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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유서부-84화 (84/858)

제84화

그날 오후 엽연채는 서신을 한 통 받았다. 당연히 엽영교가 보냈으리라고 생각했는데 서신을 뜯어보니 뜻밖에도 엽균이 보낸 것이었다.

“큰공자님께서 아가씨께 서신도 다 보내시네요. 전에는 아가씨만 보면 토끼보다도 더 빨리 달아나시더니!”

추길이 냉소를 지으며 빈정댔다.

“큰공자님께서 뭐라고 쓰셨어요?”

혜연이 물었다.

“내일이 단오절이라 벽수루碧水樓에 방을 예약해 두었대. 함께 가서 용주龍舟(단오절에 용머리를 뱃머리에 장식하고 경주하는 배) 경기를 보자고 하는구나.”

엽연채가 말하자, 추길은 재차 냉소를 지었다.

“분명 뭔가 이상한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거겠죠!”

엽연채의 눈에도 비웃는 기색이 살짝 비쳤다. 그녀는 엽균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얼추 짐작이 가 미소를 지었다.

“내일 점심에 가 보자꾸나.”

매년 단오절이 되면 도성 안 천수하天水河에서는 용주 경기가 열렸다. 황제와 궁 안의 귀인들도 매년 천수하에 와서 용주 경기를 관람했다. 그러니 상인들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다들 천수하로 나와 노점을 벌여 놓고 물건을 팔아 그 주변은 떠들썩하기 그지없었다.

* * *

이튿날 아침, 엽연채는 일상원으로 갔다. 대청에는 종자와 과자류 간식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진씨와 주 백야가 길고 좁다란 침상 위에 앉아 있었다. 엽연채는 문안 인사를 드린 후 한쪽에 놓인 탁자 옆으로 가 앉았다. 잠시 후, 집안사람들이 하나둘 도착했다. 단오절을 맞아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여 종자를 먹기 위해서였다.

주종과는 탁자 옆에 앉는 엽연채를 흘깃하더니 주운환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두 눈에 비웃는 기색을 내비쳤다.

오늘 주종과는 특별히 신경 써서 치장을 했다. 그는 참새 문양이 들어간 옷깃이 둥근 옅은 다갈색 금포를 입고, 머리에는 은관銀冠을 쓰고 있었으며 상투를 깔끔하게 틀어 올렸다. 거기다 주종과 자체도 영민하고 준수하게 생긴 외모이기에, 아주 위풍당당한 모습이었다.

주종과는 부모님과 큰형 내외를 부르며 걸어왔다. 이어서 고개를 돌려 다시 엽연채를 보니, 그녀는 주묘화와 이야기를 나누는 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주종과는 창피하면서도 분한 마음이 들었다.

“셋째 아가, 너희 부부는 왜 함께 오지 않은 것이냐?”

진씨가 엽연채에게 물으며 정원을 쳐다보는데 마침 주운환이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엽연채가 대답했다.

“부군께서 오늘 늦게 일어나시는 바람에 제가 먼저 와서 어머님과 아가씨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비 이낭은 ‘허’ 소리를 내더니 고소하다는 얼굴로 해바라기씨를 까먹었다.

“어머니, 아버지.”

주운환이 방 안으로 들어오며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었다.

“앉아서 아침 식사 하려무나!”

주 백야가 인사를 받자, 주묘화는 주운환이 엽연채 옆에 앉을 수 있도록 자리를 내주었다. 주종과는 부부가 나란히 앉은 모습을 보고는 한층 질투심에 휩싸였다. 그는 참지 못하고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버지, 어제 스승님께서 제 책론이 많이 늘었다고 말씀하셨어요.”

“정말이냐?”

주 백야는 예상 밖의 희소식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러더니 기쁘고 안심이 된다는 얼굴로 말했다.

“잘했다! 열심히 학문을 닦거라! 우리 가문에…….”

우리 가문에 믿을 사람은 너밖에 없다는 말을 하려고 했으나, 진씨가 제일 싫어하는 것이 서자가 주비양을 능가하는 것임을 떠올린 그가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비 이낭은 어디 그런 걸 염려하겠는가. 비 이낭은 일부러 더 진씨 앞에서 거들먹거려야만 속이 시원했다. 그녀는 백야가 하려고 했던 말을 얼른 받아 자신이 마저 완성했다.

