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92화 (92/858)

제92화

주운환은 관아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안에는 오십 대로 보이는 조금 통통한 사내가 한 청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청년 옆에는 조그만 가마가 세워져 있었다.

“등 공자님, 걱정 마세요. 이 일은 절대로 외부에 발설되지 않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부윤 대인.”

등 공자는 통통한 사내에게 거듭 감사의 말을 전한 후 하인을 시켜 가마를 지게 하고 관아를 나섰다. 주운환은 등 공자도 사람을 데리러 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저 조그만 가마 안에 타고 있는 사람은 분명 납치당한 그의 가족일 것이었다.

“공자님께서는 누구이신지요?”

고개를 돌린 정 부윤이 주운환을 보고 물었다.

“저는 정국백부 주씨 가문의 셋째입니다. 내자를 데리러 왔습니다.”

“정국백부 사람도 납치됐어요?”

주운환이 자신을 소개하자 정 부윤은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그는 당연히 몰락한 가문인 정국백부와 정국백부의 주인 주 백야를 알고 있었지만, 그 댁 둘째 공자와 셋째 공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정 부윤은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귀족 가문 소녀들은 이미 집안사람들이 다 데려갔습니다. 방금 전 그 아가씨가 마지막 사람이었어요. 지금 관아에 남아 있는 소녀들은 전부 평범한 백성들의 여식입니다.”

부윤은 명문대가 사람들과는 다 면식이 있었기에 그들이 납치됐던 여식을 얼른 집으로 데려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었다. 하지만 평범한 백성들의 여식은 그리할 수가 없었다. 실수로 잘못 데려가기라도 하면 어찌하겠는가? 그래서 내일 날이 밝으면 천천히 사람들을 집으로 돌려보낼 생각이었다.

“가서 좀 보겠습니다!”

그 말을 들은 주운환은 낯빛이 새파래졌고 마음은 점점 더 불안해졌다.

“그렇게 하시죠!”

가족을 걱정하는 마음을 어찌 모르랴. 정 부윤은 선선히 주운환을 데리고 큰 방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상 몇 개가 차려져 있었고 얼굴이 온통 먼지투성이인 소녀들이 부윤이 준비한 음식을 먹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면 곁채로 자리를 옮길 예정이었다.

주운환은 그들을 쓱 훑어보고는 엽연채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표정이 더욱 어두워졌다.

“여기 있는 사람들이 전부입니까?”

여한이 안색이 새파랗게 질린 채 외쳤다.

“공자님, 셋째 마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습니다! 부윤 대인, 사람을 잘못 데려간 건 아닙니까? 아니면 혹시 정안후부 사람이 와서 사람을 데려갔습니까?”

“정안후부요?”

정 부윤이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저희 셋째 마님 친정이 정안후부입니다.”

그러자 부윤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단정했다.

“잘못 데려갔을 리가 없네. 가족들이 직접 와서 데려갔거든. 납치당했던 소저들이 데리러 온 사람이 자기 가족인지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여야 데려갈 수 있게 했다네.”

“그럴 리가 없습니다. 어째서 셋째 마님께서는 여기 안 계시는 겁니까? 아주 예쁘게 생기셨어요! 서,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여한은 감히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다.

“몇 명이 불행히도……. 에휴, 앞에 보이는 소의장小儀庄에 안치되어 있습니다.”

주운환과 여한은 그쪽으로 냅다 달려갔다. 소의장은 관아에 살인 사건이 났을 때 시체를 안치해 놓는 곳으로, 감옥 옆에 위치했다. 소의장 안으로 들어가 황급히 살펴보니 돌침상 위로 시신 다섯 구가 안치돼 있었다. 다행히 엽연채는 거기에 없었다.

주운환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서둘러 소의장 밖으로 나왔다. 정 부윤은 동정 어린 눈빛으로 주운환을 쳐다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어쩌면 아직 밖에 있을 수도 있는데, 그럼 어찌 됐을지는 아무도 모르지.’

정 부윤은 주운환을 위로하듯 설명을 덧붙였다.

