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화
수화문 밖으로 걸어간 엽학문은 마차에 오른 후 관아로 향했다. 관아에 도착하니 부윤은 보이지 않고 비장裨將(관아 수장의 무관武官 수행원으로 비서 격 관직임)이 나와서 그를 맞이했다. 엽학문이 물어보니, 부윤은 병사들을 이끌고 인신매매범을 잡으러 갔다고 했다.
비장은 목소리를 낮추어 엽학문에게 속삭였다.
“요즘 인신매매범이 기승을 부린다고 합니다. 명문대가 여식들이 몇이나 실종됐어요. 크게 노하신 황제 폐하께서 금위군의 상관 통령統領과 부윤에게 반드시 인신매매범을 체포하라고 명하셨고요.”
엽학문은 그 말을 듣고 안심했다. 윗선에서 이 일을 중요하게 보고 있는 이상 자신은 따로 할 일이 없었다.
“그런데 엽 후야께서 여긴 무슨 일로 오셨나요? 설마 후부의 여식도……?”
비장은 엽학문을 힐끗 쳐다보며 말꼬리를 흐렸다.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거요. 우리 가문 여식들은 모두 집에서 잘 지내고 있소.”
엽학문은 자기 손녀가 붙잡혀 갔다는 사실을 비밀리에 부치려고 이렇게 둘러댔다.
“도성 서쪽에 인신매매범이 출몰했다는 이야기를 들어 이 일을 알리러 온 것이오.”
“아!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엽 후야. 방금 전 한 소년도 그 사실을 알리러 왔습니다. 도성 서쪽에 인신매매범이 나타났다고 하더군요. 저희가 즉시 사람을 보내 통령과 부윤께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엽학문은 고개를 끄덕인 후 관아를 나섰다. 엽학문이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경인이 이미 추길과 혜연을 정국백부로 데려간 후였다.
혜연은 한시바삐 집으로 돌아가 셋째 공자님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경인을 재촉했다. 하지만 막상 궁명헌에 가 보니 주운환은 물론이고 평소 집에 남아 있는 여한마저 보이지 않았다. 추길과 혜연은 타는 듯 초조한 마음으로 소식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 * *
한편, 정신이 몽롱한 엽연채는 자신이 덜컹거리는 마차 안에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런데 머리가 어찌나 무거운지 눈을 뜰 수조차 없었다.
신부 맞이 행렬이 지나갈 때 주변은 폭죽 소리와 즐겁고 흥겨운 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자신의 곁에는 추길과 혜연이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가 소란스러운 틈을 타서 갑자기 뒤에서 입과 코를 틀어막았고, 그녀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그런 후에 이제야 조금 정신을 차린 것이었다.
“아따, 아가씨 얼굴 한번 곱게 생겼네. 최상급이야! 공연히 애를 쓴 게 아니었어.”
마차 밖에서 사내의 거칠고 추잡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그저께 벽수루에서 보고 침 발라 놓았잖아. 이틀 동안 쫓아다녔지만 기회가 오지 않아 포기하려 했는데, 오늘 이렇게 밖으로 나올 줄이야. 제 발로 그물에 걸려들었어!”
엽연채는 이 말을 듣고 머리가 한층 더 어질어질했다. 그녀는 단오절에 엽승덕이 인신매매범이 출몰하니 엽균에게 자신을 바래다주라고 했을 때, 혈옥분경을 손에 넣을 수 있도록 엽승덕이 꾸며낸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인신매매범이 출몰한다는 이야기가 정말 사실이었을 줄이야. 게다가 이 인신매매범들은 일찌감치 자신을 점찍어 놓은 듯했다. 다만 행동에 옮길 기회를 포착하지 못했는데 마침 오늘 자신이 외출을 하자 이때를 노린 것 같았다.
정신이 아득해져서 온몸에 힘이 쫙 빠졌지만, 엽연채는 입술을 꽉 깨물고 맑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가위에 눌려 고통스러울 때처럼 지금 상황이 좀처럼 현실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인신매매범들이 자신이 더 이상 움직일 힘이 없다고 판단했는지 손발을 묶어 두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엽연채는 조금씩 손을 움직여 머리에 꽂은 장신구를 뽑은 후 살짝 위로 들어 올려 옷소매에 달린 주머니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가게 했다. 그런 후에는 몸을 조금 더 움직여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만약 지금 마차에서 뛰어내릴 수 있다면 그게 가장 상책일 터였다.
