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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93화 (93/858)

제93화

얼마 동안 정신을 잃었던 걸까? 꿈속에서조차 통증을 느끼던 엽연채가 다시 눈을 떴을 땐 침상용 휘장의 천장 부분이 시야에 들어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은 보통 크기의 방이었다. 그녀는 옻칠을 한 이목梨木 가자상 위에 누워 있었고, 창문 밑으론 화장대가 하나 놓여 있었다. 엽연채는 이곳이 자신의 방이 아님을 알아챘다.

“부인, 깨셨군요?”

이때 문이 열리더니 머리를 양쪽으로 틀어 올린 열세 살가량의 어린 여종이 안으로 들어왔다. 엽연채는 노란 옷차림의 낯선 여종을 보고는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이곳이 어디니?”

엽연채는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기에 누운 채로 물으며 이마를 살며시 문질렀다. 머리가 좀 어질어질했다. 어린 여종은 손에 놋쇠 쟁반을 들고 있었는데, 쟁반을 선반 위에 내려놓더니 미소를 지으며 설명했다.

“그저께 저녁 주 공자님께서 다쳐서 열이 펄펄 끓는 부인을 이곳으로 데리고 와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관리인이 주 공자님과 부인을 받아 주셨죠. 그날 밤 공자님께서 다시 나가셔서 의원을 불러오셨고요.”

‘그저께? 그럼 이곳에서 하룻밤을 보냈다는 말이야?’

엽연채는 자신의 왼쪽 상복부를 만져 보았다. 상처는 이미 처치했는지 꽁꽁 동여매져 있었는데도 어쩐 일인지 통증은 더 심하게 느껴졌다. 그날 저녁만 해도 이러지 않았는데 하룻밤 지나고 나니 숨 쉴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다.

“의원은 아직 별장에 계셔요. 지금 가서 모셔오겠습니다.”

여종은 그렇게 말하고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고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매 순간 통증이 느껴지니 가능하면 말을 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노란 옷의 여종이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의원이 안으로 들어왔고, 그는 진맥을 한 후 약을 처방해 주었다. 잠시 후, 발이 걷히더니 주운환이 안으로 들어왔다.

“좀 괜찮아졌어요?”

“네.”

주운환의 걱정 어린 물음에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주운환은 그녀가 누워 있는 침상 곁에 놓인 수돈 위에 앉았다.

“추길에게 상황을 알리려고 여양을 돌려보냈어요. 조금 있으면 추길과 혜연이 올 겁니다.”

이때, 아까 그 여종이 쟁반을 들고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쟁반에는 되직하게 끓여진 고기 죽이 있었다. 여종은 쟁반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고 주운환은 죽 그릇을 들고 말없이 엽연채에게 죽을 먹여 주었다. 죽을 절반 이상 먹었을 무렵 밖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연채야!”

아리따운 한 소녀가 안으로 뛰어 들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바로 엽영교였다.

“고모!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엽연채는 그녀를 보자 코끝이 찡해졌다. 그리고 발이 걷히더니 잇따라 여러 사람들이 안으로 들어왔다. 온씨, 엽미채, 묘씨 그리고 나씨도 왔고 그 뒤로 추길과 혜연이 따라 들어왔다.

“연채야, 어쩌다가 넘어진 것이냐?”

온씨는 침상으로 다가와 엽연채의 손을 꽉 쥐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왜 이렇게 조심성이 없는 게냐!”

엽연채는 그 말을 듣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혜연을 쳐다봤다. 그러자 혜연이 얼른 입을 열었다.

“그저께 아가씨와 셋째 공자께서 교외로 나들이를 가셨다가 그만 부주의로 넘어지셨죠……. 저희가 걱정이 돼서 마님께 알려드렸어요.”

“네가 이렇게 크게 다쳤는데 큰 새언니께 안 알려 드릴 수는 없잖니.”

엽영교가 얼른 그 말을 받았다.

주운환은 사람을 시켜 혜연과 추길을 데려오게 했는데, 혜연은 엽영교가 엽연채를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우선 묘씨와 엽영교에게 그녀가 무사하다고 알렸다.

