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7화
탁자 앞에 앉아 있던 주묘서와 주묘화는 가만히 기다리고 있으려니 좀이 쑤셨다. 주묘서가 먼저 입을 뗐다.
“친정 식구들에게 인사를 하러 가는데 우리는 왜 안 데려가는 거야? 우리가 부끄러운가?”
주묘화는 미간을 찌푸리더니 엽연채에게 좋은 방향으로 이야기했다.
“뭔가 사적으로 할 이야기가 있나 보죠.”
주묘서는 입을 살짝 오므렸으나, 자신의 혼처를 구하는 데 온씨의 도움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걸 떠올리고는 더 이상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새언니.”
주묘화가 고개를 들자 위층에서 내려오는 엽연채의 모습이 보였다. 엽연채가 사과하면서 사정을 설명했다.
“오래 기다렸죠. 미안해요. 할아버지께 긴히 드릴 말씀이 있었어요. 그래서 아가씨들을 데리고 가지 않은 거예요. 안 그러면 또 인사를 드리고 사람들을 소개해야 되는데 그럼 번거롭잖아요. 조만간 할머니 생신 축하연 때 정안후부에 초대할 테니 그때 정식으로 인사를 나누어요.”
그 말을 듣고서야 주묘서는 기분이 좋아져 엽연채를 재촉했다.
“벌써 사시巳時 삼각이에요. 새언니, 얼른 가요!”
“그래요.”
세 사람은 진미루 밖으로 나갔다. 진미루와 벽수루는 주루와 식당 네다섯 곳을 사이에 두고 있을 뿐이라 그들은 금세 벽수루에 도착했다. 벽수루 문 앞에 서서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엽균은 엽연채의 모습을 보고는 손짓을 하며 불렀다.
“연채야, 왜 이렇게 늦었어? 안 오는 줄 알았잖아.”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안 오기는요. 중간에 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고 오느라고 그런 거예요.”
엽균이 말없이 머리를 긁적거리자 엽연채는 갑자기 한층 짙은 미소를 지었다.
“우리 정안후부는 매년 단오절이 되면 진미루에 와서 용주 경기를 보잖아요. 그런데 오라버니는 바깥뜰로 나가서 지낸 이후로는 매년 불참하고 있죠. 전에 제가 오라버니께 물어보니 함께 공부하는 벗과 함께 보낸다고 했었어요. 음, 그런데 오라버니 벗은 오늘 보이지가 않네요.”
그러자 엽균은 경직된 얼굴로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난… 벗과 함께 단오절을 보낸 게 아니다. 아버지와 함께 보냈어…….”
“아, 그 정랑과 함께 보낸 거였어요?”
엽연채가 눈썹을 추켜세우며 물었다. 사실 그녀는 엽균이 그렇게 지냈다는 것을 이미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자 엽연채 뒤에 서 있던 혜연이 어두운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큰공자님께서는 마님은 내팽개치고 외실이랑 함께 단오절을 보내 오셨던 겁니까?”
엽균은 냉랭한 눈빛으로 혜연을 쏘아보고는 엽연채에게 변명했다.
“어머니껜 너와 미채가 있잖아. 그리고 할아버지, 할머니, 고모도 함께 계시잖아. 온 가족이 다 모여 있는데 나 하나 빠지는 것으로 뭘 그러니? 정랑에겐 허서밖에 없잖니. 떠들썩하고 흥겨운 단오절에 둘만 있으면 얼마나 외롭겠어. 가엽기도 하고. 그래서 나랑 아버지가 이곳에 와서 그들과 함께 용주 경기를 보는 것이란다.”
엽균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말을 보탰다.
“내가 생각을 해 보니 연채 네가 주씨 가문에 시집을 갔으니 방을 잡기 어렵겠더라. 그러니 너도 외로울 거 같아서 함께 시간을 보내고자 너와 약속을 잡았단다.”
그는 엽연채가 서자에게 시집을 갔으니 정랑과 허서에게 더욱 공감할 거라고 생각했다. 엽연채의 눈빛에 순간 냉기가 서렸으나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가요!”
그러면서 엽연채는 속으로 투지를 불태웠다.
‘무서울 게 뭐 있어!’
엽균은 흔쾌히 수용하는 엽연채를 보며 아주 기뻐했다.
