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8화
그러나 엽승덕은 지금 그녀와 실랑이를 벌일 수 없었다. 엽연채에게 이용 가치가 있어 이 자리에 부른 것이니, 기회를 봐서 일을 성사시켜야 했다. 엽승덕은 그냥 씩 웃더니 기쁜 표정으로 대꾸했다.
“그리되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마다. 하지만 지금은 허서에게 중요한 시기란다. 몇 달 후면 향시가 있으니 환경을 바꾸는 게 좋지 않을 것 같구나. 일단 향시를 치른 후에 고민해 보자꾸나.”
“아버지 말씀이 맞네요!”
엽균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하기야 지금 허서에게 가장 중요한 건 과거 시험이고, 또 어머니를 설득하는 데도 시간이 좀 걸릴 것이었다.
“균아.”
엽승덕이 헛기침을 하며 엽균을 쳐다보자 엽균은 그제야 오늘 자리를 만든 목적이 떠올랐다. 엽균은 미소를 지으며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연채야, 네 혼수 중에 팔수혈옥분경八壽血玉盆景이 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내게 줄 수 있니?”
엽연채는 그 말을 듣고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의 표정은 이내 조금씩 어두워졌다. 엽균이 자신을 초대하겠다는데 엽승덕이 왜 동의했는지 그 까닭을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아니, 어쩌면 엽승덕이 이쪽과 약속을 잡으라고 엽균에게 넌지시 시킨 일일 가능성이 컸다.
팔수혈옥분경. 엽연채는 며칠 전 주묘화의 생일에 이 단어를 들었다. 그날 엽미채가 자신에게 말하기를, 엽승덕이 밖에서 혈옥분경을 하나를 구했고 그걸 태자에게 선물하겠다는 명목으로 물품 구매 권한을 넘겨받았다고 했다. 이 권한이 있어야만 은정랑과 허서를 부양할 수 있으니 엽승덕이 거기에 목을 매는 것도 당연했다.
그런데 지금 보니 엽승덕이 말한 혈옥분경은 밖에서 구한 것이 아니라 엽연채의 혼수품인 혈옥분경이었던 것이다. 엽연채의 혼수품 중에 이 귀한 물건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엽승덕은 그녀의 혈옥분경을 선물하겠다고 계산을 마치고 물품 구매권을 되찾아온 것이었다.
게다가 물건을 가져가기 위해 엽균을 시켜 이렇게 약속까지 잡다니. 정말이지 기똥찬 계획이 아닐 수 없었다.
“연채야, 아까워서 그러니?”
허서는 실망한 듯한 얼굴로 말했지만 눈빛에는 순간 득의양양한 기색이 비쳤다.
“걱정 말거라, 연채야. 분경을 그냥 달라는 것이 아니다. 값은 지불할 거야.”
허서와 엽승덕은 엽연채가 당장이라도 엽균을 끌고 나가고 싶은 심정이지만 더 큰 손해를 볼까 봐 잠자코 있을 수밖에 없다는 걸 꿰뚫어 보고 있었다.
“연채야?”
엽균이 긴장된 눈빛으로 엽연채를 쳐다보며 물었다.
“아버지께서 그 분경이 필요하셔. 아버지가 물품 구매권을 잃으신 건…….”
엽균은 애걸하는 눈빛으로 엽연채를 쳐다봤다. 아버지가 물품 구매 권한을 잃은 건 눈앞의 이 누이동생 때문이었는데, 그땐 누이동생도 아버지를 곤경에 빠뜨리게 되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라고 엽균은 생각했다.
“너도 이제 정랑과 허서가 겪는 괴로움을 이해하니 어머니를 설득해 정랑과 허서가 정안후부로 들어오는 걸 도와준다고 하는 거잖니. 허서의 향시가 얼마 남지 않았는데 돈이 없으면 요 선생에게 허서를 잘 지도해 달라고 부탁을 할 수가 없단다. 그래서 아버지가 할아버지께 팔수혈옥분경을 구해 귀인께 생신 선물로 드릴 것이라고 말씀드렸고, 할아버지께서도 아버지에게 물품 구매권을 선뜻 넘겨주셨어. 지금 그 분경은 너한테 있잖니.”
