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0화
“어머, 안사돈과 엽씨 가문 셋째 소저가 오셨군요. 어서 앉으세요.”
진씨는 온씨를 쳐다보더니 두 눈을 가볍게 깜빡였다. 온씨와 셋째 며느리가 어느 정도 닮기는 했지만 모친 쪽이 좀 더 어리숙해 보이는 인상이었다.
“네.”
온씨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마님, 이쪽으로 오세요.”
녹지가 자리를 살펴보더니 진씨 왼쪽 하좌에 놓인 권의로 온씨를 데려갔다. 온씨는 자리에 앉았고 엽연채와 엽미채는 앉지 않고 그녀 곁에 서 있었다.
엽연채는 오른쪽에 앉아 있는 사십 대 부인을 눈여겨봤다. 그 부인은 전지纏枝 문양이 들어간 살짝 붉은빛이 도는 노란 배자를 입었는데, 얼굴도 강심설과 조금 닮은 데가 있었고 무엇보다 주학해를 품에 안은 채였다. 그 부인 옆으론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얼굴이 동그란 젊은 부인이 앉아 있었다.
엽연채는 이들이 강심설의 어머니와 새언니임을 알아차렸다. 강심설은 자신의 어머니 옆에 서 있었다.
온씨가 들어온 후 분위기가 다소 어색해지자, 말주변이 좋은 강심설의 어머니가 미소를 지으며 운을 뗐다.
“셋째 공자님께서도 혼인을 했으니 이제 아가씨들도 혼인 준비를 해야겠네요.”
그 말을 들은 진씨는 두 눈을 슴벅이더니 미소를 지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나 그 말을 듣고 표정이 어두워진 강심설은 어머니의 입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엽연채는 용모, 집안, 신분 그리고 혼수까지 모든 면에서 그녀를 앞질렀다. 이런 상황에서 엽연채 친정에서 주묘서에게 좋은 혼처까지 구해 준다면 자신의 쓸모없음이 부각될 것이고, 그럼 자신은 부끄러워서 고개를 들 수 없게 되지 않겠는가.
엽연채는 강심설의 어머니가 하는 말을 듣곤 기가 찰 노릇이었다. 정말 꼴불견이지 않은가.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이 이야기를 꺼내다니.
온씨는 그저 미소를 지으며 차를 마실 뿐, 그녀의 말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숙인 채 진씨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소녀를 힐끗 쳐다봤다.
귀엽고 사랑스럽게 생긴 소녀는 진씨를 빼다 박은 외양이었다. 소녀는 머리에 순금 주화珠花를 꽂고, 하늘색 비단 웃옷과 촘촘히 짜인 자귀나무 꽃 문양이 들어간 분홍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잠깐 보는 것만으로는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온씨가 묵묵부답하자 진씨는 심기가 불편해졌다. 그러자 강심설의 어머니가 다시 입을 열었다.
“큰아가씨께서 성품도 좋고 인물도 빼어나니 안사돈께서 관매官媒(관아에서 일하던 중매쟁이)를 찾아봐 주실 수 있을까요?”
그러자 진씨가 이리 말을 받았다.
“관매를 찾는 건 일단 나중으로 미루고, 우선 친척이나 지인에게 혼처를 찾아봐 달라고 부탁하려 합니다. 그래야 어떤 사람인지 속속들이 알 수 있겠죠.”
“아, 그게 좋겠네요!”
강심설의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맞장구쳤다.
진씨는 온씨를 힐끗 쳐다봤다. 그러나 온씨는 그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그들이 말하는 모습을 쳐다볼 뿐 대화에 끼지는 않았다. 그런 온씨의 모습에 진씨는 속으로 화딱지가 났다.
주묘서는 온씨가 자신의 혼처를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어머니의 마음을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돌아가는 상황을 보니 일이 그렇게 잘 흘러간다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분한 마음에 무릎 위에 올려놓은 손으로 손수건을 꽉 움켜쥐었다. 강심설은 그 모습을 흘깃하며 속으로 고소해했다.
