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6화
제민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그땐 아이가 너무 불쌍해서 그때는 저희도 전후 사정을 따지지 않고 은화 열 냥을 내줬어요. 그런데 저 여인이 성에 안 찼는지 관아에 저희를 고발한 거예요. 저희도 연이 사람을 끌고 공중으로 떠올랐다고 어떻게 단언할 수 있냐고 항변했죠.
저쪽은 증거가 없으니 울기만 했어요. 그런데도 부윤府尹이 우리에게 책임이 있으니 은화 삼십 냥을 배상해야 하며, 그렇지 않을 경우 감옥살이를 해야 한다고 판결한 거예요.
우린 삼십 냥을 또 배상해 줄 수밖에 없었죠. 억울했지만 그냥 액땜한 셈 치려고 했어요. 그런데 저 여인이 하루가 멀다 하고 사람들을 데리고 와 물건을 때려 부수며 행패를 부리는 거예요.
도저히 장사를 할 수가 없어서 하는 수 없이 관아에 고발했는데, 관아에선 우리가 먼저 잘못한 거라고 나 몰라라 하더라고요. 그런데 저희와 동향인 한 아역衙役이 위에 계신 높은 분이 우리를 손봐 주려 한다고 슬며시 귀띔을 해 주시더라고요.”
엽연채는 짙은 눈썹을 잔뜩 찡그리며 물었다.
“최근에 심기를 건드린 사람이 있어요?”
그러자 제민은 자조 섞인 웃음을 지으며 되물었다.
“적성대에서 바둑을 둔 것 말고 뭐가 있겠어요?”
제민은 그렇게 말하고서 고개를 숙인 채 물건들을 그러모았고, 온화한 인상의 초빙풍도 무표정한 얼굴로 말없이 물건들을 정리했다.
“추길아, 제민 소저를 도와 물건들을 정리하거라.”
엽연채는 그렇게 지시를 내리고 나서 제민을 향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인사했다.
“제민 소저, 조만간 또 봐요.”
엽연채는 어안이 벙벙해진 제민을 뒤로하고 돌아서서 자리를 떴다.
“새언니, 벽수루로 갈 거예요?”
주묘화가 묻자 엽연채는 잠시 생각을 하다 입을 열었다.
“우선 진미루眞味樓부터 가요.”
“진미루는 왜요?”
주묘화는 이해가 안 간다는 듯 물었다.
“매년 단오절이 되면 정안후부 사람들은 진미루에서 용주 경기를 보거든요. 가서 어머니와 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려고요.”
주묘화가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는데 주묘서가 끼어들었다.
“엽 대공자께서는 왜 가족들과 진미루에서 함께 시간을 보내지 않고 벽수루에 따로 예약을 해 두신 거예요?”
엽연채의 눈빛에 순간 냉소가 어렸다.
“그걸 누가 알겠습니까?”
엽연채 일행은 북적거리는 인파를 뚫고 걸어갔다. 이곳은 용주 경기가 펼쳐지는 천수하와 인접한 곳이라 주루酒樓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었다. 얼마 안 가 그들은 진미루에 도착했고 안으로 들어서자 점원이 다가와 물었다.
“몇 분이세요? 방을 예약하셨나요?”
“추엽秋葉 방이요. 정안후부로 예약되어 있을 거예요.”
정안후부는 매년 이 방을 미리 예약해 놓았다.
“예. 위로 올라가시죠.”
점원은 그들을 극진히 모시고 위층으로 올라갔다. 그런데 엽연채가 갑자기 돌아서더니 주묘서와 주묘화에게 이리 일렀다.
“아가씨들은 여기서 잠시 기다리고 계세요. 제가 할아버지와 중요한 이야기를 나눠야 해서요.”
그 말을 들은 주묘서는 기분이 좀 언짢았다. 자신이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가 무엇이란 말인가?
반면 주묘화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알겠다고 했다.
“네,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엽연채는 싱긋 미소를 짓더니 점원을 따라 위층으로 올라갔다.
점원이 방문을 두드리자 안에서 어멈이 문을 열고 나왔다. 묘씨를 모시는 전 마마였다. 전 마마는 엽연채를 보더니 어리둥절해했다.
“큰아가씨.”
“할아버지 할머니께 인사를 드리러 왔네.”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 안으로 드시지요.”
