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3화
엽연채는 종자만 먹을 뿐 그녀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비 이낭은 그녀가 자신의 말에 대꾸하지 않자 한층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소매 안을 더듬거리다가 나비 모양의 은잠을 하나 꺼내며 말을 이었다.
“저번에 셋째 부인이 부인과 다른 식구들과는 인사를 나누며 얼굴을 익히셨잖아요. 저는 그때 일이 있어서 참석하지 못했죠. 그래서 셋째 부인께 첫인사 선물도 드리지 못했고요. 이건 제가 셋째 부인께 드리려고 미리 준비해 놓았던 선물입니다.”
엽연채와 추길은 동시에 입을 삐죽거렸다. 그녀의 저의를 간파했기 때문이었다. 저번에 엽연채가 진씨와 주묘서를 비롯한 안식구들에게 주었던 첫인사 선물은 꽤나 값어치가 나가는 좋은 것들로, 진씨와 다른 식솔들이 그녀에게 주었던 선물보다 훨씬 귀중한 물건이었다. 그러니 비 이낭 이것이 볼품없는 물건을 주고 귀중품을 받아 이득을 취하려는 속셈이었다.
엽연채는 두 눈을 살짝 깜빡이더니 ‘오’ 하며 입을 열었다.
“이낭이 이렇게 세심하게 신경 쓸 줄은 몰랐네요. 추길아, 가서 내가 저번에 만들었던 비단 말액을 가져오너라.”
추길은 비 이낭을 쏘아보더니 어쨌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반응에도 비 이낭은 개의치 않고 되레 기뻐했다.
‘말액? 오, 그 정도면 괜찮지.’
그녀의 기억으론 엽연채가 처음으로 진씨를 만났을 때 말액 두 개를 선물했었다. 하나는 묘안석을 상감한 말액이었고 다른 하나는 비취를 상감한 말액이었는데, 어쨌든 둘 다 좋은 물건이었다.
잠시 후, 추길이 안으로 걸어 들어오더니 손에 든 말액을 비 이낭에게 건네며 말했다.
“이건 저희 셋째 부인께서 직접 만드신 건데 이낭에게 선물로 드리죠!”
비 이낭은 고개를 숙이고 말액을 쳐다보더니 이내 미소를 머금고 있던 얼굴을 싹 굳혔다. 두 개의 말액은 흐릿한 구름 문양이 들어간 짙은 남색 비단으로 만든 것이었다. 옷감 자체는 매우 좋은 것이었으나 그 위에 보석이나 옥을 상감하지 않았으니 그저 옷감을 조금 자른 것에 불과했다. 그러니 무슨 값어치가 있겠는가?
비 이낭은 안색이 변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셋째 부인, 제가 이낭이라고 이런 물건으로 대충 넘어가시려는 거네요.”
“그게 어때서요? 마음에 안 들어요?”
추길이 대뜸 앞으로 나서더니 냉소를 지으며 비아냥거렸다.
“첫인사 선물을 드리러 왔다고 하지 않았어요? 셋째 부인께 마음을 표현하려고 온 게 아니라 좋은 물건을 받아가 이득을 챙기려고 했나 보네요?”
그 말에 비 이낭의 안색이 더욱 어두워졌다.
“무,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게냐? 누가 이득을 취하려 한다는 것이야?”
“아, 제가 이낭을 오해했던 거네요. 죄송합니다. 이 말액 두 개는 저희 셋째 부인께서 직접 공을 들여 만드신 겁니다. 그러니 어찌 대강 때웠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추길의 말이 끝나자 엽연채도 냉담한 눈빛으로 비 이낭을 쏘아보았다. 비 이낭은 진씨나 백 이낭과는 달랐다. 두 사람은 체면을 중시했지만 비 이낭 이 여인은 체면 따윈 안중에도 없는 뻔뻔스러운 인간이라 이번에 이득을 보게 놓아두면 이후에도 분명 소란을 피울 것이었다.
“이……!”
추길의 말에 비 이낭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해 말문이 막혀, 창백해진 얼굴로 말액을 건네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분통이 터졌지만 감히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엽연채에 대한 증오심만 속으로 불태웠다.
‘이 망할 년. 돈도 그렇게 많으면서 지독히도 인색하게 구는구나! 하지만 돈이 아무리 많고 출신이 좋으면 뭐 하나. 형편없는 놈한테 시집왔는데.’
