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85화 (85/858)

제85화

“새언니, 이것 좀 봐요. 연에다 기념으로 글씨를 새겨 주고 있어요!”

주묘서가 말했다.

과연 두 노점 상인이 고개를 숙인 채 글을 새기고 있었다. 글씨를 새기니 연이 훨씬 더 우아하고 멋스러워 보였다. 하지만 주변 행인들은 별 관심을 두지 않아 모여드는 사람들이 적었다.

“아가씨들께서는 무슨 글자를 새기고 싶으세요? 시도 가능합니다.”

열여섯 정도 되어 보이는 잘생긴 소년이 고개를 들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어 왔다. 엽연채는 이 소년이 낯이 익어 잠시 쳐다보다가 이내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어머, 제민 소저 아니세요?”

그러자 그 소년은 깜짝 놀라며 물었다.

“절 아세요?”

엽연채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적성대에서 재상의 손녀분과 바둑 대결을 하셨던 제민 소저시잖아요!”

주묘화와 다른 사람들은 이 소년이 적성대의 농가 소녀였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깜짝 놀랐다.

그러자 주묘서가 조롱하는 얼굴로 말했다.

“아, 그쪽이 바로 정도 여승이 지병이 도졌을 때 바둑을 두어 이기고서는 태연하게 제 자랑을 했던 그 농가 소녀군? 결국 유 소저께 졌다지.”

그 말에 제민의 얼굴이 살짝 어두워졌다. 제민이 뭔가를 말하려고 입을 떼려 하는데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날 적성대에서 분명 이길 수 있었으면서 왜 져 주신 거예요?”

그 말에 주묘서와 주묘화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알아채셨네요. 유곡요가 도성 여인들 중 바둑 실력이 최고라고 하던데, 글쎄요. 전 최고의 재녀라는 게 그리 와닿지 않던데요. 그런데 사실을 간파하신 걸 보면 소저의 바둑 실력이 그 소저보다 더 뛰어나신가 봐요?”

제민은 놀랍고도 이상하다는 얼굴을 하면서 절세미녀인 엽연채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러자 엽연채는 시선을 아래로 드리우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저는 밖에 나가 사람들과 재예를 겨룬 적이 없어요. 전에 스승님께 금 연주와 글씨, 그림을 배웠었는데 나중에 제가 그 스승님의 실력을 뛰어넘게 되자 그 뒤로는 스승님을 모시고 뭔가를 배운 적이 없고요.

바둑에도 딱히 흥미가 있는 건 아니고, 그냥 혼자서 기보棋譜(바둑의 기본 기술과 전략, 유명한 대국對局의 전체적인 수순 등을 정리한 책)를 보고 두면서 노는 정도예요. 그래서 제 바둑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저도 잘 모르지요.

그날 소저와 유곡요 소저가 바둑 대결을 시작한 후 사람들이 그 대결을 두고 이래저래 평했잖아요. 한데 전 보자마자 분명 아가씨가 한 수 위라고 느꼈거든요. 그래서 일부러 져 주셨다고 생각했죠.”

그러자 제민은 껄껄 웃으며 말을 받았다.

“저희는 춘시春試(1차 시험인 향시鄕試의 합격자들이 이후에 응시하는 2차 시험 회시會試, 봄에 열려서 춘시라고도 함)를 준비하러 도성에 왔습니다. 당시 정월암에 가서 한가로이 거닐고 있는데 정도 여승 그 늙은이가 무료했는지 저한테 바둑을 두자고 하더군요. 그런데 저한테 예상 밖의 참패를 당한 거죠.

그 늙은이가 지고 나서 창피했는지 꾀병을 부리며 통증을 호소하더라고요. 그 일을 꽁꽁 숨기려고 했지만 누군가가 알고는 소문을 퍼뜨렸고요. 그 늙은 여승은 바둑 실력으로 이름을 떨친 사람이니 그 일로 망신을 당할 수는 없었겠죠. 그래서 자기 제자가 저에게 대결을 신청하게 해서 적성대에서 겨루게 한 거고요.”

주묘서는 제민의 말을 믿지 않았다.

“그리됐다면 왜 유곡요 소저에게 져 준 건데요?”