“가자! 주씨 가문 두 소저들도 함께 가시죠!”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주묘서를 힐끗 쳐다보고는 엽균을 따라 주루 안으로 들어갔다.
주묘화는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본래 엽 공자와 자신들만 용주 경기를 보러 가는 줄 알았는데, 그 외실과 새언니의 아버지도 함께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다지 개의치 않았다. 저번에 엽 공자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기에 그녀도 속으로 은정랑이라는 외실을 동정하고 있었고, 심지어 호감까지 꽤 느끼고 있었다.
주묘화는 저도 모르게 주묘서를 쳐다봤다.
‘언니는 적녀니까 분명 은정랑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을 텐데!’
그러나 그녀가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행은 벽수루 안으로 들어갔고, 점원이 그들을 맞이했다. 점원은 그들을 위층에 있는 귀빈실로 데려가 문을 열어젖혔다.
“아버지, 연채와 함께 왔어요.”
엽균이 미소를 지으며 앞장서서 들어갔다. 엽연채는 그가 즐거운 목소리로 아버지를 부르는 것을 듣고는 눈빛에 싸늘한 기운이 어렸다.
“왔구나.”
엽승덕이 인사를 받으며 고개를 돌렸다. 엽연채와 두 아가씨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선 조금도 의아한 기색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자 엽연채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빌어먹을 오라버니가 자신에게 외실과 함께 용주 경기를 보자고 한 건 순간적인 충동으로 내뱉은 말이 아니라 미리 엽승덕의 동의를 받은 일이었던 것이다.
‘엽승덕이 순순히 동의했으니, 여기 무슨 계략이 숨겨져 있는 건 아닐까?’
고아한 운치가 느껴지는 귀빈실 창가에는 기다란 상이 놓여 있었고 그 위론 떡과 과일, 술이 한가득 올라 있었다. 엽승덕과 은정랑 그리고 허서는 그 상 앞에 앉아 있었다. 엽연채는 엽승덕을 보더니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아버지, 건강하셨지요?”
“그래.”
엽승덕은 두 눈을 살짝 깜빡이더니 차분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찌나 태연한지, 장박원 일로 송화 골목에서 서로 간에 한바탕 난리를 친 게 모두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그는 엽연채 곁의 아가씨들에게 먼저 알은체도 했다.
“거기 두 분은 주씨 가문 소저시지요?”
“아버지, 정랑. 이분은 주씨 가문 큰아가씨이고, 이분은 주씨 가문 둘째 아가씨예요.”
이에 엽균이 두 아가씨를 가리키며 소개를 해 주었다.
엽승덕은 주씨 가문에 아가씨가 두 명밖에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저번에 서녀이자 차녀인 주묘화를 봤으니, 본 적 없는 아가씨가 바로 주씨 가문 적장녀일 것이었다.
“안녕하세요, 엽 노야.”
주묘서와 주묘화가 함께 인사를 올렸다. 그런 후에 주묘서는 미간을 찌푸린 채 은정랑과 허서를 쳐다봤다. 저 두 사람은 대체 누구지?
“소저들, 이만 앉으세요. 연채야, 너도 앉거라.”
엽균이 얼른 미소를 지으며 그녀들에게 자리를 권했고, 엽연채와 두 자매는 자리에 앉았다. 엽연채는 고개를 들어 은정랑과 허서를 힐끗 쳐다봤다. 은정랑은 쭈뼛쭈뼛하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고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러나 허서는 미소를 머금은 채 엽연채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퍽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연채야, 오랜만이다.”
엽연채는 쌀쌀맞은 미소를 지으며 적당히 대꾸했다.
“오랜만이네요.”
주묘서는 다시 눈살을 찌푸리더니 엽연채의 옷소매를 당기며 물었다.
“새언니, 저 두 분은 누구세요?”
그러자 엽연채는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엽균을 쳐다보며 말했다.
“오라버니, 오라버니가 이 자리를 마련한 사람이니 손님들에게 소개를 해 주셔야죠!”
그 말을 들은 엽균은 순간 멍해졌다. 그러잖아도 분위기는 영 어색했고 거기다 정랑의 신분은 특수한지라 뭐라고 소개하기가 어려웠다. 엽승덕의 표정도 이미 굳어 있었다.