“마님, 설씨 가문 일곱째 아가씨께서 도착하셨습니다!”
이때 밖에서 녹엽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곧 문발이 걷히더니 열여섯 정도 되어 보이는 소녀가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살짝 동그랗고 통통한 얼굴, 버들잎 같은 눈썹과 살구 같은 눈을 가진 이 소녀는 오밀조밀한 화훼 무늬가 들어간 연보라색 곡거曲裾(몸을 휘둘러 감아 입는 원피스형 옷)를 입고, 머리에는 은색 보요 하나만 꽂고 있었다. 참하게 생겼을 뿐 눈에 띄는 외모는 아니었다. 하지만 부드럽고 순한 인상이라 성격이 좋아 보였다.
설옥인은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오더니 곰살맞은 목소리로 진씨를 향해 인사를 올렸다.
“주 부인, 강 부인 그리고 자리에 계신 모든 부인들께 인사를 올립니다.”
그녀는 인사를 올린 후 조심스러운 눈길로 주변을 휘둘러보다가 모르는 사람들이 보이자 살짝 긴장이 되었다.
“설 소저, 그렇게 예의 차리지 않아도 돼요. 묘화의 성년식을 마음에 두고 참석해 준 것만으로도 고마우니.”
진씨는 미소를 지어 보였으나 실제 기분은 좋지 않았다. 방금 전 주묘서의 혼사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녀의 때 아닌 등장으로 흐름이 끊겼기 때문이다.
“당연히 와야죠.”
설 소저는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리에 앉아요!”
진씨가 앉기를 권했으나 남아 있는 자리가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설옥인의 얼굴은 삽시간에 붉게 달아올랐다. 어디에 앉으라는 말인가?
“녹지야, 가서 의자를 가지고 오너라.”
엽연채가 녹지를 부르자 그녀는 입을 삐죽거리며 생각했다.
‘서자의 아내 주제에 내게 심부름을 시키는 거야?’
하지만 명을 따르지 않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속으로만 불평할 뿐이었다. 녹지가 수돈을 가져와 엽연채 옆에 놓았다. 설 소저는 머뭇거리며 다가와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고개를 들더니 엽연채가 서 있는 모습을 보고는 멋쩍어하며 물었다.
“자리에 안 앉으세요?”
그러자 엽연채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설 소저께서는 손님이잖아요.”
그에 비해 자신은 며느리였다. 보통 집안에 손님이 오거나 연장자가 있을 때 자리가 없는 경우 며느리들은 자리에 앉지 않고 서 있었다.
설 소저가 작은 목소리로 물어 왔다.
“주씨 가문 셋째 부인이시지요?”
“네.”
엽연채는 미소를 지으며 답한 후 자신도 물었다.
“전 시집온 지 얼마 안 되어 집안 식구들의 친척들을 다 알지 못합니다. 설 소저께서는…….”
“전… 주씨 가문 둘째 공자님의 정혼녀입니다.”
설 소저는 시선을 아래로 드리우더니 부끄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말을 들은 엽연채는 순간 멍해졌다.
‘이 아가씨가 주종과의 정혼녀라고? 그러니까 자신의 동서가 될 사람이란 말인가?’
몰락한 가문의 서자인 주종과와 정혼을 맺었으니 신분이 높을 리 없었다. 엽이채보다도 출신이 별로라는 말을 들었던 게 떠올랐다. 엽연채는 방금 진씨가 왜 그런 태도를 보였는지도 바로 이해했다. 아직 시집을 온 건 아니지만 미래의 며느리도 며느리이니 초장에 기를 팍 눌러 놓으려는 속셈일 게 분명했다.
“어머님, 시간이 다 되어 가니 둘째 아가씨께서도 이젠 준비를 마쳐야 합니다.”
강심설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진씨가 굳은 표정으로 강심설을 쏘아봤다.
‘묘서의 혼사 이야기가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이 눈치 없는 것이 중간에 끼어들어 훼방을 놓다니!’
