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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91화 (91/858)

제91화

엽연채와 녹색 옷의 소녀는 그 자리에 붙박인 듯 꼼짝도 못 하고 있었다. 말을 타고 쫓아오는 인신매매범을 더는 따돌릴 방법이 없었다.

말은 이미 코앞에 와 있었다. 캄캄한 밤 하얀 달빛 아래, 매끈하게 잘빠진 사람 형상이 튼실한 준마를 타고 다가오고 있었다. 귀해 보이는 망포蟒袍(관료나 황족이 의례 때 갖춰 입는 옷)를 입은 사내의 눈꼬리가 올라간 가늘고 긴 눈은 서늘한 안광을 번뜩였고, 매력적인 이목구비는 컴컴한 어둠 속에서도 어슴푸레 빛나고 있었다.

엽연채는 눈앞의 사람을 알아보고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는 바로 양왕이었다.

“전하! 양왕 전하! 어서 저희를 구해 주세요!”

그를 알아본 녹색 옷의 소녀는 흥분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 고통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녀는 절뚝거리며 양왕을 향해 달려갔다. 엽연채도 온몸에 힘이 쫙 빠지며 긴장이 풀렸다. 다행히도 관아에서 사람을 보낸 것이었다.

양왕이 발로 말 배를 치자 말은 다가닥다가닥 소리를 내며 앞으로 다가왔다. 그는 녹색 옷의 소녀를 말 등에 태웠다. 그러고는 비웃는 듯한 눈빛으로 엽연채를 빤히 쳐다보더니, 말채찍을 휘갈기고는 뒤돌아보지도 않고 훌쩍 떠나 버렸다.

엽연채는 그들이 자취를 감춘 방향을 쳐다보며 멍하니 앉아 있었다. 조금만 기다리면 관병이 오리라고 생각했으나 한참을 기다렸는데도 한 사람도 오지 않았다. 그때 멀지 않은 곳에서 고함소리가 들렸다.

“제기랄, 어디 얼마나 도망가나 두고 보자!”

엽연채의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하얘지면서 자신을 쳐다보던 양왕의 비웃음 어린 음험하고 싸늘한 눈빛이 떠올랐다. 마치 죽은 자를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엽연채는 온몸을 부르르 떨더니, 그제야 양왕이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그 녹색 옷의 소녀만 구한 것이었다. 자신이 인신매매범에게 다시 잡혀가든 이곳에서 죽든 상관하지 않고 인적 없는 깊은 산속에 버려둔 것이었다.

그러자 불현듯 지난번 법화사에서 자신의 목을 겨누었던 강철 검이 떠올랐다. 차갑고 서늘했던 그 느낌.

엽연채는 요즘 엽이채와 엽승덕을 상대하는 데만 온 신경이 쏠려 있어 목에서 감돌던 강철 검의 싸늘한 냉기는 까맣게 잊고 지냈었다. 양왕은 자신을 죽이고 싶어 했다. 그에게 있어 자신은 그의 정수리 위에서 맴돌다가 언제든 떨어져서 그의 목을 댕강 잘라 버릴 수 있는 칼과 같은 존재이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지난번에는 주운환의 얼굴을 봐서 그녀를 놓아주었지만, 지금은 그와의 약속을 어기지 않고도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그저 이곳에서 죽도록 내버려 두면 그만이니 말이다.

“얼른 쫓아가! 얼른! 이곳에 발자국이 있어!”

멀지 않은 곳에서 인신매매범이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엽연채는 깜짝 놀라 몸을 덜덜 떨었고 이것저것 따져볼 겨를 없이 고통을 참고 절뚝절뚝 앞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다 그만 발을 헛디뎌 언덕 아래로 구르고 말았다.

“윽……. 으윽…….”

엽연채는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무엇에 부딪히는지도 모른 채 구르다 겨우 멈춰 선 그녀는 가슴 쪽에서 극심한 통증을 느꼈다. 눈을 떠보니 주변에 보이는 것이라고는 키가 2척尺에 못 미치는 풀뿐이었고 머리 위에는 달이 떠 있었다.

계속해서 느껴지는 극심한 통증에 이대로 까무러치거나 금방이라도 죽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인신매매범에게 들키거나 들짐승의 눈에 띌까 봐 울 수조차 없었다. 다시는 눈을 뜰 수 없을까 봐 눈을 감을 수도 없었다.