그러자 제민이 코웃음을 치며 대꾸했다.

“재상의 손녀를 제가 감히 어떻게 이기겠습니까?”

제민은 조롱기가 가득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추길과 혜연은 그 대답을 들으며 탄식해 마지않았다. 그들은 엽연채를 믿었기에 제민의 말 역시 믿었다. 엽연채는 유곡요보다 제민의 바둑 실력이 훨씬 뛰어나다고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제민은 이길 수 있는 실력을 갖추었는데도 이길 수 없었다. 미천한 농가 소녀는 어엿한 재상의 손녀 앞에선 머리를 조아릴 수밖에 없으니 말이다.

“하하. 지고 나서 딴소리를 하네요. 핑계를 대고 싶은 거겠죠. 결과에 승복하지 않는 건 그쪽이에요.”

그러나 주묘서는 제민의 말이 허풍에 불과하다고 단정하고는 여전히 냉소를 지으며 비아냥댔다.

“흥, 믿거나 말거나. 나도 당신의 믿음 따위에는 연연하지 않아요. 그만 가세요! 당신한테는 연 안 팔 거니까요!”

“민아.”

제민이 호통을 치자 왼쪽에 앉아 있던 온화한 인상의 사내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높지도 낮지도 않은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위엄이 가득 서려 있었다.

“칫!”

그의 부름에 제민은 입을 삐죽거렸다. 초빙풍은 꿀이 뚝뚝 떨어지는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제민을 쳐다보더니, 어쩔 수 없다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달랬다.

“손님이시잖니.”

제민은 주묘서를 노려보더니 더 이상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다.

“연 좀 골라 주세요!”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

제민은 뒤에 놓인 연들을 쳐다보더니 하나를 집어 들어 상 앞에 올려놓았다.

“시구詩句를 써 드릴까요?”

엽연채는 깃을 치며 날아오를 것 같은 푸른 난새鸞(전설 속 상상의 새. 봉황처럼 닭과 비슷한 생김새나 깃은 붉은빛에 다섯 가지 색채가 섞여 있고 오음五音을 낸다고 함) 모양의 연을 보며 대꾸했다.

“소저께서 좋아하는 시구를 써 주실래요?”

제민은 잠시 생각을 하더니 붓을 움직이며 시구를 쓰기 시작했다. 엽연채는 제민이 글씨를 잘 쓰기야 하겠으나 해서체楷書體(자형이 가장 똑바른 한자 서체의 한 가지)로 섬세하고 깔끔하게 쓰는 정도일 거라고 여겼다. 그런데 그녀가 붓을 움직이자 용이 승천하고 봉황이 날아오르는 듯한 초서草書(필획을 가장 흘려 쓴 서체로서 획의 생략과 연결이 심함)가 나타났다. 아주 빼어난 글씨였다.

「날개에 머리를 묻고 단잠에 빠졌던 새가

청명한 울음소리를 내며 하늘로 날아오르는구나.」

엽연채가 눈으로 시구를 읽어 보니 평성平聲(고대 한자음 사성四聲 중 제1성)과 측성仄聲(한자음 사성 가운데 상성上聲, 거성去聲, 입성入聲을 통틀어 이르는 말. 시의 성조聲調를 고르게 하기 위하여 ‘평성’과 대응하여 쓰임)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도록 배열됐다고는 할 수 없었다. 그래도 소리 내어 읽어 보니 꽤 괜찮아 마음에 쏙 들었다.

“연은 백 푼이고 시구를 새기는 건 오십 푼이니 총 백오십 푼입니다.”

제민이 값을 부르자 엽연채는 혜연이 들고 있던 돈주머니를 건네받아 은화를 꺼냈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시가 아주 마음에 드니 잔돈은 안 주셔도 됩니다.”

은화를 건네받은 제민은 기쁜 마음에 활짝 웃으며 말했다.

“빙풍 오라버니, 이것 좀 보세요! 은화 반 냥이에요.”

“으이구. 밝히기는!”

초빙풍은 못 말린다는 듯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엽연채가 연을 건네받자 혜연과 추길은 서로 먼저 보겠다고 아우성이었다. 이때 누군가가 호통을 치며 고함을 질렀다.

