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화
엽연채는 돈 자루를 꺼낸 후 이유를 설명해 주었다. 제민은 그녀의 설명을 듣고 그간의 사정을 이해하게 되었고 곧이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렇게 된 거였군요. 아가씨 숙부 내외가 제게 보복하는 바람에 제가 보름이나 손해를 보게 된 거네요?”
엽연채는 미안함 가득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이 돈이면 충분할지 모르겠어요.”
제민이 돈 자루를 열어 보니 커다란 말굽은 한 개, 작은 말굽은 두 개, 그리고 은전銀錢 여러 개가 안에 들어 있었다. 어림잡아도 은화 백 냥은 넘어 보였다. 제민은 두 눈을 반짝이더니 껄껄 웃었다.
“충분하고 말고요! 이 돈이면 내년 춘시春試 때까지도 버틸 수 있을 겁니다.”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과거 시험 때문에 어제 뵈었던 초 공자와 함께 도성으로 온 겁니까?”
“네.”
제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엽연채는 덕담을 건넸다.
“초 공자께서 하루빨리 과거 시험에 급제하길 기원합니다.”
“저도 그 말씀대로 되길 간절히 바랍니다.”
제민은 기뻐하며 주방으로 가더니 수박을 들고 왔다. 엽연채는 수박을 먹으면서 제민과 담소를 나누다가 날이 저물자 그녀에게 작별 인사를 건넸다. 엽연채와 여종들이 집 밖으로 나오니 저 멀리 나무 아래 마차가 세워져 있는 모습이 보였다. 경인은 끌채 위에 걸터앉아 잠을 자고 있었다.
“경인아! 경인아!”
추길이 그를 불렀지만 거리 탓에 잘 들리지 않는지 경인은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다.
“조금만 걸으면 되니 걸어가자꾸나.”
엽연채의 말에 그녀와 여종들은 길목을 향해 걸어갔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뒤에서 징과 북, 태평소 소리가 들려왔다.
엽연채 일행이 고개를 돌리자 신부 맞이 행렬이 악기를 연주하며 걸어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행렬은 폭죽을 터뜨리고 혼례식 때 하인들에게 주던 위로금과 사람들에게 나눠주는 사탕을 던지고 있었다. 백성들은 서로 갖겠다고 다투며 신부 맞이 행렬을 쫓아갔다.
“아가씨, 조심하세요.”
추길과 혜연은 얼른 엽연채 앞을 막아서며 그녀를 한쪽으로 밀었다.
펑펑! 퍼퍼펑!
한 꿰미에 죽 꿴 연발 폭죽들이 계속해서 터졌다.
“윽……!”
추길과 혜연은 폭죽이 터지면서 나는 매캐한 연기에 코를 틀어막았으나 눈에 들어가는 바람에 눈물을 흘렸다. 추길이 캑캑거리며 짜증을 냈다.
“콜록, 무슨 폭죽을 이렇게 터뜨리는 거야. 냄새 한번 고약하네! 아가씨, 괜찮으세요?”
그런데 고개를 돌리자 엽연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가씨?”
순간 멍해진 추길이 사방을 둘러보았으나 엽연채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추길은 얼른 혜연을 툭툭 치며 물었다.
“아가씨는?”
“으…….”
폭죽 때문에 눈이 벌게진 혜연은 계속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아가씨가 뭐?”
“아가씨 어디 가셨냐고!”
추길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신부 맞이 행렬과 앞다투어 위로금과 사탕을 줍던 백성들은 이미 골목 어귀를 돌아 자취를 감춘 상태였다. 골목은 방금 전의 평온함을 되찾았지만, 추길과 혜연의 마음은 어떻게 해도 조금 전의 평온함을 되찾을 수 없었다.
“추길아, 혜연아!”
이때 경인이 하품을 하며 마차를 몰고 왔다.
“자다가 신부 맞이 행렬 소리가 시끄러워서 깼어.”
그렇게 말하는 사이 마차는 이미 추길과 혜연 앞에 도착했다.
“아가씨께서는?”