전 마마가 얼른 엽연채를 안으로 들였다. 엽연채가 방 안으로 들어가자 엽이채, 엽승덕, 엽균을 제외한 정안후부의 모든 가족들이 그곳에서 용주 경기를 보고 있었다. 강가 쪽 꽃살문 여덟 개가 활짝 열린 채였고, 기다란 탁자들이 창 밑에 놓여 있었다. 엽씨 가문 사람들은 그곳에 앉아 술을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엽연채가 안으로 걸어 들어오며 인사했다.
“오, 연채가 왔구나!”
엽영교가 제일 먼저 고개를 돌리며 그녀를 반겼다.
온씨는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엽연채 곁으로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여긴 어쩐 일이니? 너희 가문에서도 행사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 널 부르지 않았는데.”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꾸했다.
“맞아요. 저희 가문도 행사가 있어요.”
그러자 손씨가 입꼬리를 씨익 올리더니 비웃음을 숨기지 못하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어머, 그 댁도 행사가 있어요? 용주를 보러 왔나 봐요? 큰아가씨께서는 어느 주루에 방을 예약했죠?”
손씨는 사실 주씨 가문이 방을 잡았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다. 손씨의 말을 들은 온씨는 그녀를 홱 노려보았다. 이 뻔뻔스러운 여편네가 또 자신의 딸을 건드리다니.
주씨 가문의 경제적 능력으로 천수하 근처에 좋은 방을 예약하기란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고 보통의 백성들처럼 강가에 서서 구경하거나 다리 위에서 구경하는 건 위신이 떨어져 보이니 주씨 가문 사람들은 함께 용주를 보러 가지 않고 보고 싶은 사람들만 각자 나가서 구경했다.
엽연채는 담백하게 대꾸했다.
“저희 가문의 단오절 행사는 집 안에서 종자를 먹는 거였어요. 아주 단출하게 보냈죠. 시부모님께서는 조용한 걸 좋아하셔서 나오지 않으셨어요. 그래서 저에게 두 아가씨만 데리고 다녀오라고 하신 거죠.”
손씨는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지으며 속으로 가난한 주씨 가문을 멸시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정말 단출하게 보냈네요! 큰아가씨께서 생각을 잘하셨어요. 어차피 방은 예약할 수 없으니 아가씨들을 데리고 와 친정에 숟가락을 얹는 거군요.”
엽연채는 눈을 가늘게 뜬 채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래요. 아주 간소하게 보냈어요. 어디 둘째 숙부댁처럼 그렇게 할 일이 많겠어요. 여기선 용주 경기를 보고 다른 곳에선 백성을 괴롭히며 또 소란을 피우시던데요.”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예요?”
손씨는 바로 잡아뗐으나 낯빛이 어두워졌다. 뭐라 부정해야 할지 더는 적절한 말을 찾지 못한 그녀가 가만히 있자 엽학문과 묘씨 등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손씨를 쳐다봤다.
“연채야, 그게 무슨 소리냐?”
엽학문이 미간을 찌푸리며 엽연채에게 물었다.
“할아버지, 제가 오늘 아가씨들을 데리고 밖을 돌아다니다가 연을 파는 노점상에서 행패를 부리는 사람들을 봤어요. 가서 이야기를 들어 보니 그렇게 보름이나 당했다고 하더라고요.”
그러면서 제민이 권력가에게 괴롭힘을 당한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다 이야기했다. 손씨와 엽승신은 그 이야기를 듣더니 안색이 변했다.
엽영교가 말을 받았다.
“하급 관리가 그 노점상에게 한 권력가가 일부러 그들을 콕 집어 괴롭히는 거라고 했다고? 그게 누군데? 설마 둘째 오라버니와 둘째 새언니는 아니겠죠?”
“아, 아가씨께서는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저희가 밥 먹고 할 일 없어서 그런 일을 벌입니까?”
손씨가 말을 더듬으며 발뺌하자 엽연채는 냉소를 지으며 덧붙였다.
“그 노점상은 지난달 적성대에서 바둑 대결을 했던 농가 소녀예요. 둘째 오라버니 내외가 은화 일만 냥 정도를 그 농가 소녀에게 걸었는데 그만 지고 말았죠.”
