머니를 내놓으라고 쫓아갔는데 허서는 그만 놈들에게 복부를 흉기로 찔렸다면서, 상처가 심각해 제대로 공부할 수 없었고 결국 향시에서 낙방했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 단오절에 엽균과 허서는 그녀와 함께 용주 경기를 보았고, 엽균은 그녀를 집으로 바래다주느라 허서와 길거리를 돌아다니지 않았다. 당연히 허서가 도둑을 만나 상해를 입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럼 이번 향시에 급제하는 걸까? 하나 허서가 급제하든 낙방하든 이쪽의 상황도 전과는 달랐다. 자신은 병상에 누워 있지 않았고 엽승덕에게는 이쪽을 해할 비장의 무기도 없으니, 그는 더 이상 기다리지 못하고 어머니에게 손을 뻗을 게 분명했다.

그런 생각을 할수록 엽연채는 마음이 불안해졌다. 그녀는 사람을 매수해서 허서의 손가락을 부러뜨려 평생 과거 시험을 칠 수 없게 만드는 방편도 고려해 봤다. 하지만 그렇게 하더라도 엽승덕은 어떻게든 은정랑에게 정실 자리를 내줄 방법을 강구해 낼 것이다. 그리고 그가 언제 그런 방법을 생각해 낼지 엽연채는 예측할 수가 없었다.

엽연채는 엽승덕의 행동에 대비하려고 전전긍긍하며 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허서가 자신만만하게 준비한 뒤 시험을 치르게 놔두는 게 나았다. 그럼 엽승덕은 그들의 정안후부 입성을 위해 준비를 할 것이고, 이쪽에서는 그가 언제 일을 벌일지 가늠할 수 있게 될 것이었다.

“연채야, 왜 그렇게 넋을 놓고 있어?”

엽영교는 침상 곁에 놓인 수돈에 앉아 엽연채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그녀는 엽연채의 얼굴을 들여다보더니 이내 작게 한숨을 내쉬며 연잎 문양이 들어간 비단 손수건을 비틀어 짰다.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쓸데없는 생각도 하지 말고. 큰오라버니께서 널 아끼는 건 아니지만…….”

그렇게 말하더니 가볍게 웃어 보였다.

“내가 이렇게 말했다고 삐치면 안 돼!”

“삐치기는요.”

엽연채가 눈을 희번덕거리며 냉소를 지었다.

“제가 아버지 사랑이 고픈 애처럼 보이세요?”

“큰오라버니께서 그래도 균이는 아끼잖니. 그러니 그런 일은 없을 거다.”

엽영교는 이렇게 달랬다. 엽연채는 엽영교와 괜한 입씨름을 하고 싶지 않아 입만 삐죽거릴 뿐이었다. 다들 범이 아무리 사납기로서니 설마 제 자식까지 잡아먹겠냐고 생각하기 마련이었다.

지난번 엽승덕이 장박원을 위해 엽연채를 곤경에 빠뜨렸을 때 엽영교는 그를 냉혈한이라고 욕했다. 하지만 그래도 엽균만은 끔찍이 아낄 거라고 생각했다. 엽연채는 딸이니까 중요치 않게 여겼으리라고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아들만 귀히 여기고 딸은 대수롭잖게 생각했다. 그게 현실이었다.

하지만 엽영교를 포함하여 보통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게 한 가지 있었다. 바로 자신들이 은정랑을 향한 엽승덕의 애정을 과소평가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고모, 제 일은 걱정 마시고 고모 일에 신경 쓰세요. 할머니 말씀이 맞아요. 얼른 고모를 내보내야죠.”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화제를 바꾸었다.

“가족들과 떨어지기 싫어서 그래.”

엽영교가 혀를 쏙 내밀며 핑계를 댔다.

“얼렁뚱땅 넘어가려고 하지 마세요! 할머니 앞에선 할머니와 떨어지기 싫어서 그런 거라고 말하시더니 제 앞에선 가족들과 떨어지기 싫어서 그런 거라고 하시네요.”

엽연채는 갑자기 숨을 헉하고 들이키더니 상처 부위를 잡고 끙끙거렸다.

“나한테 뭐라고 하더니 쌤통이다!”

엽영교는 고소해하며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엽연채의 어깨를 콕 찔렀다.

“딴소리 말고 제대로 이야기하세요.”

엽연채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전생에 묘기화가 혼례식을 3일 앞두고 실족사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묘기화의 모친은 정안후부로 찾아와 엽영교가 만나자고 약속한 바람에 묘기화가 허무하게 세상을 등졌다고 온갖 소란을 피워댔다.