추길이 얼른 마차 안으로 들어갔지만 엽연채의 모습은 역시 보이지 않았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가씨께서는 너희들과 함께 있었잖아? 왜 나한테서 아가씨를 찾아?”
뭔가 잘못됐다고 느낀 경인의 낯빛이 새파래졌다.
“아가씨께서… 방금 전까지 계셨는데 갑자기 사라지셨어!”
혜연이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째서 사라지셨다는 거야? 폭죽 연기를 피하느라고 멀리 가셨나? 아니면 그 제민 소저 집으로 다시 가신 거 아냐?”
경인이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에 추길과 혜연은 헐레벌떡 제민의 집으로 뛰어가 문을 두드렸다.
“제민 소저! 제민 소저! 어서 문 좀 열어 보세요!”
끼익 소리와 함께 제민이 문을 열었다.
“왜 다시 오셨어요? 뭐 빠뜨린 물건이라도……?”
“우리 아가씨 계시나요? 여기 오셨지요?”
추길은 초조한 마음에 날카로운 목소리로 외치며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제민이 어리둥절해하며 대꾸했다.
“여긴 오시지 않았어요.”
“그럴 리가……! 그럼 아가씨는 어디 가신 거지?”
“어서 밖으로 가서 찾아봅시다!”
사정을 대충 눈치챈 제민이 창백해진 얼굴로 말했다.
“요, 요즘 소녀들이 실종되고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이 말에 추길과 혜연은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럼 아가씨가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를 당했다는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어찌나 불안한지 두 사람의 눈이 시뻘겋게 변했다.
제민이 앞장서서 길을 안내하며 그들과 함께 여기저기로 엽연채를 찾으러 다녔다. 하지만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도록 반나절을 찾아다녔지만 그녀의 흔적도 찾지 못했다.
“얼른 관아에 가서 신고하는 게 좋겠어요!”
제민이 다급한 목소리로 외쳤다.
“요즘 관아에서도 인신매매범을 수사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진작에 관아에 신고할 걸 그랬어요!”
추길은 울음을 터뜨리며 자책했다.
“가요!”
추길과 혜연이 마차에 뛰어오르자 경인은 얼른 채찍을 후려갈기며 도성 중심부로 급히 마차를 몰았다.
혜연이 경인에게 말했다.
“잠시 후 정안후부를 지나가니 우리를 그곳에 내려 줘. 가서 노태야께 이 상황을 말씀드려 부윤과 만나시도록 할 거야. 경인이 너는 곧장 관아로 가 부윤에게 인신매매범이 도성 서쪽에 출몰했다고 알려!”
“알겠어!”
경인은 말 엉덩이에 채찍을 힘껏 갈겨 무시무시한 속도로 마차를 몰았다. 그 덕분에 이각 만에 도성 중심에 위치한 정안후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경인은 두 사람을 내려준 후 서둘러 관아로 마차를 몰았다.
추길과 혜연이 정안후부 측문으로 달려가자 문을 지키는 하인이 그들을 알아봤다. 그는 눈이 시뻘겋게 충혈된 추길과 혜연을 보더니 웃으며 말을 걸었다.
“어이구, 추길하고 혜연 아니야. 너희들 왜 눈이 벌게져서 돌아온 거냐? 큰아가씨께 쫓겨나기라도 했어?”
“잡소리 지껄이지 말고 문이나 열어!”
추길이 화를 내며 그를 냅다 밀쳤다. 그 하인이 몸을 비틀거리는 사이에 추길과 혜연은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안녕당을 향해 뛰어갔다.
* * *
안녕당에서는 묘씨와 엽영교가 서차간에서 수를 놓고 있었다. 그런데 묘씨가 찻잔을 들고 있던 손을 멈칫했다.
“어째 추길이의 목소리가 들린 것 같구나?”
엽영교가 고개를 들어 보니 과연 밖에서 추길이 주인나리를 찾는 소리와 함께 쿵쿵 요란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주인나리! 주인나리!”
추길과 혜연이 안으로 뛰어들며 목청껏 엽학문을 불러댔다.
“연채가 왔나?”
조카를 찾던 엽영교는 두 사람이 땀으로 범벅이 된 채 열기를 내뿜으며 뛰어오는 모습을 보고는 깜짝 놀라 ‘힉’ 소리를 냈다.
