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화
그 말을 들은 비 이낭과 주종과의 표정이 한층 굳었다. 예전 같았으면 기쁜 마음에 서둘러 신부를 맞이하고 가정을 꾸리려고 했을 것이었다. 하지만 집안에 갑자기 엽연채가 나타난 후로 주종과와 비 이낭은 생각할수록 이편의 혼인이 달갑지 않고 꺼려졌다.
진씨는 그들의 낯빛을 보더니 쌀쌀맞게 웃으며 말을 이어갔다.
“방금 전 책력을 봤는데 칠월 이레가 길일이니 혼례식은 그날에 치르자꾸나. 너희들은 돌아가서 신부 집에 납폐納幣를 보낼 날짜를 고르거라.”
그러자 비 이낭이 헛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가서 날짜를 골라보겠습니다.”
“그래. 그럼 그렇게 하자꾸나.”
진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들을 물렸다.
문밖을 나선 비 이낭과 주종과는 돌아오는 길 내내 얼굴에서 어두운 먹구름을 몰아내지 못했다.
주종과가 먼저 입을 열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전 설옥인과 혼인하지 않을 겁니다.”
“그래. 혼인하지 말거라!”
그 말을 하며 비 이낭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내 아들은 용모와 집안이 훌륭할 뿐만 아니라 심지어 혼수도 엽연채보다 바리바리 더 많이 해 올 수 있는 신부를 아내로 맞이해야 한다!’
엽연채의 혼수를 생각하니, 비 이낭은 지난번 그녀에게 뺨을 맞았던 굴욕이 재차 떠올랐다.
‘그때는 물건을 단 한 개도 가져오지 못했지만, 언젠가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져오고 말겠다!’
주종과는 자신의 거처로 돌아왔다. 오늘 엽연채를 보고 나니 생각하면 할수록 울화가 치밀었다. 그러곤 잠시 생각을 하더니 학당의 스승님이 건넨 책론策論(과거 시험에서 경의經義나 정사政事와 관련하여 묻는 책문策問에 관련된 내용)을 꺼내 들었다.
안에 적힌 내용을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는지, 감정이 격양된 그는 신들린 듯 붓을 놀리며 방대한 문장을 거침없이 척척 써 내려갔다. 주종과는 자신의 책론을 보며 아주 흡족해했다. 곧 있으면 단오절이지만 학당에서는 여전히 수업을 하고 있었다.
* * *
오월 초나흗날, 아침이 밝자마자 주운환은 서둘러 채비를 마치고 밖을 나섰다.
품서재品書齋는 성 북쪽에 있는 평범한 서원書院으로, 명성이 자자한 곳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세속적인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는 곳이었다. 이곳에는 육칠십 명 정도가 수학하며 세 개의 반이 개설되어 있었다. 학생들은 대부분 도성 북쪽에 거주하는 평범한 집안의 자제이거나 주씨 가문처럼 몰락한 귀족이었다.
학당에 온 주운환은 자리에 앉더니 스승님이 놓아둔 책론을 꺼내어 묵독默讀했다. 이내 품서재에는 책 읽는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 퍼졌다.
등 부자夫子(스승을 높여 이르는 호칭)는 쉰 살이 넘은 노老수재였다. 그는 책 읽는 소리를 들으며 탁자 앞에 앉더니 학생들이 쓴 책론을 살펴보았다. 반쯤 읽다가 아래에 적힌 학생의 이름을 보고는 만족스러운 듯 고개를 끄덕였다.
반 시진이 지나자 책 읽는 소리가 멈추었다. 등 부자는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쓴 책론을 모두 보았다. 이번에는 주종과의 책론이 눈에 띄더구나.”
그 말에 주종과의 눈이 반짝거렸다.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이번 책론은 참 잘 썼다 싶었기에 칭찬을 받을 줄 이미 알고 있었다.
주종과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사양했다.
“과찬이십니다.”
등 부자는 염소수염을 만지작거리더니 주종과의 책론을 낭송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등 부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가 읽어 주는 내용에 귀를 기울였다. 도입부는 그런대로 괜찮았다. 그런데 들으면 들을수록 학생들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더니 하나둘씩 저도 모르게 주운환을 흘깃대기 시작했다.