“비 이낭, 종자 좀 먹어 볼래요?”
엽연채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권하며 고기소가 들어간 종자를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러고 나서는 추길을 쳐다보며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게 맛이 괜찮구나. 우린 점심으로 종자를 먹었으니 이 계란 노른자와 고기소가 들어간 짭짤한 종자와 달콤한 팥소가 들어간 종자는 부군께서 드시도록 남겨두자꾸나.”
엽연채가 다정한 투로 부군이라고 부르자 비 이낭은 가슴이 꽉 막히는 듯했다. 비 이낭은 전에 이들 부부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리를 듣고 기분이 꽤 좋았었다. 부부가 소원하게 지내면 앞으로 셋째 공자가 더 많은 이득을 취할 수 없을 것이고, 또한 자기 아들이 비교당할 일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들 부부관계가 괜찮아진 걸까? 하긴, 셋째 공자가 인물이 좋긴 했다. 세상에 잘생긴 사내 마다하는 여인은 없으니, 특별한 일이 없다면 사이가 좋아질 만도 했다.
하지만 비 이낭은 둘이 화목하게 지내는 꼴을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생각을 하더니 이내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 참, 좀 있으면 셋째 도련님 생모의 기일이지요. 매년 이맘때면 셋째 도련님이 어머니를 뵈러 간답니다. 셋째 부인도 묘소에 가 보실 건가요?”
‘주운환의 생모?’
엽연채는 그 말을 듣고 어리둥절해했다. 듣기로 주운환의 생모는 그를 낳다가 몸이 상해 그가 한 살도 채 되기 전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고 했다.
“그분의 기일이 언제인데요?”
엽연채가 묻자 비 이낭의 얼굴이 경직됐다.
‘그 기녀가 언제 죽었는지 내가 알 턱이 있나!’
“하하, 그건 셋째 도련님께 여쭈어 보셔야죠. 제 기억으로는 단오절이 지난 후였던 것 같아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부인께서는 도련님 생모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시죠?”
그 말에 엽연채는 입을 삐죽거렸다. 저런 쓸데없는 소리는 뭣 하러 하는 걸까?
“도련님이 생모의 얼굴을 빼다 박았거든요. 생모가 얼마나 곱게 생겼을지 상상이 가시죠?”
엽연채는 그녀의 얼굴을 상상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비 이낭은 좀 전보다 더욱 조롱하는 듯한 눈빛을 띠었다.
“하기야 그런 미인이니까 간판이 되었겠죠.”
그 말을 들은 추길과 혜연의 얼굴이 확 굳었다.
‘간판이라고? 설마 셋째 공자의 생모가 기루 출신은 아니겠지?’
추길은 눈앞이 흐려지고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추길과 혜연의 안색은 변했는데 엽연채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자, 비 이낭은 영 마뜩잖은 기분에 더욱 직설적으로 말했다.
“아, 부인께서는 모르시죠? 셋째 도련님 생모가 본래 기녀였어요. 형주亨州에서 제일 유명한 기루의 간판이었죠.”
비 이낭은 그 말을 하고는 우스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깔깔 웃었다.
‘셋째가 아무리 잘생기면 뭐 해. 기녀의 아들인 것을. 기녀가 낳았으니 당연히 잘생길 수밖에 없지!’
“아, 그 말을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였어요?”
엽연채가 싸늘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부군의 생모께서 어떤 분이건, 공자님만 좋은 사람이면 되지 뭐.”
그녀의 말에 비 이낭은 말문이 막혀 웃음소리가 뚝 끊겼다.
“보니까 이낭도 한 인물 했을 것 같은데요?”
엽연채는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으로 비 이낭을 쳐다보며 말했다.
“비 이낭의 부모도 까딱 잘못 생각했으면 비 이낭을 기루로 팔아 버렸을 수도 있죠.”
그 말에 화가 난 비 이낭은 뒤로 넘어갈 뻔했다.
엽연채에게 한마디 하기 위해 문으로 들어서던 여양은 그 말을 듣고는 슬그머니 물러나 난죽거로 뛰어갔다. 꽃에 물을 주고 있던 여한은 여양이 달려오는 모습을 보더니 고개를 들며 물었다.
“가서 셋째 마님께 한마디 하겠다고 하지 않았어? 마님께는 못 하더라도 그 여종한테는 한마디 해야지!”