엽영교는 엽연채가 중상을 입었으니 당연히 온씨에게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됐다는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온씨가 기절초풍할 테니 그저 넘어져서 다쳤다고 거짓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많이 좋아졌어요.”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모친을 안심시켰다.

“찾았으니… 아니, 아무 탈 없으니 다행이다.”

묘씨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온씨는 딸에게 아프지는 않은지, 어디를 다쳤는지, 어쩌다가 넘어졌는지 등을 물어봤고 엽연채는 하나하나 답을 해 주었다. 그러고 나서야 온씨는 이 이야기를 꺼냈다.

“걱정 말고 이곳에서 몸조리하거라. 이곳은 신양信陽 공주公主께서 혼인하실 때 혼수로 받은 별장이다. 이곳에 오기 전에 공주 마마를 뵈었단다. 공주 마마께서는 마음이 곱고 도량이 넓으신 분이라 네가 부상을 입고 이곳에 있다는 걸 아시고는 이곳에서 몸조리하는 걸 허락해 주셨다. 그리고 산삼까지 하사하셨단다.”

채 마마가 정교하고 아름다운 붉은 비단 상자를 가져왔다. 열어 보니 안에는 수염뿌리가 온전하게 보존된 야생 산삼이 들어 있었다. 아주 귀한 산삼은 아니었다. 정안후부에서도 이런 산삼을 자주 썼다. 하지만 어떤 산삼인지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부분은 공주가 하사했다는 사실이었다. 이는 무척이나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온씨는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공주 같은 황실의 자제는 정안후부와 교분을 맺을 일이 전혀 없었다. 그런데 이렇게 도움을 받게 되니 온씨는 과분한 대우에 몸 둘 바를 몰랐다.

“회복하고 나면 꼭 감사하다는 인사를 드려야 한다.”

온씨가 당부했다. 이를 계기로 공주와 가까워지려는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저 딸을 도와줬으니 그 상대가 공주이든 거지이든 상관없이 마땅히 감사 인사를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네.”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온씨와 나머지 사람들은 이곳에서 반나절 동안 머물렀다. 슬슬 떠날 채비를 할 때 묘씨가 엽영교에게 이리 일렀다.

“영교야, 너는 여기 남아 연채를 돌봐 주거라.”

“어머니, 전…….”

엽영교도 물론 엽연채 곁에 남아 있고 싶었지만, 지금은 급히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만큼 속 썩였으면 됐다!”

묘씨가 그녀를 쏘아보며 날카롭게 을렀다.

“이곳에 있어. 연채 네가 영교 좀 잘 타이르거라.”

“뭘 타이르라는 말씀이세요?”

엽연채는 묘씨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아 물었다.

“네 고모가 곧 열일곱이 되는데 시집을 가기 싫다고 하는구나!”

묘씨가 성을 내자 엽연채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고 나서야 지난번 주묘화의 성년식 때 엽미채가 자신에게 귓속말로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하나는 엽승덕이 물품 구매권을 도로 가져갔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엽영교가 혼인식을 늦추고 싶어 한다는 것이었다.

온씨와 엽미채가 동시에 엽영교를 쳐다봤고 나씨도 동의하지 않는다는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러자 엽영교의 조그만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부정하니 그녀는 난처한 나머지 쭈뼛거리며 입을 열었다.

“전 어머니랑 떨어지기 싫단 말이에요…….”

“난 네가 빨리 집에서 나갔으면 좋겠구나. 연채 좀 봐라. 어디 너처럼 응석을 부리느냐!”

묘씨는 ‘얘를 대체 어쩌면 좋니!’ 하는 눈빛으로 그녀를 다시금 노려보았다.

“할머니, 저도 여기 남아서 큰언니와 함께 있고 싶어요.”

그때 엽미채가 끼어들었다.

이곳은 풍경이 아주 근사했다. 큰언니가 출가한 이후 그녀는 집 밖에 위치한 다른 별장에 놀러 가 기분전환을 한 적이 없었다. 예전에는 큰언니, 둘째 언니, 고모와 함께 별장에 놀러 가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그런데 이제 두 사람은 이미 시집을 갔고 나머지 한 사람도 곧 시집을 가니, 집안에는 이제 그녀와 놀아 줄 사람이 없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묘씨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기가 우리 가문 소유의 별장인 줄 아느냐? 공주 마마께서 호의를 베풀어 연채가 이곳에서 몸조리할 수 있게 해 주셨다고 이렇게 여러 사람이 들어앉으면 되겠느냐.”

