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유서부-81화 (81/858)

제81화

주종과가 고개를 돌려보니 자신의 정혼녀인 설옥인과 엽연채가 함께 걸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두 사람을 비교하니 엽연채의 용모는 천상의 선녀처럼 더욱 곱고 매력적으로 보였고, 그에 반해 설옥인은 희뿌옇게 보이는 것이 꼭 엽연채를 모시는 여종처럼 보였다. 이에 주종과는 마음을 다잡기가 더욱 힘이 들었다.

주운환은 엽연채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주종과를 보곤 표정이 굳어지더니, 그녀 곁으로 걸어가 주종과의 시선을 가로막았다. 그러곤 온씨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장모님.”

“그렇게 예의 차리지 않아도 되네.”

온씨는 다정한 눈길로 주운환을 쳐다보며 답례했다.

그 모습에 주운환을 바라보는 주종과의 눈빛이 더욱 어두워졌다. 온씨가 셋째 이 하찮은 놈을 아니꼬워하지 않는 것이었다. 눈이 삐고 머리가 어떻게 된 게 틀림없었다.

“둘째 공자님.”

설옥인이 주종과를 보더니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다가왔다.

“오늘이… 둘째 아가씨 성년식이라 저희 어머니께서 성년식에 참석하라고 하셔 이리 오게 되었습니다.”

주종과는 미간을 찌푸렸다. 설옥인을 보자 창피함이 느껴지면서 한층 골이 났던 것이다. 그는 눈을 부라리며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내 앞으로 와 있는데 소저가 안 보이겠습니까?”

“아… 그렇네요.”

주종과의 냉담한 태도에 설옥인은 억울함이 솟구쳤다. 그녀도 자신이 한 말이 쓸데없는 말인 줄은 당연히 알고 있었다. 그저 그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말을 건넨 것이었다. 전에는 자신에게 다정하고 따뜻하게 대했던 둘째 공자였는데, 오늘은 상대조차 하기 싫은 모양이었다. 설옥인은 분한 마음이 들었지만 감히 뭐라 더 말할 수는 없었다.

“시간이 다 되어 가니 이제 그만 자리에 앉으시지요!”

강심설은 주운환 주종과 형제의 행동을 보며 픽 웃고 말았다. 그런데 고개를 돌리자 그녀의 오라버니 또한 엽연채를 쳐다보고 있는 게 아닌가. 강심설의 낯빛이 어둡게 변했다.

‘여우 같은 년, 남정네 꾀는 능력은 타고난 천박한 계집 같으니라고!’

강심설은 그렇게 생각하며 주비양을 흘끗 쳐다봤다. 그의 시선은 엽연채에게 향해 있지 않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치 세속을 초월한 듯 청신해 보였다. 그 모습을 보자 강심설은 마음이 더욱 복잡해졌다. 이렇게 외모가 출중한 여인을 눈앞에 두고도 눈길 한번 주지 않는 걸 보니, 역시 그의 마음속에는 그 빌어먹을 계집밖에 없는 것이었다.

“다들 자리에 앉으시죠.”

진씨는 손님들에게 앉기를 권한 후 주 백야와 함께 부모가 앉는 자리에 착석했다. 부부가 함께 자리하자 온씨와 엽미채는 한 자리에 앉았고 주묘서와 설옥인은 다른 탁자에 함께 앉았다. 성년식에 참석한 다른 손님들도 배정받은 자리에 모두 착석했다.

엽연채가 시선을 돌려 심방정과 호숫가를 연결하는 백석교白石橋 쪽을 바라보자, 백 이낭과 비 이낭이 그 위에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두 사람은 신분이 낮아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자리할 수 없었다.

비 이낭은 두 눈에 핏발을 세우고 엽연채를 노려봤다. 저 빌어먹을 어린 계집이 저번에 자신의 뺨을 후려치고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준 일은 절대 잊을 수 없을 터였다. 비 이낭은 언젠간 꼭 대갚음해 주겠다고 속으로 천 번 만 번 다짐했다.

잠시 후 비 이낭의 눈길이 별안간 주묘서 옆에 앉아 있는 설옥인에게로 향했다. 그녀를 보자 비 이낭은 가슴이 더욱 답답해졌다.