그때 손씨와 엽승신의 눈꺼풀이 동시에 파르르 떨렸다. 두 부부는 분노에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그렇다. 사람을 시켜 제민을 괴롭힌 배후는 바로 손씨와 엽승신이었다. 두 부부는 제민 탓에 가산을 탕진했다고 굳게 믿었다. 마치 살을 도려내기라도 한 듯, 그 출혈이 엄청났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그래서 부부는 진작에 보복해 주겠노라 굳게 다짐한 터였다.
물론 그들이 가장 원망하는 사람은 단연 간사동이었다. 그를 믿고 노름을 했다가 판돈을 홀랑 날려먹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간사동은 회양후부 적출인 6공자인지라 감히 복수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었다. 그래서 별수 없이 만만한 농가 소녀 제민을 골라 분풀이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그녀에겐 바둑 대결에서 진 죄가 있었다.
하지만 한동안 엽이채의 혼수와 혼사 준비로 골머리를 썩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딸이 출가하고 나서야 짬을 내 제민에게 보복을 시작한 것이었다. 그들은 돈을 밝히는 심술궂은 촌부를 매수해 연을 사게 했고, 그다음 제민을 모함한 후 관아에 고발하게 했다.
손씨와 엽승신은 부윤을 만나 제민을 손봐 달라고 부탁했다. 그들은 본래 정안후부에서 서출인 둘째 아들과 그 아내라 입김이 그다지 세지 못했으나 이젠 어엿한 대리시경의 사돈댁이었다. 그에 반해 그 농가 소녀는 출신이 미천하고 배경도 전무했으니, 자연히 부윤은 엽승신 내외에게 선심을 썼던 것이다.
“중, 중상모략하지 말아요!”
손씨가 버럭 화를 냈다.
“할아버지.”
엽연채가 엽학문을 쳐다보자 엽학문은 푸르르 떨었다. 만약 그 일을 겪은 사람이 자신이었으면 그도 보복을 했을 것이다. 둘째 아들이 그렇게 한 건 비난할 바가 못 됐다. 그래 봤자 미천한 농가 소녀를 손봐 준 것에 불과했으니 말이다. 손 좀 봐 주고 분풀이 좀 할 수도 있다고 여겼다.
그런데 손녀가 이런 공개적인 장소에서 적나라하게 폭로해 버리니 아예 관여하지 않으면 자신이 시비를 가리지 않는 사람처럼 보이게 될 것이었다. 엽학문은 속으로 엽연채가 쓸데없는 일에 참견한다고 생각하며 노여워했지만, 잠시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연채야, 증거도 없이 네 숙부 내외를 의심하는 게냐?”
이에 온씨는 슬그머니 엽연채를 잡아당기며 그녀에게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그냥 물어봤을 뿐이에요. 어쨌든 저희 정안후부의 평판과 관계되는 일이잖아요! 오늘 보니 제민 소저가 성정이 올곧은 사람이라 더 행패를 부렸다가는 사람을 잡겠더라고요.
도성 사람들이 둘째 숙부께서 이채의 혼수를 날리신 걸 다들 알고 있잖아요. 혼수 상자에서 돌덩어리가 굴러 나온 일이 겨우 잠잠해지고 있는데 그런 일이 또 벌어지면……. 백성들에게 또다시 웃음거리를 던져 주는 셈이겠죠.”
이에 엽학문의 안색이 확 변했고 엽승신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말을 더듬었다.
“이미 말하지 않았느냐? 난, 난 그런 일을 벌인 적이 없다.”
엽연채는 그와 실랑이를 벌이는 대신 미소를 지으며 예를 갖췄다.
“아, 아니었군요! 제가 오해한 것 같으니 이 자리에서 둘째 숙부와 숙모님께 사죄를 드리겠습니다.”
엽승신과 손씨는 푸르뎅뎅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 아가씨들이 아래층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엽연채가 작별을 고하자 묘씨가 인사를 받아 주었다.
“그래. 가 보거라!”
엽연채는 인사를 올린 후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밖으로 나가자 엽학문은 손씨와 엽승신을 노려보며 엄히 일렀다.
“허튼 짓거리 하지 말거라!”
손씨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모르쇠를 잡았다.
“다 오해입니다. 오해일 뿐이에요.”
그러고는 감히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손씨 부부는 분통이 터졌지만, 이렇게 그들의 행위가 다 폭로된 이상 더는 제민을 괴롭힐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