“아직 잔당들이 도중 중입니다. 포두捕頭(포졸 대장)가 부하들을 이끌고 전력을 다해 추격하고 있지요. 만약 부인께서 아직 밖에 계시다면 금세 찾을 수 있을 겁니다!”

“감사합니다, 부윤 대인.”

주운환은 감사를 표하며 서둘러 문밖을 나섰다. 주운환과 여한은 다시 말을 타고 대로로 달려갔는데, 군사를 빌리러 간 여양은 이때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었던 주운환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너는 가서 여양을 찾아오너라. 군사를 빌리면 즉시 도성 밖으로 나와 평유파 부근에서 소저를 찾거라!”

“예!”

여한은 대답하자마자 돌아서서 말을 채찍질하며 떠나갔다.

주운환 손에는 늘 양왕의 친필 명령서가 들려 있었다. 그는 그걸 이용해 성문을 열고 평유파 부근으로 정신없이 말을 몰았다. 주운환은 말을 타고 칠흑같이 깜깜한 관도官道를 질주했다. 싸늘한 바람이 귓가를 휙휙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조금 전 금위군 통령의 여식을 찾기 위해 애를 쓰던 일이 떠올랐다. 결국 금위군 통령의 여식은 찾아냈다. 그런데 엽연채도 납치를 당했을 줄은 몰랐다. 주운환은 생각하면 할수록 마음이 괴로웠다.

* * *

한편, 엽연채는 산비탈에 누워 3척尺 정도 길이의 잡초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다. 멀리서 이리의 울음소리가 들려왔고 이름 모를 작은 짐승들의 울음소리도 귓가를 파고들었다.

그녀는 도망치고 싶었으나 숨만 쉬어도 복부에서 통증이 느껴져 움직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격통에 식은땀이 계속해서 흘러내리고, 머리도 어지러워 정신이 아득했다. 엽연채는 절망감에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곳에서 이렇게 죽는구나!’

그런데 이때, 산비탈 위쪽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더니 이어서 누군가가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하나 몸을 일으킬 수도 없는 판국에 무엇을 할 수 있으랴. 엽연채는 그저 멍하니 눈만 뜨고 있을 뿐이었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더니 결국 그 사람은 위에서 미끄러져 내려왔다.

“연… 채!”

풀숲으로 미끄러져 내려온 주운환은 묻히듯 잡초에 가려져 있는 엽연채를 보더니 놀라움과 기쁨이 뒤섞여 있는 표정을 지었다. 엽연채는 귓가에 울리는 목소리를 듣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커다란 두 눈에 초점이 맞춰지더니 곤혹스러워하는 그의 잘생긴 얼굴로 시선이 향했다.

“와 주셨군요…….”

말을 내뱉자마자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자신을 구하러 올 사람이 아무도 없으리라고 여겼는데, 이렇게 주운환이 그녀에게 온 것이다.

자신은 버려진 상황이었다. 양왕이 다른 소녀만 구출하고 이쪽은 버리는 걸 두 눈 뜨고 똑똑히 지켜보았다. 다들 구출되었는데 자신만 혼자 버려졌다.

‘내가 그렇게도 미운 걸까?’

양왕이 인간의 도리를 지키지 않고 자신을 이곳에 남겨두었다는 건 그만큼 자신이 이곳에서 죽기를 간절히 바랐다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명예를 무척이나 따지는 사람이니 자신의 생사에 관여하지 않을 테고, 주씨 가문 사람들은 애초에 자신이 사라지기만을 바라는 사람들이었다. 고모와 다른 사람들은 능력에 한계가 있어 결국 자신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은 주운환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양왕의 사람이었고, 이미 저번 일로 양왕은 주운환에게 상당히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또 자신을 구하겠다고 하면 양왕은 더욱더 그를 신뢰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거기다 자신은 아팠다. 그것도 죽을 만큼 아파 내일까지 버티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엽연채는 더 이상 희망을 품지 않았다. 들짐승에게 물려 죽지 않더라도 상처로 인한 통증으로 죽을 게 분명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주운환이 저를 구하러 온 것이다.

엽연채는 더는 버티지 못하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

“흑, 아파요……. 허어엉……!”

“어디가 아파요?”