전에는 설옥인 정도면 꽤 괜찮은 며느릿감이라고 생각했다. 출신도 외모도 평범하고 성격도 온순해 다루기 쉬운 아이였으니까. 그리고 아들과도 그런대로 잘 어울리는 편이었다. 그래서 전에는 설옥인이 하루라도 빨리 시집와서 둘째에게 자식을 안겨 주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갑자기 하늘에서 엽연채가 뚝 하고 떨어진 것이었다.

그녀와 비교하니 설옥인은 어디 하나 잘난 구석이 없었다. 둘째와 셋째는 같은 서출이라고는 하나, 제대로 따지자면 기녀가 낳은 셋째보다 자기 배에서 난 둘째가 훨씬 고귀한 신분임은 두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어째서 둘째의 부인이 셋째의 부인보다 한참 뒤처진단 말인가. 어째서 셋째는 지체 높은 가문의 귀한 여식을 아내로 맞이하고 둘째는 호부시랑 서제庶弟의 서녀를 아내로 맞이한다는 말인가. 이는 불공평하기 짝이 없었다.

길시吉時가 되자 주묘화는 여종들에게 둘러싸여 밖으로 나왔다. 그녀가 부모님께 예를 올리자 주례자 역할을 맡은 강심설의 모친이 주묘화의 머리에 비녀를 꽂아 주었다. 주묘화는 입고 있는 옷 위로 다른 옷을 더 걸친 후 다시 부모님께 예를 올렸다. 성년식은 그렇게 마무리됐다.

너무나 간소화된 성년식이었다. 엽미채는 주묘화의 성년식을 보며 탄식해 마지않았다. 그리고 성대하게 치렀던 엽연채의 성년식을 떠올렸다. 자신은 일개 서녀에 불과하니 적녀인 언니의 성년식만은 못하겠지만 그래도 주묘화의 성년식보다는 훨씬 성황리에 치를 것이었다.

사람들은 심방정을 떠나 일상원으로 돌아온 후 식사를 했다. 설옥인은 식사를 마친 후 작별 인사를 하고서는 바로 집으로 돌아갔다. 엽연채와 온씨를 비롯한 여인들은 주묘서와 주묘화 두 아가씨만 돌려보내고 서차간으로 돌아가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자리는 이낭들도 함께 할 수 있었다.

백 이낭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둘째 아가씨께서 성년식을 치렀으니 혼사도 서둘러 정해야겠죠.”

그 말을 뱉은 후 백 이낭의 표정이 다소 불만스럽게 변했다. 다른 가문 아가씨들은 보통 열두 살에서 열세 살이 되면 혼사를 논하고 성년식을 치른 후 바로 출가했다. 그런데 이 주씨 가문에서는 그 보통의 일이 결코 녹록치 않았다.

그러자 강심설의 어머니가 소리 내어 웃으며 말했다.

“혼사 이야기는 큰아가씨가 먼저 아니겠어요. 보세요. 얼마나 풋풋하고 생기가 넘칩니까!”

진씨는 온씨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지만, 그녀의 눈빛에는 언뜻 화난 기색이 비쳤다. 이쪽에서 계속해서 혼사 이야기를 꺼냈음에도 온씨는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고 자신들의 꾀에 넘어가지도 않았다. 그렇다고 자신이 직접 온씨에게 딸의 혼처를 구해 달라는 말을 꺼내면 체면이 깎이게 될 것이었다.

강심설의 어머니가 다시 말을 이었다.

“주씨 가문 큰아가씨가 좋은 처자라고 사돈댁에서 이리 계속 아껴두시면 되겠습니까? 오늘 참석한 사람도 많으니 이참에 큰아가씨 혼사 이야기를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성싶습니다. 저한테 사촌 조카가 있는데 큰아가씨와 나이도 엇비슷하고 인물도 번듯해 그저께 큰아가씨에게 소개해 주려고 했어요. 그런데 가서 물어보니 벌써 정혼을 했더군요.”

“어머, 아까워라.”

강심설의 새언니가 기다렸다는 듯이 맞장구를 쳤다.

“엽 부인께서도 좋은 청년을 알고 계시면 소개 좀 해 주시죠.”

강심설의 어머니가 농담조로 말했다. 그러자 진씨도 간절한 눈빛으로 온씨를 쳐다봤다.

“주변에 적당한 사람이 없네요.”

그 말에 강심설 어머니의 표정이 확 굳었고 진씨의 얼굴도 붉으락푸르락했다. 방금 전 그리 알아듣게 이야기를 했는데 이 온씨는…….