교실 낭하에서 주운환의 수업이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던 여양은 교실에서 들려오는 주종과의 책론 내용을 듣고는 분노가 치밀어 안색이 확 변했다.
주종과의 책론은 일부 귀족을 포함한 사람들이 현실에 안주하며 처갓집 덕을 봐 신분이나 지위의 향상을 도모하려 하는 작금의 실태를 비판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예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적었다.
어떤 주州의 한 지현知縣(현縣의 우두머리)의 서자는 현실에 안주하는 무사안일한 인물인데, 잘 타고난 얼굴 하나로 한 후부侯府의 여식을 꼬셔 아내로 맞이하더니 처족을 이용해 출세가도를 달리려고 했다.
그자는 자질이 부족한 구제불능의 한량인 데 반해, 그의 형은 과거 시험에서 장원으로 합격한 인재였다. 주종과는 이 사례를 들어 요즘 관료 사회에서 권세에 빌붙어 이익을 취하려고 온갖 궁리를 다 하는 소인배들, 특히 적장嫡長의 혈통도 아닌 일부 못난 사람들의 그릇된 행위를 규탄했다.
막힘 없이 술술 써 내려간 책론은 두 장을 꽉 채웠다. 관점도 훌륭했고, 논증과 논거도 잘 제시되어 있었다. 필력이 뛰어난 건 아니었지만 격양된 감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듣는 사람의 마음을 파고드는 글이었다.
글 속에 담긴 그의 감정에 마음이 동한 학생들은 저마다 좋은 글이라며 아우성을 쳤지만,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좀 미묘했다. 책론 내용이 좋기는 한데 아무리 들어도 주운환을 빗대어 말하는 것 같았다.
“일각 동안 휴식한 후 사서四書의 주해注解(본문의 뜻을 알기 쉽게 풀이한 설명)를 외우고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에 수업을 마칠 것이다. 또 내일은 단오절이라 수업이 없다.”
말을 마친 등 부자는 서책을 집어 들고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교실에 남은 학생들은 방금 전 그가 읽었던 주종과의 책론을 두고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댔다. 그러던 중 구석에 앉아 있던 뚱뚱한 학생 하나가 웃으며 주종과에게 말을 붙였다.
“주종과, 너 네 아우 이야기를 한 거지? 어쩐지 너무 잘 썼다 했더니 네가 마음속으로 느낀 바를 써 낸 것이었구나!”
“푸하하!”
주변에 있던 학생들은 그 말을 듣고 한바탕 폭소를 터트렸다. 주비양은 그 모습을 보며 미간만 찌푸릴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종과는 냉소를 지으며 부정했다.
“마음속으로 뭘 느꼈다는 거야. 운환이는 그런 별의별 궁리를 다 하는 애가 아니다. 엽씨 가문 큰소저를 아내로 맞이한 것도 예기치 못한 일이었어.”
주운환을 쳐다보는 학생들의 표정은 더욱 오묘해졌다. 부러워하면서도 멸시하는 상반된 감정이 얼굴들에 드러났다. 그러나 후자, 즉 눈꼴시다는 감정이 더 커 보였는데, 이 서원에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모두 집안이 평범했으니 그리 놀랄 일도 아니었다.
“운환이는 아직까지도 방에 못 들어가고 있는걸!”
주종과가 농담조로 말했다.
“뭐라고? 그럴 리가!”
학생들은 키득키득 웃기 시작하더니 웃음소리는 이내 더욱 크게 울려 퍼졌다. 동정 어린 눈길로 주운환을 쳐다보면서도 또 그의 불행을 즐기는 듯한 눈빛이었다.
‘하늘에서 떡이 뚝 떨어지면 뭐 하나. 후부의 적녀에게 업신여김을 당해 방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는데. 쯧쯧, 변변치 않기는!’
그때 주비양이 날카로운 목소리로 눈썹을 치켜세우며 일갈했다.
“둘째야!”
주종과는 해죽거리며 자신의 붓을 정리할 뿐, 형의 말은 못 들은 척했다. 주비양은 그가 듣고도 대꾸하지 않는 모습을 보더니 입을 오므리곤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편 주운환은 냉담한 얼굴이었다. 그는 어떤 감정도 드러내지 않은 채 책상 위에 놓인 서책을 집어 들더니 덤덤하게 교실 밖으로 나갔다.