주운환은 서럽게 우는 그녀를 보니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고 얼른 그녀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엽연채는 왼쪽 가슴 아랫부분을 살짝 만졌다. 그런데 하얀 달빛 아래 비춰보니 혈흔이 보이지 않았다. 주운환은 상처 부위가 어떻게 다친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어 이리 물었다.

“제가 좀 봐도 될까요?”

그러자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운환은 이것저것 따질 상황이 아니라 속히 그녀의 옷섶을 풀어 헤쳤다.

엽연채는 매화 암문이 들어간 하얀빛을 띠는 노란색 윗옷과 촘촘히 짜인 하늘거리는 담홍색 치마 차림이었다. 도망치면서 구르고 넘어지느라 옷은 이미 엉망이 된 상태였지만, 하얀 달빛을 맞고 있어서 그런지 엽연채는 흐트러진 모습임에도 여전히 아름다웠다.

곧 수놓인 주황색 속옷 절반이 어렴풋이 그의 시야에 들어왔다. 윗옷을 살짝 들추어 보니 피가 흐른 흔적은 없고, 왼쪽 아랫배 위로 커다랗게 부은 혹이 있었다. 주운환은 어두운 표정으로 혹을 만져 보더니 늑골 한 대가 부러졌음을 알아차렸다.

주운환은 고개를 들어 엽연채의 얼굴을 쳐다봤다. 엽연채는 두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위로 말린 그녀의 기다란 속눈썹은 눈꺼풀 근처에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곱고 아리따운 얼굴은 새파랗게 질려 있었고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어떻… 습니까?”

숨조차 제대로 쉴 수가 없는 그녀가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별거 아닙니다. 그냥 넘어져서 다친 거예요.”

주운환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부러 그녀가 정확히 어떻게 다쳤는지 사실대로 말해 주지 않았다. 이럴 때는 자신의 상태를 모르는 편이 더 나았다. 자신이 심하게 다쳤다는 걸 알게 되면 더욱 견뎌내기 힘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엽연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래도 통증은 여전히 느껴졌다. 창백한 얼굴에선 콩만 한 크기의 구슬땀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주운환은 골절로 인한 통증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잘 알고 있었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벌써 기절하고도 남았을 텐데, 그녀는 그 고통을 지금까지 꾹꾹 참아 내고 있었던 것이다. 경이로울 만큼의 참을성이었다.

“…갑시다!”

주운환은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아 올렸다. 몸이 흔들리자 엽연채의 얼굴이 한층 더 하얗게 질렸다. 그녀는 식은땀을 줄줄 흘리며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하룻밤을 그렇게 고생했으니 이미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고, 거기다 중상을 입기까지 했다. 엽연채는 그의 품에 기대어 이내 정신을 놓고 말았다.

주운환은 엽연채의 몸에서 긴장이 풀린 걸 느끼고는 그녀가 기절했음을 알았다. 그러자 그의 마음은 더욱 초조해졌다. 주운환은 그녀를 안고 산비탈을 올라가 말에 오른 후 조심스럽게 그녀를 자신에게 기대어 앉게 한 다음 빠른 속도로 말을 몰았다.

말이 한 발씩 내디딜 때마다 엽연채는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서도 주운환이 입은 홑옷의 옷섶을 꽉 쥐었다. 어찌나 꽉 쥐는지 주운환이 그 손길에 통증을 느낄 정도였다.

그의 낯빛은 더욱 어두워졌다. 이렇게 흔들리면서 가면 그녀의 부상이 더욱 심각해질 것이었다. 주운환은 마차를 가져오지 않은 것을 몹시 후회했다. 거기다 열이 나기 시작하는 듯, 엽연채의 몸이 점점 뜨거워지고 있었다.

도성에 도착하려면 아무리 속도를 낸다 하더라도 반 시진은 더 걸릴 것이었다. 주운환은 잠시 고민을 하더니 말 머리를 돌려 도성 반대 방향으로 말을 몰았다.

오늘 저녁 금위군 통령의 여식을 찾으면서 우연히 근처에서 큰 저택을 보았고, 분명 불이 켜져 있던 게 기억났다. 누구의 집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어서 안전한 곳에 눕히지 않으면, 그녀의 목숨이 위태로워질 것이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