추길이 엉엉 울며 말했다.
“마님, 큰아가씨께서 사라지셨습니다……! 방금 전 도성 서쪽에서 벗을 만나셨어요. 헤어진 후에 골목을 걸어가고 있는데 신부 맞이 행렬과 마주쳤고요. 폭죽 연기에 눈을 못 뜨고 있었는데 저, 정신을 차려보니 아가씨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거예요! 요즘 인신매매범이 출몰한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뭐라고?”
엽영교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묘씨도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를 떨쳤다.
“어서 나리께 가 보자꾸나! 나리는 지금 바깥뜰에 있는 서재에 계신다. 가자!”
네 사람은 서둘러 안녕당을 나섰다.
“저는 가서 마님께 알리겠습니다.”
안녕당에서 나온 추길이 남쪽으로 걸어가려고 했다.
“첫째에게 알려 봤자 무슨 소용이 있느냐! 괜히 걱정하는 사람만 하나 더 느는 게지.”
묘씨가 꾸짖듯이 말하자 순간 멍해진 추길은 눈물을 머금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들은 바깥뜰에 있는 서재로 황급히 걸어갔다. 엽학문이 서재에서 첨향을 끌어당겨 입맞춤을 하려고 하는데 밖에서 그를 부르는 유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주인나리……!”
“주인나리!”
추길은 유이의 제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벌컥 문을 열어젖혔다. 묘씨와 엽영교는 서재 안 상황을 목격하고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엽학문과 첨향이 서로를 부둥켜안고 있었던 것이다. 묘씨의 갸름한 얼굴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너, 너희들……!”
엽학문의 나이 든 얼굴도 순식간에 어두워지더니 벌떡 일어나 몸을 돌렸다. 첨향도 얼굴을 들 수가 없어 옷매무새를 고치며 황급히 밖으로 뛰쳐나갔다.
“여긴 무슨 일로 온 것이냐?”
엽학문이 호통을 쳤다.
“나리, 큰아가씨께서 사라지셨습니다.”
추길과 혜연이 무릎을 꿇은 채 엉엉 울며 고했다.
“아버지, 요즘 인신매매범이 출몰한다고 들었는데 연채가 도성 서쪽에서 사라졌대요.”
엽영교 역시 애가 타서 눈에 핏발이 다 섰다.
그 말을 들은 엽학문은 순간 멍해졌다. 큰손녀가 인신매매범에게 납치를 당했다고? 엽학문은 골머리가 아플 뿐이었다. 이 손녀라는 것은 어떻게 소란을 피우지 않는 날이 하루도 없단 말인가.
“나리, 어서 가서 부윤과 만나 봐 주세요!”
추길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어쨌든 엽학문은 후작이니 그가 이야기하면 적어도 수사가 더 빨라지지 않겠는가.
“사람들을 데리고 나가셔서 큰아가씨를 찾아주세요!”
“알겠다! 알겠어!”
엽학문은 성가시다는 듯 손사래를 쳤다. 방금 전 현장에서 딱 걸린 그는 체면이 말이 아니라 어서 이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는 서둘러 밖으로 나가며 일렀다.
“유이야, 어서 마차를 준비하거라! 내가 직접 가 볼 것이다.”
걸어 나가던 엽학문은 고개를 돌리고 당부했다.
“이 일을 다른 사람들에게는 알리지 말거라!”
손녀는 이미 출가를 한 몸이기는 했지만, 인신매매범에게 잡혀갔다는 소문이 퍼질 경우 못 찾는 편이 차라리 다행이었다. 찾게 될 경우 사람들에게 몸을 버렸다는 소리를 듣게 될 것이 분명한 탓이었다. 그렇게 되면 정안후부의 명예도 함께 더럽혀질 수밖에 없었다.
추길과 혜연은 눈물을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가문에서 가장 힘 있는 사람은 주인나리이니 다른 사람에게 알려 봤자 아무 소용이 없었다. 게다가 만약 주인나리도 도움이 안 된다면 주씨 가문이 도움이 될 턱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