“앞으로 저희 가문에서 믿을 사람은 저희 종과 도련님이시겠어요.”

“하하.”

진씨는 소리 내 웃었으나 표정은 어두웠다. 이놈이나 저놈이나 가만히 있는 꼴을 못 보는구나.

“올해 향시鄕試에 붙을 가능성이 더 클지도 모릅니다!”

비 이낭이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말했다.

“종과 도련님께서 붙으시기만 하면 저희 가문에도 향시에 합격한 사람이 생기는 거죠. 그럼 가문에도 변화가 생길 겁니다.”

주씨 가문 형제는 뛰어난 재능을 가진 것도 아니고 공명功名에 관심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바로 과거 시험에 응시할 수 있었다. 이는 조상들의 음덕蔭德 덕분이자 조정에서 공훈이 있는 귀족이나 후작들에게 주는 특권 덕분이었다.

“향시에 합격한 사람이라니!”

백야는 비 이낭의 감언이설에 주비양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기쁜 목소리로 덕담을 했다.

“종과야, 열심히 공부하거라.”

“예, 아버지!”

쾌활한 목소리로 답한 주종과는 주운환과 주비양을 힐끗 쳐다보더니 더욱 의기양양해졌다. 적자인 큰형은 한때 패기가 넘쳤고 풍족한 생활을 영위하는 뛰어난 인재였다. 그러나 지금은 기가 죽어 위축되어 있었다.

그리고 셋째는 얼굴만 잘났을 뿐, 성취욕도 없고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았다. 하루 종일 집안에 틀어박혀 있거나 아니면 희루戲樓(관람자가 위쪽에서 공연 무대를 내려다볼 수 있도록 설계된 공연용 건축물)에 가서 전통극을 보는 등 하는 일 없이 밖에서 빈둥거리며 돌아다닐 뿐이었다. 쓰레기만도 못한 놈이었다.

그러니 주종과는 형제 중 장래성이 가장 밝은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그 자신도 세자가 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향후 향시에만 붙으면 큰형을 끌어내리고 자신이 그 자리를 차지할 생각이었다.

그는 야망을 곱씹으며 또다시 엽연채를 흘끗 쳐다봤다. 이렇게 신분이 고귀한 미인은 응당 자신에게 시집와야 했는데, 무능하기 짝이 없는 셋째가 이유 없이 이득을 본 것이었다.

일이 이미 그렇게 됐음에도 주종과는 엽연채 앞에서 자신의 가장 뛰어난 면을 보여 주려고 했다. 그래서 일부러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자신이 셋째보다 능력도 좋고 장래성도 밝다고 강조한 것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출중한 면모를 가졌음을 알게 되면 그녀도 시집간 상대가 자신이 아니라는 사실에 유감스러워하지 않을까?

“작은 새언니. 이따가 어디 가세요? 용주 경기를 보러 가시나요?”

그때 주묘화가 엽연채에게 말을 걸었다.

“그럼요.”

엽연채는 종자를 집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가요.”

“저, 저도… 같이 가요.”

주묘화의 말이 끝나자마자 주묘서가 더듬거리며 말했다. 강심설은 입에 넣은 종자가 하마터면 목에 걸릴 뻔했다. 그녀는 비굴하게 매달리는 주묘서를 속으로 마구 욕했다.

‘저번에 적성대에서 엽연채에게 그렇게 모욕을 당해 놓고 또 저렇게 들러붙는단 말인가? 체면은 안중에도 없는 건가?’

염치없는 모습만 떼놓고 보면, 진씨의 친딸이 아니라 비 이낭이 낳은 자식이라고 여기고도 남았을 것이었다.

“셋째 오라버니께서도 가시나요?”

주묘화가 갑자기 주운환에게 물었다. 사내가 동행하면 더 좋을 성싶다는 생각이 든 모양이었다.

그러나 주운환은 고개를 가로저으며 거절했다.

“난 안 간다.”

그 말에 주종과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엽연채와 함께 갈 수 있는데 안 간다는 말인가?’

그는 용주 경기를 보러 가고 싶었지만, 주운환이 안 간다는 소리를 하자 체면 때문에 차마 동행하자고 하지 못했다.