엽영교가 계속해서 혼례식 날짜를 미루자고 하는 걸 보니 설마 당시에 이 이야기를 하려고 그와 약속을 잡았던 걸까?

“전에는 시집가고 싶어 안달이었잖아요.”

엽연채는 단호한 눈으로 엽영교를 바라보았다.

엽연채가 출가하기 전에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 경쟁의식을 느꼈었다. 엽연채가 자신의 정혼자는 소년수재이니 분명 과거 시험에 급제할 거라고 호언장담하자, 엽영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자신의 정혼자인 사촌 오라버니에 대해서 떠들고 다녔다. 그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라 과거 시험에 급제하지 않아도 이미 황제 등 귀인들에게 눈도장을 찍어 이름을 날리고 있고, 적성대에서 두베라는 칭호도 얻었다는 내용이 주였다.

엽영교는 혼례식을 올리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미뤄지더니 결국 엽연채가 먼저 혼례식을 올렸고, 그녀는 여전히 혼례식을 올리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갑자기 엽영교가 자기 입으로 혼례식 날짜를 미루겠다고 하다니?

엽영교는 굳은 표정으로 연꽃 문양이 들어간 비단 손수건을 비틀어 짜더니 작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사실 이 일을… 전부터 너에게 이야기하고 싶었어. 저번에 이채의 혼례식 전에, 그러니까 적성대에서 만나고 그 바로 다음 날에 내가 물건을 사러 가자고 그랬잖아. 그때 이 이야기를 하려고 했었어.

그런데 그날 큰새언니가 갑자기 따라오겠다고 하더니, 너에게 혼수를 빌려주라는 이야기를 꺼내 너와 큰새언니가 심란해했잖아. 그래서 내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 않았어. 그러고 나서… 시간이 지나다 보니 그 이야기를 꺼내기가 민망하더라고.”

엽연채는 그 말을 듣고 순간 멍해졌다. 어쩐지 엽영교가 적성대에서 만나고 그 바로 이튿날 또 물건을 사러 가자고 약속을 잡는다 했더니, 자신에게 할 말이 있어서 그런 것이었다.

“말해 보세요. 민망할 게 뭐가 있어요.”

엽연채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엽영교는 입술을 깨물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날 적성대에서 바둑 대결이 끝난 후, 엽이채가 가고 너와 주씨 가문 아가씨도 집으로 돌아갔잖아. 그때 기화 오라버니께서 날 불러 세우더니 지금 중요한 곡을 만들고 있으니 돌아가서 어머니께 혼례식 날짜를 미루자고 말씀드려 달라고 했어.”

“뭐라고요? 그분이 미루라고 시킨 거였어요?”

엽연채는 두 눈을 부릅뜬 채 말을 이었다.

“무슨 곡이기에 혼례식 날짜도 미뤄야 할 만큼 중요한 거래요? 혼례식이 그렇게 시간을 잡아먹는대요? 표숙께서 직접 준비하는 것도 아니잖아요. 표숙께서 손수 음식을 만들고 연회를 준비하는 것도 아니고, 하루면 되는데 그게 그렇게 방해가 된대요?”

“너무 뭐라 하지 마.”

엽영교는 엽연채가 묘기화를 질책하자 얼른 이렇게 변명했다.

“칠월 하순에 영감을 받으러 대상大商과 북방 변경 지역에 간다고 하더라. 혼례식이 팔월에 잡혀 있으니… 내년으로 미룰 수 있으면 좋겠다고 했어…….”

엽연채의 표정은 어두웠다. 엽영교도 자기 상황이 서글펐는지 옅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그 사람이 그래. 어떨 땐 곡 하나 짓겠다고 몇 날 몇 밤을 지새우고 심지어 밥 먹는 것조차 귀찮아한다니까. 창작에 필요한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는 더 그래. 지금도 엄청 답답할 거야. 올해 가을 북방 변경 지역에 가서 가을 풍경을 보면 곡을 써 낼 수 있을지도 몰라. 못 가게 해서 이 시기를 놓치면 작곡에 대한 감을 잃게 될 거야.”

엽연채는 화가 치밀어 늑골 부분에서 또 통증이 느껴졌다.

“고모는 참 작곡에 대한 이해가 깊나 보네요!”

그러자 엽영교는 민망해하는 얼굴로 말했다.

“나도… 사실 작곡을 시도했던 적이 있거든……. 유감스럽게도 내가 만든 곡은 변변치 못했지만. 그래서 오라버니가 작곡할 때 어떤 기분이고 어떤 느낌인지 잘 아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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