그런데 여양이 계단에 앉더니 눈물을 닦으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좋은 아내를 어디 가서 구하니! 내 생각에 우리 도련님은 그분을 꼭 아내로 맞이해야 돼!”
그 말에 여한은 입을 삐죽거렸다. 평소 셋째 마님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 바로 여양이었다. 그는 셋째 마님 때문에 자신의 도련님이 번거로운 일을 겪고 사람들에게 조롱을 당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방금 전 화가 나 씩씩거리며 한마디 해야겠다고 달려갔던 여양이 잠깐 사이에 마음을 싹 고쳐 먹은 것이다.
그렇게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추길이 종자가 담긴 커다란 접시 두 개를 들고 안으로 들어왔다.
“아가씨께서 점심에 종자를 먹느라 밥을 차리지 않았다고 전하라고 하셨어. 부족하면 우리 쪽에 아직 따뜻한 게 남아 있으니 말하면 돼.”
“헤헤. 알겠어.”
여양이 얼른 달려가 종자 접시를 건네받으며 말했다.
“도련님께서 그쪽에 가셔서 셋째 마님과 함께 드셔도 되는데.”
추길은 그를 흘끗 쳐다보며 생각했다.
‘평소에 아가씨만 보면 눈을 부라리던 놈인데 오늘은 왜 저러지. 머리가 어떻게 된 건가?’
추길은 별말 없이 종자를 전달하고 바로 돌아갔고, 여양은 종자 접시를 들고 주운환의 서재로 들어갔다. 종자를 좋아하는 여한도 얼른 젓가락을 집어 들고 그를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도련님, 종자 드세요.”
여양은 종자 접시 두 개를 창 아래 팔선상에 올려놓았다.
주운환은 크고 기다란 책상 앞에 앉아 서신을 쓰고 있었다. 그가 고개를 들어 힐끗 쳐다보니 좋은 냄새가 나는 종자가 담긴 접시 두 개가 상 위에 놓여 있었다. 짭조름한 고기소가 든 하얀 종자도 있었고 팥소를 넣은 달콤한 종자도 있었는데, 뽀얗고 윤기가 흐르는 동글동글한 모양새가 백설白雪처럼 퍽 보기 좋았다.
종자를 보며 주운환은 입꼬리를 살짝 당겼다. 엽연채가 깐 종자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엽연채가 궁명헌 파초나무 아래에 앉아 종자를 까고 있는 모습을 상상했고, 곧이어 기분이 아주 좋아졌다. 주운환이 책상을 지나 팔선상 앞으로 가 자리에 앉자 여한이 젓가락을 건네주었다.
여양은 종자를 집어 맛있게 먹다가 이렇게 말했다.
“도련님, 마님께서 종자를 이렇게 잘 만드시는데 그냥 마님을 아내로 맞이하시죠.”
그 말에 주운환은 입술을 삐죽거렸고 여한은 하마터면 목에 종자가 걸릴 뻔했다. 여한이 컥컥거리더니 여양에게 말했다.
“무슨 허튼소리를 하는 거야! 종자 두 개 때문에 도련님을 팔아먹으려는 거야?”
“그게 아냐. 종자 때문이 아니라…….”
여양은 말을 꺼내야 할지 말지 잠시 망설였다. 주운환 생모의 출신은 다들 입 밖으로 꺼내기 꺼려하는 이야기였다. 여양은 조심스러운 눈길로 주운환을 쳐다보더니 비 이낭이 세상을 떠난 주운환의 생모 이야기를 꺼내 엽연채 앞에서 비웃었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여한은 이야기를 들으며 말없이 주운환을 쳐다보았다. 사실 그도 셋째 마님과 함께 지내다 보니 그녀가 꽤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던 차였다.
여양이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았다.
“도련님께서 마님이 골칫거리를 자초한다고 하셨지만, 사실 마님이 그렇게 행동하시지 않아도 골칫거리는 생기는걸요! 그리고 부부는 일심동체 아닙니까. 그러니 헤어지시면 안 됩니다. 헤어지면 오히려 눈에 더 띌 거예요. 그러니 그냥 아내로 맞이하는 게 더 나을 겁니다!”
게다가 외모마저 그렇게 뛰어난데 아내로 맞이하지 않으면 큰 손해를 보는 셈 아닌가.
주운환의 표정이 싸늘하게 변하더니 그는 여양을 노려보며 쏘아붙였다.
“싫다. 너는 종자나 먹거라!”
그의 반응에 말문이 막힌 여양은 너무 억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