엽균이 기대에 찬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엽연채는 뺨을 한 대 올려붙여 이 어리석은 오라버니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고작 뺨 한 대로 정신을 차리게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엽균을 깨우치려면 그와 은정랑의 생활 속으로 들어가야 하니 지금 말다툼을 해서 사이가 틀어지면 안 되었다.
엽연채는 엽승덕 뜻대로 되도록 놔두고 싶지 않았지만 엽균은 어쨌거나 그녀에게 하나뿐인 오라버니이니, 그가 마음을 고쳐먹고 되돌아올 수 있을지 마지막 기회를 줘 보고 싶었다. 엽승덕이 말한 것처럼 곧 있으면 허서가 향시를 치르게 되고, 그가 시험에 합격하면 엽승덕은 장애물을 제거하려 들 것이었다. 오라버니가 다리가 부러진 채로 정안후부에서 쫓겨나는 날이 곧 다가온다는 의미였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엽연채는 고약하게도 속이 좀 후련해지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그에게 한 번은 기회를 주고 싶었다. 목적을 이루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마음을 고쳐먹지 못하면 다리가 부러지든 목숨을 잃든 내버려 둘 수밖에 없는 것이다.
엽연채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알겠어요!”
그러자 엽균이 기쁜 목소리로 말했다.
“잘 생각했어.”
엽승덕도 입꼬리를 올리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듣자하니 요즘 묘령의 소녀들만 납치하는 인신매매범들이 출몰한다고 하더구나. 균아, 이따가 네가 연채와 두 아가씨를 바래다드리거라.”
“예! 가는 김에 혈옥분경도 가져오겠습니다.”
엽균이 얼른 씩씩하게 답했다. 그러자 엽연채는 싸늘한 표정으로 입꼬리를 당겼다. 인신매매범이라니, 자신의 마음이 바뀔까 봐 얼른 엽균이 분경을 손에 넣도록 하려는 핑계임이 틀림없다. 은정랑은 그제야 고개를 돌리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고맙다는 기색을 비쳤다.
그때 밖에선 징과 북소리가 들려오더니 이내 용주 경기가 시작됐다. 그러나 엽연채는 용주 경기를 볼 기분이 아니었다.
경기는 빠르게 진행돼 미시未時(오후 1시~3시) 삼각이 되니 벌써 막을 내렸고, 사람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엽연채가 아래층으로 내려가니 추길이 달려오고 있었다.
“아가씨!”
“오, 추길이도 왔었구나. 어딜 갔다 오는 게냐?”
엽균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추길은 엽균을 보자마자 지난번 그가 한바탕 늘어놨던 ‘선의론善意論’이 떠올라 절로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엽균은 생각을 깊게 하는 사람이 아닌지라, 추길이 자신의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겨 지적했던 일을 마음에 두지 않았다.
“추길아, 가서 제민 소저 쪽을 마저 도와드려.”
혜연이 말했다.
분경 때문에 마음이 급한 엽균은 ‘음’ 소리만 낼 뿐, 제민 소저가 누구인지 물어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연채야, 어서 분경을 가지러 가자꾸나!”
엽연채는 쌀쌀맞은 눈빛으로 그를 흘겨보더니 주묘서 일행과 마차에 올랐고, 엽균은 말을 타고 앞장섰다.
이각쯤 지난 후 그들은 주씨 가문 서쪽 측문에 도착했다. 엽연채는 거처로 돌아가서 분경을 꺼내 왔고 엽균은 이를 받아들더니 기뻐하며 발길을 돌렸다.
추길이 분해서 씩씩거렸다.
“분경은 왜 주신 겁니까! 세자야가 물품 구매권을 돌려받도록 도와주시면 여윳돈이 생길 테고, 그럼 세자야께서는 그 돈으로 외실을 먹여 살리실 겁니다.”
“목적을 달성하려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오라버니께서 마음을 고쳐먹을 수 있게 시도는 해 봐야지.”
엽연채는 콧방귀를 뀌며 설명한 후 방 안으로 들어가며 물었다.
“제민 소저 쪽은 어떻게 되었느냐?”
여전히 입을 삐죽거리던 추길이 얼른 대답했다.