* * *

한편, 양왕이 녹색 옷의 소녀를 데리고 말을 몰아 대략 1리里 정도를 달리니 한 무리의 군사들이 보였다.

“전하!”

정 부윤이 잽싸게 앞으로 다가오며 고했다.

“소관이 실종된 소녀들 열세 명을 구했습니다. 그 외 다섯 명은 불행히도 목숨을 잃고 말았습니다. 아, 전하 쪽에는 아무도 없었습니까?”

양왕은 말없이 싸늘한 눈빛으로 부윤을 쓱 쳐다보더니 녹색 옷의 소녀를 동작이 굼뜬 어멈에게 보냈다. 소녀는 계속해서 몸을 떨고 있었는데, 겁을 잔뜩 집어먹어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보였다.

부윤은 아무 말도 안 하는 양왕을 보고는 더는 아무도 없는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히도 도망치는 소녀와 마주쳤으니 망정이지, 안 그랬으면 그것들이 어디에 숨었는지 못 찾아낼 뻔했습니다!”

정 부윤은 그렇게 말하더니 뒤에 서 있던 군사들에게 손짓했다.

“그만 가자!”

일렬로 서 있던 관병들과 위병들은 양왕, 부윤과 함께 이곳을 떠났다. 양왕의 곁에서는 노인이 한 명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는 바로 양왕의 막료였다. 그가 작은 목소리로 고했다.

“전하, 주씨 가문 셋째 공자와 다른 한 명 쪽도 마무리되었다고 합니다.”

“알겠다. 다들 대오를 정비하거라!”

양왕은 입꼬리를 씨익 올리더니 채찍을 휘두르며 유유히 떠나갔다.

부윤은 구출된 소녀들을 데리고 인신매매범들을 체포해 도성으로 돌아왔다. 이 인신매매 일당은 이번 범행이 처음이 아니었다. 몇 년 전에도 도성 내에 소녀들이 실종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범행 수법이 아주 교묘해 범인들을 붙잡지 못했었다.

올해 이 인신매매 일당은 더욱 기승을 부렸고, 이번에는 귀족 소녀들에게 눈길을 돌렸다. 크게 진노한 황제는 부윤과 양왕, 용왕에게 수사와 체포를 맡겼다.

납치된 소녀들 중에는 금위군 통령의 적녀도 있었다. 양왕은 이전부터 금위군 통령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이고 싶었기에, 자신의 수하들을 두 조로 나눠 수색하게 했다. 자기 쪽 사람이 먼저 그 소녀를 구해야만 했다.

* * *

하늘에 뜬 상현달이 이미 서쪽으로 기울어 황성 근교의 숲에는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주운환은 여양, 여한과 함께 말을 몰고 칠흑같이 깜깜한 숲속을 지나가고 있었다.

이때 등 뒤에서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주운환이 고삐를 잡아 말을 세우고 뒤를 돌아보니 한 청년이 말을 타고 빠른 속도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는 가까이 다가오지 않고 ‘워워’ 하며 고삐를 당겨 말을 멈춰 세웠다.

깜깜한 밤이라 주운환은 그의 얼굴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없었지만 전체적인 윤곽만 봐도 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볼 수 있었다. 바로 양왕을 곁에서 모시는 호위무사인 언동이었다.

“주 공자, 양왕 전하께서 금위군 통령의 여식을 찾아내셨습니다. 그리고 납치됐던 소녀들도 구출됐습니다.”

언동이 고했다.

“어디서 찾았느냐?”

주운환이 입꼬리를 올리며 물었다.

“인신매매 일당이 사람들을 숨겨 놓은 근거지가 평유파平幽坡 부근인지라 그곳에서 찾아냈습니다.”

주운환은 말고삐를 조이며 고개를 돌려 언동에게 말했다.

“가서 전하께 먼저 간다고 전해 드리거라.”

언동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말을 몰고 떠나갔다.

“가자!”

주운환이 발로 말의 배를 툭 치고 채찍질을 하며 달려가자 여양과 여한도 얼른 그의 뒤를 쫓았다. 말 세 필이 쏜살같이 밀림을 헤치고 지나갔다.

그들이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인시寅時(새벽 3시~5시) 이각이었다. 주운환이 여양과 여한을 데리고 서쪽 측문으로 들어가 난죽거 문 앞에 도착하니 추길과 혜연이 근처 버드나무 밑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깜짝 놀란 여한이 얼른 그들 곁으로 다가갔다.