그 말에 의기소침해진 엽미채는 고개를 푹 숙였다. 온씨도 딸을 간호하고 싶었지만 묘씨가 말했듯이 이곳은 남의 별장이었다. 거기다 별장의 주인은 감히 가까이 다가갈 수도 없는 귀인이었다.

“내 몸이 회복되면 혼수로 받은 내 별장에 가서 함께 놀자!”

엽연채가 웃으며 동생을 달랬다. 그 말에 엽미채의 두 눈을 반짝이며 응했다.

“좋아요.”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구나.”

묘씨가 엽연채를 쳐다보며 작별을 고했다.

“수다쟁이 네 고모가 이곳에 남아 무료함을 달래 줄 게다. 그럼 우린 이만 가 봐야겠구나!”

“예.”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님, 저희는 먼저 가서 이곳 관리인에게 그만 가 보겠다고 인사를 해야겠습니다.”

나씨가 밖으로 나서며 말했다. 묘씨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고 그렇게 사람들은 우르르 밖으로 나갔다.

“추길아, 가서 채 마마를 불러오너라. 내가 부탁할 게 있다.”

엽연채가 작은 목소리로 추길을 불렀다. 방금 전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고 채 마마도 멀리 서 있는 바람에 그녀에게 넌지시 신호를 보낼 수가 없었다. 추길은 그녀의 말을 듣고 바로 밖으로 뛰어나갔다.

묘씨 일행은 청석판이 깔린 길을 걷고 있었다. 주위에는 동백꽃이 활짝 피어 있어 풍경이 참 근사했다. 마침 채 마마와 온씨는 맨 뒤에서 걸어가고 있었다. 추길은 채 마마 곁으로 뛰어가 그녀를 슬쩍 잡아당겼다.

고개를 돌린 채 마마는 추길이 자신에게 눈짓을 하는 걸 보고는 엽연채가 일이 있어 자신을 불렀다는 걸 알아차렸다. 다행히 온씨도 나씨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이쪽에는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채 마마는 얼른 돌아서서 슬쩍 자리를 떴다.

채 마마는 잰걸음으로 엽연채가 머물고 있는 방으로 돌아와 침상 곁에 다가섰다.

“아가씨, 부르셨습니까?”

“그래요.”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꺼냈다.

“앞으로 석 달 후면 향시가 있죠. 은정랑의 아들 허서가 향시를 치를 거예요. 그자가 합격하게 되면… 아마 아버지께서는 그 모자를 데리고 정안후부로 들어올 거예요.”

그러자 채 마마의 안색이 확 변했다.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코웃음을 쳤다.

“흥, 들어오고 싶으면 어디 한번 들어와 보라고 하세요. 그래 봤자 첩 아닙니까! 마님께서는 그 여인이 고개를 조아리고 차를 올리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아마… 윽…….”

말을 하던 엽연채는 상처 부위가 당겨 신음을 내뱉었다.

“조심해.”

엽영교가 그녀를 쳐다보며 염려했다.

“아마 엽승덕은 어머니께 그 외실과 허서에게 자리를 내주라고 할 거예요.”

엽연채가 이어 한 뒷말에 채 마마와 엽영교는 깜짝 놀라 두 눈을 휘둥그레 뜨며 물었다.

“설마 그럴 리가?”

“큰아가씨께서 쓸데없는 생각을 하신 게 아닐까요?”

채 마마는 얼른 말을 보탰다.

“마님은 아들딸을 낳으셨지만 그 외실은 자식 하나 못 낳아 주지 않았습니까. 큰공자님을 봐서라도 그리하지는 않으시겠죠.”

“마마가 잊었나 본데 그 사람은 혈육 간의 정 따윈 신경도 안 쓰는 사람이에요. 저번에는 장박원을 위한답시고 내 혼수를 빼앗으려고 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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