온씨는 입술을 오므리고 말을 덧붙였다.

“안사돈, 솔직히 말하자면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어서 중매를 할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진씨는 뺨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자신이 이렇게 굽실거리며 부탁을 하는데 온씨는 핑계를 대어 어물어물 넘어가려고 했다.

방 안 공기가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보다 못한 엽연채가 상황을 무마할 이야기를 꺼내려고 하는 찰나, 온씨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더니 진씨를 쳐다보며 말했다.

“안사돈, 다들 아들딸 가진 사람들이니 자식의 혼사가 문제없이 술술 풀리기를 바라지 않겠습니까? 제가 사람 보는 눈이 없다고 말씀드린 건 구실을 대 적당히 넘어가기 위함이 아닙니다. 안사돈께서도 이미 보셨겠지만 제가 연채에게 어떤 사람을 배필로 골라 줬습니까?”

그 말을 들은 진씨와 강심설은 어안이 벙벙했고, 이어서 보인 표정은 더욱 미묘해 참으로 가관이었다. 온씨가 자신의 친딸을 곤경에 빠뜨리려고 했을 리가 있겠는가. 그런데 그녀가 고른 사위는 혼례식 당일 다른 여인과 함께 사랑의 도피를 했다. 다름 아닌 그녀가 직접 선택한 사위가 말이다.

“그건 예기치 못한 일이었죠.”

강심설의 어머니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그녀와 달리 진씨는 가슴이 두근거려 안절부절못했다. 그녀는 주묘서의 인생과 행복을 걸고 모험을 할 수는 없었다.

온씨는 진씨의 마음을 이해했다. 여인은 고개를 빳빳이 들고 시집가고 사내는 고개를 숙이고 아내를 맞이한다는 이야기도 있듯이, 진씨는 자신의 인맥을 이용해 주묘서에게 좋은 시댁을 찾아 주고 싶은 것이었다.

지금 자신의 딸은 진씨 밑에서 하루하루 살아가고 있으니 도와주려고 하면 못 도와줄 것도 없었다. 하지만 주묘서의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면 이야기가 달라졌다. 함부로 다른 사람에게 소개해 주었다가는 어떤 일이 생길지 몰랐다.

온씨는 잠시 생각을 하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사돈아가씨께서 시집갈 나이가 됐으니 밖으로 나가 얼굴도 내밀고 많이 돌아다니게 하시죠. 그러다 보면 좋은 시댁을 찾게 될지도 모르지 않습니까. 아가씨께서 좋은 혼처를 구하게 되면 제가 아가씨 이야기를 좋게 해 드릴게요.”

이 말인즉 직접 찾아보라는 뜻이었다. 괜찮은 혼처를 구하면 온씨가 이야기는 좋게 해 줄 것이며, 그래서 잘되면 좋은 거고 설령 잘 안 돼도 그녀를 탓할 수는 없다는 이야기기도 했다.

진씨는 여전히 온씨가 주묘서에게 훌륭한 청년을 소개해 주기를 바랐지만, 또 다른 한편으론 온씨가 사람 보는 눈이 없을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자신이 먼저 꼼꼼히 따져보고 심사를 해야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이다.

진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안사돈 말씀이 일리가 있네요.”

그 후로도 사람들은 이야기를 잠시 더 나누었다. 그 뒤에 온씨와 엽미채를 비롯한 손님들은 작별 인사를 하고 자리를 떴다.

온씨와 다른 손님들이 다 떠나자, 진씨는 텅 빈 방 안을 둘러보다가 갑자기 녹지에게 말했다.

“녹지야, 가서 책력을 가져오너라.”

녹지는 돌아서서 밖으로 나가더니 잠시 후 책력을 가지고 돌아왔다. 진씨는 책력을 넘겨보다가 녹지에게 이리 일렀다.

“비 이낭과 둘째를 불러오너라.”

“예, 마님.”

녹지가 말을 전하러 가고 그리 오래되지 않아 비 이낭과 주종과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마님.”

비 이낭이 못마땅한 표정으로 입을 삐죽거리며 들어왔다. 진씨는 비 이낭의 못마땅한 표정을 보자 기분이 조금 나아지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오늘 설 소저를 보니 설씨 가문이 탈상脫喪한 게 기억이 나더구나. 셋째도 혼인을 했으니 이제 둘째의 혼사도 준비해야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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