“이후에 물건 옮기는 것을 도와드렸어요. 도성 서쪽에서 지내시더라고요.”
엽연채는 하품을 하더니 나한상 위에 누웠다.
“제민 소저를 찾아가서 보상금으로 은화 백 냥을 드려야겠구나.”
“돈은 왜요?”
추길이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제민 소저한테 트집을 잡아 시비를 걸고 있는 사람이 바로 둘째 숙부 내외다. 그런데 그들 부부가 판돈을 크게 걸도록 유도한 사람이 나잖니. 숙부 내외가 판돈을 잃었다고 소저에게 보복하는 것이니 적어도 내가 소저의 손실은 보상해 드려야지.”
잠시 후 엽연채가 말을 마저 이었다.
“오늘은 너무 피곤하니 며칠 있다가 가자꾸나.”
엽연채는 단오절에 제민에게 보상금을 전하러 가야겠다고 이야기했다. 그러고 다음 날 하루를 푹 쉬었다.
* * *
오월 초이렛날 오후, 엽연채는 식사를 한 뒤 경인이 모는 마차를 타고 추길, 혜연과 함께 집을 나섰다. 도성 북쪽과 서쪽은 끝과 끝에 위치해 마차로 반 시진을 이동해야 했다.
날은 점점 무더워졌다. 마차 안에 탄 엽연채는 연신 부채질을 했고 추길도 그녀에게 부채를 부쳐 주었다.
“무척 덥구나.”
엽연채가 입을 삐죽 내밀고 말했다. 더위를 많이 타는 엽연채는 두 볼이 발그레해졌지만 그럼에도 땀은 많이 나지 않았다.
“육칠월이 되면 더 더워질 텐데 주씨 가문에 얼음이 비축되어 있는지 모르겠네요.”
추길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하자 혜연은 걱정 붙들어 매라는 듯 장담했다.
“있겠지! 주씨 가문이 지금 가난하기는 하지만 전에는 손꼽히는 권문세가였으니 분명 집 안에 빙고氷庫가 있을 거야. 얼음이 여름에는 아주 귀하다지만 겨울에는 어딜 가나 있는 거잖아. 빙고만 있으면 미리 저장해 놓으면 그만이야. 손이 많이 갈 뿐이지.”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 보니 마차는 어느새 도성 서쪽에 도착했다. 전에 와본 적이 있는 추길이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고 길을 알려 주자, 잠시 후 마차가 좁고 어두운 골목에서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엽연채가 주위를 둘러보니 온통 허름한 집들뿐이었다. 추길이 그중 한 집을 향해 걸어가더니 문을 두드렸다.
“누구세요?”
안에서 제민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이어 끼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제민은 문 앞에 서 있는 엽연채를 보고는 어리둥절해했다.
“연채 소저?”
“네, 접니다. 돈을 드리려고 왔어요.”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한테 왜 돈을 주세요?”
제민은 이해가 가지 않아 되물었다.
“이렇게 계속 저를 세워 두실 거예요?”
“아, 들어오세요.”
제민은 얼른 옆으로 비켜서며 그들을 들였다. 엽연채와 추길, 혜연은 집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경인은 말 머리에 걸린 고삐를 잡아당기며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여기 문턱이 너무 높아 마차를 안으로 끌 수가 없습니다.”
“그럼 밖에서 기다리거라!”
“예, 마차를 골목 어귀에 있던 커다란 나무 아래에 세워 놓겠습니다!”
엽연채의 명에 경인이 이렇게 답했다.
“그래, 그럼 가 보렴.”
경인은 엽연채의 허락을 받고 돌아서서 마차를 끌고 떠나갔다.
엽연채와 여종들이 안으로 들어갔다. 몸채 한 칸과 곁채 두 칸, 마당에 딸린 주방으로 이루어진 작은 집이었다. 마당에는 커다란 대추나무 한 그루와 그 아래에 네모난 나무 탁자 하나뿐이라 황량한 느낌을 주었다.
날씨가 무더웠는지라, 제민은 엽연채를 방 안으로 데려가지 않고 나무 그늘 아래에 앉게 했다. 잠시 후, 제민이 차를 내오며 물었다.
“저한테 돈을 주신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