“오밤중에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잠 안 자니?”

여한은 뻘겋게 충혈된 둘의 눈을 보며 엽연채에게 혼쭐이라도 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오늘 벌어진 일로 완전히 녹초가 된 추길은 더 이상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그녀는 비꼬는 듯이 쏘아붙였다.

“아가씨께서 지금 어디 계신지도 모르는데, 셋째 공자님께서는 한가하게 기루나 들락거리셨나 보네요.”

주운환을 탓할 일이 아닌 줄이야 똑똑히 알았지만 추길은 그만 참지 못하고 그에게 화풀이를 해 버렸다. 한밤중이 되도록 집에 돌아오지 않으니 기루에 들락거린 게 아니면 뭘 했단 말인가?

혜연이 엉엉 울며 상황을 설명했다.

“아가씨가 인신매매범한테 납치당했어요…….”

“뭐라고?”

여양은 깜짝 놀라 소리를 질렀고 주운환은 순간 멍해지더니 이내 낯빛이 새파랗게 변했다.

“아가씨께서 오늘 도성 서쪽에서 인신매매범에게 잡혀갔어요. 셋째 공자님께 찾아봐 주십사 부탁드리려고 했는데 공자님은 하루 종일 코빼기도 보이시지 않았죠.”

혜연이 울면서 말을 이었다.

주운환이 몰락한 가문의 자식이기는 하지만 어쨌든 엽연채의 남편이었다. 혜연과 추길은 주운환을 믿음직하게 생각해 그에게 이 사실을 알리고 도움을 구하려고 했다. 그런데 온종일 기다려도 그의 모습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가자!”

주운환은 말을 내뱉기가 무섭게 이미 돌아서서 밖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여양은 따라가기 전에 혜연과 추길을 안심시켰다.

“걱정 마! 관아에서 이미 인신매매범을 잡았고 소녀들도 구출됐어. 셋째 마님께서도 분명 관아에 계실 거야. 우리가 얼른 가서 마님을 모셔 올게.”

“뭐? 정말이야?”

혜연과 추길이 고개를 휙 쳐들더니 기쁨과 놀라움이 뒤섞인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추길은 바로 벌떡 일어섰다.

“나도 갈래!”

“너희는 여기서 기다려. 가서 따뜻한 물과 갈아입을 옷을 준비해 줘. 우리가 얼른 모셔올 테니까.”

여양은 그 말을 남기고는 급히 주운환의 뒤를 쫓아갔다. 추길과 혜연은 몇 걸음 쫓아가다가 다시 방 안으로 달려 들어갔다. 안정을 되찾은 두 사람은 엽연채가 돌아오면 바로 목욕할 수 있도록 물건들을 챙겼다.

* * *

문밖을 나선 주운환은 다시 말에 올라 관아를 향해 쏜살같이 질주했다. 어두컴컴한 장승가에는 행인도 노점상도 거의 없어 널찍한 길에는 스산함과 적막함만이 감돌았다. 주운환 일행이 탄 말 세 필만이 대로를 내달리고 있었다.

주운환은 어딘지 마음이 불안했다. 왠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어, 그가 말고삐를 꽉 움켜쥐었다.

“여양아, 너는 양왕 전하의 저택에 가서 군사들을 빌려 오거라.”

주운환의 냉랭한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그에게 전해졌다.

“예!”

주운환과 여양, 여한은 이미 도성 중심부에 들어서 있었다. 여양은 즉시 방향을 돌려 다른 대로로 꺾어 들어갔고, 주운환은 여한을 데리고 그대로 관아로 직행했다.

관아에서는 구출된 소녀들을 집으로 돌려보내느라 뒤뜰이 불빛으로 환했다. 주운환과 여한이 관아의 후문에 도착하니 문은 잠겨 있지 않았고 아역衙役 두 명이 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들은 주운환을 보더니 앞을 막아서며 물었다.

“사람을 데리러 오셨나요?”

부윤이 사람을 시켜 소녀들이 구출됐다는 소식을 서신에 적어 실종자의 집으로 발송한 후였다.

“그렇소.”

주운환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 가문에서 오셨나요?”

아역은 잘생긴 주운환을 보고는 평민이 아님을 짐작했다. 그것도 그렇고 애초에 평민은 이런 야심한 시각에 사람을 데리러 올 수 없었다.

“정국백부 주씨 가문 사람이오. 내자를 데리러 왔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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