주운환의 거절을 들은 엽연채는 기분이 좋지 않았으나 그저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둘째 아가씨, 걱정 마세요. 저희 오라버니께서도 함께 갑니다.”

“예? 엽… 엽 공자님도 오시는 거예요?”

주묘화는 수줍게 얼굴을 붉히며 더듬더듬 물었다.

“네!”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더니 강심설을 쳐다보며 말했다.

“형님과 아주버님께서도 함께 가실래요?”

그 말에 주비양은 고개를 가로저었고, 강심설은 주묘서가 엽연채에게 알랑거리는 역겨운 꼴을 보고 싶지 않아 역시 고개를 저으며 핑계를 댔다.

“난 학해를 봐야 돼서.”

“저 다 먹었어요.”

젓가락을 내려놓은 주묘서가 엽연채를 쳐다보며 재촉했다.

“작은 새언니, 얼른 가요! 용주 경기가 시작하기 전에 길가가 아주 떠들썩하니 가서 구경해요.”

강심설은 주묘서가 말끝마다 ‘작은 새언니’라고 친근하게 부르는 꼴을 보니 속이 메스꺼워 어젯밤 먹었던 밥이 다 올라올 것만 같았다. 저렇게 비굴하게 매달리고 싶을까?

평소 강심설은 주묘서의 비위를 맞추려고 갖은 노력을 했지만 주묘서는 그녀를 상대해 주지도 않았다. 그런데 지금 일개 서출의 부인에게 저리 들러붙고도 부끄러운 줄 몰랐다.

“그럼 배도 찬 것 같으니 구경하러 그만 나가 보거라!”

주 백야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예.”

엽연채와 두 아가씨는 주 백야의 말에 대답하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갔다. 수화문에 도착한 그들은 각자 여종을 한 명씩 데리고 가문 소유의 커다란 마차에 올라타 함께 문밖을 나섰다.

잠시 후, 벽수루에 도착하자 엽연채는 경인에게 마차를 잘 세워 놓으라고 분부한 후 마차에서 내렸다.

“큰공자님과 사시巳時(오전 9시~11시) 삼각에 만나기로 했는데 아직 사시도 안 됐네요. 일찍 도착했어요!”

추길이 떠들썩한 거리를 쳐다보더니 흥분한 눈빛으로 외쳤다.

“그럼 가서 거리 구경 좀 하고 있자꾸나!”

엽연채가 말했다.

주위에는 상점과 찻집들이 즐비했는데, 상점 문 앞에 각양각색의 깃발들을 걸어 놓아 손님들의 시선을 끌었다. 용주 경기 때문에 노점상들이 수두룩했고 길 양쪽 공터도 좌판을 깔고 장사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갖가지 물건을 파는 노점상과 좌판 장수들로 거리는 더없이 시끌벅적했다.

“네, 가서 구경해요. 오, 저기서 장신구를 팔고 있네요!”

주묘화가 흥분한 목소리로 외쳤다.

다른 공훈 귀족 가문의 아가씨였다면 길가에서 파는 장신구는 거들떠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주씨 가문은 형편이 좋지 않으니 아가씨들은 길거리 장신구에도 눈독을 들였다. 엽연채 일행은 장신구를 팔고 있는 노점상으로 다가갔다. 주묘화는 성글게 짠 천으로 만든 꽃 장신구를 샀고 엽연채는 보통 품질의 옥반지 하나를 샀다. 귀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특색이 있는 모양새였다.

“아가씨, 저기 연을 파네요. 저희도 가서 몇 개 사서 조금 있다가 연을 날리며 놀아요! 불운을 싹 다 날려 버리는 거죠.”

“그러자꾸나!”

추길의 제안에 엽연채가 고개를 끄덕이며 흔쾌히 응했다.

그들은 연을 파는 노점상으로 걸어갔는데, 그곳에는 두 사람이 연을 팔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은 서생들이 입는 청색 도포를 입고 있었다. 그는 수려한 얼굴에 온화해 보이는 인상을 풍겼고, 나이는 이십 대 정도로 보였다. 옆에 있는 이는 열여섯 정도 되어 보였고, 체구는 왜소하지만 용모가 준수했으며, 눈빛에서는 영기英氣가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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