엽균은 어쩔 수 없이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간략히 호칭만 밝혔다.
“여기 두 사람은 정랑과 허서예요.”
하지만 주묘서는 끝까지 파헤쳐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미간을 찌푸리며 자세히 물었다.
“엽 공자의 이모님이세요?”
주묘화는 엽균의 난처해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아 주묘서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며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언니, 더 이상 묻지 마세요. 저 사람은 엽 세자의 외실이에요.”
그 말에 깜짝 놀란 주묘서의 낯빛이 이내 새파랗게 변했다. 기분이 한순간에 언짢아진 건 두말할 필요도 없었다.
‘엽 노야와 엽 공자는 대체 뭐 하는 사람들이지? 정안후부 사람들은 진미루에 모여 용주 경기를 보고 있던데 이 부자는 왜 여기서 외실과 함께 있단 말인가?’
주묘서는 적녀인지라 이낭과 첩을 제일 경멸했으니, 집 밖에서 데리고 사는 외실이야 더 말해 무엇 하겠는가. 더군다나 주묘서는 하고 싶은 말을 가슴 속에 묻어 두지 못하는 사람이고 또 쌀쌀맞은 성격이라, 주묘화의 설명을 듣더니 곧바로 이렇게 쏘아붙였다.
“엽 공자와 엽 세자께서는 참 이상한 분들이시네요. 진미루에서 부인을 비롯한 가족들과 함께 단오절을 보내지 않고 어떻게 외실과 함께 계시는 거예요!”
어린 아가씨 입에서 이런 가시 돋친 말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던 엽승덕은 주묘서에게 다가가 뺨이라도 한 대 올려붙이고 싶은 심정이었다. 허서의 낯빛은 솥바닥처럼 새까매졌고, 은정랑은 몸을 부들부들 떨더니 눈물을 머금은 채 고개를 돌렸다. 몹시 무안하고 거북해하는 모습이었다.
엽연채는 그 모습을 보더니 입꼬리를 씨익 올렸다. 주묘서는 역시나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고 소란을 피워댔다.
“그쪽에는 사람들이 많으니 시끌벅적하잖아요. 이쪽에는 사람이 별로 없으니 이곳에 온 것이죠. 정랑은 혼자 밖에서 지내니까요!”
엽균이 미간을 찌푸리며 설명했다.
“그럼 이 사람을 그쪽으로 보내면 되잖아요?”
주묘서도 미간을 찌푸리며 받아쳤다.
“그리고 왜 밖에서 첩살이를 합니까? 정안후부에 들어가서 이낭이 되면 되잖아요?”
이 말에 엽연채는 싸늘한 눈빛을 번뜩였다. 그 눈빛에서 저쪽의 상황을 고소해하는 그녀의 감정이 드러났다. 엽연채는 다른 사람이 끼어들기 전에 얼른 주묘서의 편에 섰다.
“묘서 아가씨 말이 맞아요. 정랑이 정안후부로 들어와 이낭이 되면 되겠네요!”
엽균은 어안이 벙벙했고 이어 생각지도 않았던 그녀의 반응에 크게 기뻐했다. 정랑이 정안후부에 들어오는 데 누이동생이 동의한다는 말인가? 그는 놀랍고도 기뻐하는 얼굴로 엽승덕을 쳐다보며 말했다.
“아버지, 연채가 정랑을 정안후부로 들이자고 하네요!”
엽균은 집안이 점점 더 평온한 곳으로 느껴졌다. 그는 전부터 정랑이 정안후부로 들어오면 어떨까 생각했었지만, 누이동생과 어머니가 정랑과 허서를 못살게 굴까 봐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아버지도 정랑을 정안후부로 들이려고 하지 않았던 게 틀림없었다.
그런데 여동생이 시집을 가더니 생각이 트인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누이동생의 말을 가장 잘 들으니 이제 동생이 어머니를 설득하기만 하면 문제가 모두 해결될 것이었다. 정랑은 정안후부에 들어올 수 있게 되고, 그럼 더 이상 제대로 된 신분도 없이 밖에서 지낼 필요가 없었다.
한편 엽연채의 말을 들은 엽승덕의 눈에는 순간 싸늘한 기색이 비쳤다.
‘이 불효막심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