“워!”
그때 사내가 크게 소리치는 것과 동시에 마차가 멈춰 섰다. 엽연채는 깜짝 놀라 더 이상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윽고 마차의 발이 걷히더니 엽연채는 밖으로 끄집어 내려졌고 누군가가 그녀를 어깨에 메고 걸어갔다.
엽연채를 둘러메지 않은 사내가 곁에서 말했다.
“우선 이틀은 가만히 있자. 요즘 빌어먹을 관병官兵들이 샅샅이 수사하고 있거든.”
엽연채는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계속해서 기절한 척했다. 그녀를 어깨에 메고 가던 사내는 한참을 걸어가더니 그녀를 집어던졌다.
“머리에 꽂은 걸 싹 다 뽑아!”
방금 전 관병 운운하던 사내가 말했다. 그러자 걸걸한 목소리를 가진 다른 사내가 알겠다고 대답한 후 그녀의 머리에 꽂혀 있는 금잠 등을 전부 뽑아냈다. 이윽고 누군가가 그녀의 양손을 등 뒤로 묶고 입도 틀어막았다. 주위에서는 흐느껴 우는 소리만 들렸다.
“이거 풀어라! 내 아버지가 금위군禁衛軍의 상관수 통령統領이시란 말이다! 그런데 감히 날 납치하다니, 풀어 줘! 풀어 주란 말이야! 안 그러면 비참한 말로를 맞을 것이다!”
문밖에 있던 사내의 걸걸한 목소리가 울렸다.
“왜 안에서 또 고함소리가 들려오는 거야?”
“입을 틀어막았던 천이 빠졌나 봐. 가서 다시 틀어막고 올게!”
문이 발칵 열리고 안에서 ‘웁웁’ 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곧 조용해졌다.
“에잇, 재수 옴 붙었어. 왜 하필 금위군 통령의 딸을 잡은 거야.”
사내는 여인을 묶으며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뜨거운 감자 같은 거지!”
“잡아야지 별수 있어? 뭐 죽이기라도 하려고? 놔줄 수도 없고 죽일 수도 없잖아. 어차피 손에 들어온 거 그냥 팔아 버리자고!”
다른 인신매매범이 끼어들었다.
“하하, 큰형님이 이미 완벽한 방법을 찾았어. 내일이면 저것들을 도성 밖으로 운반할 수 있어! 내가 먼저 가서 관병들의 주의를 끌 테니 네가 나중에 와서 뇌물을 좀 먹여.”
그 말을 들은 엽연채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녀는 머리가 점점 더 무거워지더니 다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얼마쯤 지났을까. 엽연채는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고 주위를 둘러보니 이곳은 어두침침한 돌집이었고, 천장에 달린 천창天窓을 통해 밖을 내다보니 이미 해가 진 후였다. 주변에는 스무 명 정도의 소녀가 있었는데, 모두 등 뒤로 손이 결박당하고 입이 틀어막힌 채였다.
엽연채가 등 뒤로 묶인 손을 움직이자 운 좋게도 머리꽂이가 미끄러져 나왔다. 이 머리꽂이는 단풍잎 모양이라 가장자리가 아주 날카로웠다. 그녀는 머리꽂이를 끈에 문지르기 시작했고 반 시진 동안 그렇게 문지른 끝에 마침내 손을 묶고 있던 줄을 끊었다.
“읍, 우우!”
옆에 있던 소녀는 엽연채가 줄을 끊는 걸 보고는 흥분해서 마구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엽연채는 자기 입에 물린 천을 확 잡아채더니 ‘후우’ 하고 숨을 내쉬고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쉿’ 소리를 냈다. 하지만 아가씨들은 얼른 이곳에서 달아나고 싶다는 생각뿐인지라 죽기 살기로 ‘우우’ 소리를 내며 발버둥 쳤다.
“무슨 소리냐!”
밖에서 인신매매범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또 소리를 내면 죽여 버릴 거야!”
엽연채는 상황 파악을 하지 못 하는 아가씨들 때문에 열이 받았지만 그들을 저지할 방법이 없었다. 하는 수 없이 그녀는 주위를 둘러보며 쓸 만한 무기가 있는지 찾아보았다. 구석에 놓인 큰 사발 크기의 돌덩이가 눈에 들어왔다.
“아오, 시끄러워 죽겠네! 왜 이렇게 말을 안 들어 처먹어!”