“운환아. 어디 가느냐?”
신이 난 주종과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아직 수업 중이다!”
주운환은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쓱 쳐다보더니 돌아서서 밖으로 나갔다.
“부끄러워서 성이 났나 보구나!”
그 말에 몇몇 학생들이 푸하하 소리를 내며 야비하게 웃어 댔다. 주운환이 풀이 죽은 모습으로 자리를 뜨자 주종과는 더욱 신이 났다. 주비양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으나 다소 의기소침해 보였다.
품서재에서 나온 여양의 낯빛은 몹시 어두웠다.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정수리에서 연기가 피어오르기 직전이었다.
“도련님……!”
그러자 주운환이 하품을 하며 말을 돌렸다.
“이제야 쉴 수 있게 되었구나.”
주운환과 여양은 정국백부로 돌아왔고, 여한은 마침 난죽거에서 꽃에 물을 주고 있었다. 여한은 집으로 돌아오는 그들을 발견하곤 어리둥절해하며 물었다.
“셋째 도련님, 오늘은 되게 일찍 돌아오셨네요. 내일이 단오절이라 수업이 일찍 끝난 겁니까?”
“일찍 끝나긴 뭐가 일찍 끝나. 그런 좋은 일이 있을 리가 있냐.”
여양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둘째 도련님이 학당에서 또 입을 놀렸거든. 이게 다……!”
여양이 말을 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주운환이 방으로 들어가고 나서야 여양은 계단에 엉덩이를 붙이곤 작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이게 다 그 정안후부 아가씨 때문이야. 그분이 셋째 도련님께 시집오는 바람에 사람들이 온종일 도련님을 비웃고 있잖아.”
하지만 차마 주운환 면전에서 이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왠지 이 말을 했다가는 주인이 자신을 노려볼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여한은 ‘아’ 하고 소리 내더니 이렇게 대꾸했다.
“어제 둘째 아가씨 성년식이 있었는데 설 소저도 오셨어. 그분은 둘째 도련님의 정혼녀시잖아. 이제 혼례식을 올려야 할 나이도 되었으니 집안에서도 분명 서두르고 있을 거야. 예전 같았으면 별문제 없었을 텐데 셋째 도련님께서 엽 소저를 아내로 맞이하셨으니 둘째 도련님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어.”
“자기가 일으킨 문제는 자기 스스로 해결한다고 호언장담했으면 뭐 해. 결국 셋째 도련님께서 편히 못 지내고 계시는데. 안 되겠어, 이번 일은 내가 가서 말씀드려야겠어. 어찌 됐든 당사자가 방법을 생각해 내게 해야지.”
여양은 그렇게 말하고서는 문밖을 바로 나섰다. 그가 궁명헌으로 걸음을 재촉하고 있는데, 도착하기 직전 버드나무 오솔길을 흐느적거리며 걸어 오는 비 이낭의 모습이 보였다. 그녀는 손수건을 팔락거리며 궁명헌 대문으로 들어섰다. 그 모습을 본 여양은 어리둥절해하며 그녀의 뒤를 쫓아갔다.
추길과 혜연은 궁명헌 정원에서 탁자를 옮겨와 파초나무 아래 놓은 후, 그 옆에 앉아 엽연채와 종자를 까고 있었다.
“오, 셋째 부인. 즐거워 보이시네요.”
비 이낭이 미소를 지으며 걸어 들어왔다.
“비 이낭……. 여긴 무슨 일로 왔어요?”
추길이 굳은 표정으로 물었다.
“어머, 얘 좀 봐라. 이게 무슨 법도인 게냐. 감히 나한테 그런 식으로 말하다니!”
비 이낭은 냉소를 지어 보였다.
“셋째 부인께서는 아랫것 교육도 안 하시나 봐요.”
이에 엽연채가 짭짤한 고기소가 들어 있는 종자를 먹으며 물었다.
“무슨 일로 왔어요?”
그 말에 비 이낭의 얼굴이 굳어졌다. 밉살스러운 엽연채를 상대하려니 몹시 힘들었으나, 그녀는 겉으론 뻔뻔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다름이 아니라 저희가 정식으로 만난 적이 없지 않습니까? 그래서 오늘 셋째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려고 이렇게 온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