“이런 악귀 같은 것들. 또 사람들을 다치게 하려고 이렇게 나와 있는 게냐!”

이어서 기골이 장대한 서너 명의 사내들이 냅다 달려들더니 연을 진열해 놓은 제민과 초빙풍의 상을 뒤집어엎었다.

“꺅!”

엽연채 일행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뒤로 몇 걸음 물러났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남정네들이 행패를 부리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이런 몹쓸 놈들. 또 와서 행패를 부리는 게냐!”

제민은 성난 목소리로 고함을 내질렀다.

“누가 행패를 부린다는 것이냐? 그리고, 너희가 사람만 안 다치게 했으면 우리가 왜 여기 와서 행패를 부리겠느냐?”

이십 대로 보이는 촌부村婦가 울면서 달려들었다. 누렇게 뜬 수척한 얼굴을 하고 있는 촌부는 여기저기 헝겊 조각을 덧대어 꿰맨 하얗게 세탁한 무명옷을 입고 있었다. 딱 봐도 가난한 집안의 아낙네임을 알 수 있었다.

“나쁜 놈들! 이 악귀 같은 것들!”

촌부는 가엽게 울며 목이 쉬도록 고함을 질러댔다.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며 아낙네가 안쓰럽다고 여기기 시작했다. 주위에 몰려든 구경꾼들 중 한 아낙네가 물었다.

“이봐요. 대체 무슨 일 때문에 이러는 거예요?”

그러자 그 촌부는 엉엉 울며 대답했다.

“보름 전에 이 둘이 도성 북쪽에서 연을 팔고 있었어요. 우리 집 넷째가 연을 사 달라고 하도 칭얼대기에 하나 사 줬죠. 그런데 글쎄 그 연이 우리 애를 끌고 공중으로 떠오른 거예요. 그때 저희 애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지금 자리에 드러누워 사경을 헤매고 있다고요!”

“아이고! 가엾은 것!”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제민과 초빙풍을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

“헛소리 말아요!”

제민이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소리쳤다.

“그쪽 딸이 어떻게 넘어졌는지 증명할 증거도 없잖아요.”

“아직도 발뺌하는 거야!”

촌부도 지지 않고 소리를 빽 질렀다.

“관아에서도 당신 연 때문에 다친 거라고 판결했잖아.”

“그래서 우리가 배상했잖아요. 그것도 은화 삼십 냥이나!”

“됐고! 우리 넷째가 아직도 몸져누워 있으니 당신들 가만 안 둘 거야.”

“그럼 우리가 가서 당신 딸이 괜찮은지 아닌지 봐도 되겠어요?”

제민이 화가 난 목소리로 따져 물었다. 그러자 그 촌부의 안색이 확 변하더니 날카로운 목소리로 대거리했다.

“가서 당신들이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어쨌든 우리 집 넷째 상태가 말이 아니니 당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촌부는 큰 소리로 울부짖으며 달려들더니 걸어 둔 연을 확 찢어 버렸다. 그녀 뒤에 서 있던 남정네들도 합세해 진열해 놓은 물건들을 박살내기 시작했다.

“이봐요!”

제민이 날카롭게 소리쳤다.

“민아.”

초빙풍이 그녀의 어깨를 톡톡 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민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들이 물건들을 몽땅 때려 부수는 모습을 두 눈 뜨고 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모든 연을 갈가리 찢고 나서야 그 촌부와 남정네들은 자리를 떴다. 구경꾼들이 여전히 제민과 초빙풍을 비난하는 가운데, 두 사람은 어두운 표정으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고칠 수 있는 물건들을 그러모았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엽연채가 다가서더니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누구에게 밉보이기라도 한 거예요?”

“그러게 말이에요!”

제민이 손에 들고 있던 반쯤 찢어진 나비 모양 연을 바닥에 내팽개치더니 넋두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전에는 아무 문제없이 노점을 운영했어요. 그런데 보름 전 저 사람이 아이를 데리고 와 연을 사 가더니 이튿날 머리가 깨져 피범벅인 애를 안고 와서는 우리가 판 연이 아이를 끌고 공중으로 떠올랐다가 떨어졌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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