고함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덜커덕 열리며 한 청년이 걸어 들어왔다. 간편한 차림을 한 그는 작고 마른 체구에 쥐새끼처럼 인상이 사악했다. 그는 손에 커다란 호리병 두 개를 들고 있었다.
“시끄러워 죽겠다고! 내가 그만하라고 했지!”
그 청년은 침을 퉤 뱉더니 호리병 마개를 열었다. 그러고 나서 한 소녀를 잡아끌더니 입을 틀어막고 있는 천을 빼낸 후 뭔가를 입 속으로 집어넣으려고 했다. 문 근처 모퉁이에 앉아 있던 엽연채는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저건 분명 사람을 곯아떨어지게 하는 약물이었다. 약을 써야 아무 탈 없이 소녀들을 도성 밖으로 옮길 수 있을 테니까.
엽연채는 마음이 초조해졌다. 밖에 사람이 얼마나 더 있는지 알 수 없지만 지금은 이것저것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녀는 돌덩이를 집어 들어서는 그 인신매매범의 뒤통수를 퍽 내리쳤다.
“아악!”
인신매매범은 외마디 비명을 지르며 땅으로 고꾸라지더니 고통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러 댔다. 엽연채는 잽싸게 다가가 아까 잡아 뺀 천으로 인신매매범의 입을 틀어막았다. 다행히도 한쪽에 있던 소녀 둘이 상황을 보고 달려오더니 그 인신매매범을 있는 힘껏 짓눌렀고 엽연채는 얼른 아까 자신이 끊어 냈던 밧줄로 그를 뒷짐결박했다.
엽연채는 바로 도망치지 않았다. 엄두가 나지 않기도 했거니와, 차마 이 아가씨들을 모른 척할 수 없던 것이다. 그렇게 인신매매범을 결박한 엽연채는 그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도를 꺼내 들어 아가씨들의 손목에 묶여 있는 밧줄을 하나하나 끊어 주었다.
“우우으읍……! 어, 어서 도망가요!”
아가씨들은 울부짖으며 벌떼처럼 우르르 달려 나갔다. 엽연채도 마지막 소녀의 줄을 잘라 준 다음 바로 뛰어나갔다. 그런데 밖에 나가 보니 보이는 것이라고는 산과 들판뿐이었다. 엽연채는 이것저것 따질 겨를 없이 일단은 그 소녀들과 함께 달아나려고 했다.
“뭐 하는 거냐?”
뒤에서 누군가가 큰 소리로 고함을 질렀다.
“둘째 형님, 이것들이 도망가려고 해요! 빨리 사람들을 불러요. 뒤쫓아야죠!”
엽연채와 소녀들은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져 도망치기 시작했다.
엽연채는 자신이 얼마나 달렸는지, 그 인신매매범들이 다시 얼마나 붙잡아갔는지, 그들이 자신을 쫓아오는지 아닌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다. 그저 멈추지 않고 내달릴 뿐이었다.
처음에 엽연채와 함께 달아나던 소녀들은 대여섯쯤 되었는데, 달리고 또 달리다 보니 일부는 다른 방향으로 흩어졌고 또 일부는 뒤쫓아오던 인신매매범에게 따라잡혔다. 어느 산비탈에 다다르자 그녀 곁에 남은 사람은 녹색 치마를 입은 소녀 하나뿐이었다.
“아이코!”
소녀가 비명을 지르더니 넘어지면서 엽연채의 치맛자락을 잡았다.
“앗!”
엽연채 역시 그녀에게 끌려 넘어졌고, 두 사람은 함께 바닥을 나뒹굴었다.
“아윽!”
엽연채는 비명을 내질렀다. 발목에서 통증이 느껴졌다. 소녀가 잡아당겨 넘어질 때 발목이 접질린 모양이었다. 엽연채는 고통스러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으, 무릎이야……! 아파 죽겠네…….”
녹색 옷의 소녀도 땅에 앉아 울부짖었지만 그래도 안간힘을 써서 일어섰다.
“어서 가요. 안 그러면 인신매매범이 쫓아올 거예요!”
엽연채는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발목이 아팠지만 그래도 걸어야만 했다. 인신매매범이 언제 쫓아올지 누가 알겠는가. 녹색 옷의 소녀도 넘어지면서 무릎을 다쳤기 때문에, 두 사람은 서로를 부축하며 움직일 수밖에 없었다.
“이랴!”
그때 말을 몰며 내는 입소리와 함께 쏜살같이 달려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