강심설의 얼굴이 경직되나 싶더니 그녀는 얼른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사실 정말로 시간이 별로 남지 않기는 했다. 주묘화가 성년식을 올리기 가장 좋은 때는 사시巳時(9시~11시) 일각이었는데, 이제 곧 사시였다.
“여러분, 심방정沁芳汀에서 묘화의 성년식이 치러지니 어서 그곳으로 가시죠!”
진씨가 고개를 돌리더니 미소를 지으며 모두에게 청했다.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일어서더니 우르르 바깥으로 나갔다. 일상원 밖으로 나와 일각 정도 걸어가니 심방정에 도착했다.
심방정은 정국백부 내 남쪽 호수 위에 설치된 흰 돌로 만들어진 단壇이었다. 길이는 대략 300척尺이었고 모양은 팔각형이었는데, 일곱 면은 난간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나머지 한 면에는 위에서 아래로 연결된 백옥 계단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고풍스럽고 정교한 양각陽刻을 보니, 번성했던 당시의 주씨 가문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었다.
단 위에는 성년식에 필요한 물품들이 적절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부모가 앉을 자리인 기다란 이목梨木 탁자 위에는 과일, 과자류 간식거리, 좋은 술이 놓여 있었고 이 탁자를 중심으로 수십 개의 기다란 탁자가 놓여 있었다. 이 탁자들은 성년식을 보러 온 손님들 수에 맞춰 준비된 것이었다.
엽연채를 비롯한 여인들은 주 백야와 가문 사람들이 주운환 형제를 데리고 오는 모습과 강심설의 아버지와 오라버니가 걸어오는 모습을 보았다.
“마침 부르러 가려는 참이었는데 이렇게 오고 있었군.”
주 백야가 허허 웃으며 먼저 알은체를 했다.
진씨와 다른 사람들 뒤에서 걸어오고 있던 엽연채는 멀리서 주 백야가 아들들을 데리고 걸어오는 모습을 보고는 검은 눈썹을 추켜세웠다. 시아버지를 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시집오던 날 시아버지가 직접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왔으나, 그때는 붉은 수건을 두르고 있었고 또 시아버지는 자신을 데려온 직후 도망가듯 자리를 떴었다.
그 후 그는 이런 일을 벌였다는 이유로 온 가족에게 미움을 샀다. 본래 성정도 유약한 사람인지라 겁을 집어먹고 밖에서 여러 날을 숨어 지내다가 얼마 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엽연채는 엽연채대로 이곳에 온 뒤로 궁명헌에서 시간을 보내거나 거리로 구경을 나가는 등 자신만의 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그래서 주운환 외에 주 백야와 주비양, 주종과는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주 백야는 오십쯤 먹었을까 싶은, 맥이 빠져 보이는 중늙은이였다.
주 백야도 엽연채를 흘끗 쳐다보더니, 며느리가 과연 소문대로 수려한 용모를 가졌다고 생각했다. 어쩐지 아내가 지금까지도 노여움을 풀기는커녕 갈수록 더 분해하더라니. 엽연채가 식구가 된 후 집안에 바람 잘 날이 없었으니 그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주 백야가 엽연채를 보기가 껄끄럽다고 다른 사람들도 그런 건 아니었다. 적어도 주종과와 강심설의 오라버니는 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
엽연채는 미간을 펴 환한 미소를 지은 채 걸어오고 있었다. 생기 있게 살짝 올라간 눈꼬리가 그녀의 미모를 한층 돋보이게 했고 입꼬리를 당겨 상냥한 미소를 짓는 매력적인 모습은 보는 이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세상에서 가장 밝고 반짝이는 색채가 눈을 다 부시게 했다.
주종과는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더니 이내 괴로워했다. 가슴에서 피가 철철 흐르는 것만 같았다. 저번에 궁명헌에서 지나가듯이 언뜻 엽연채를 봤을 때도 주종과는 불공평하다는 생각이 들어 기분이 상당히 언짢았다.
‘대체 왜 이런 일이 생겼지? 어째서 지체 높은 가문의 적녀가 이런 몰락한 가문에 시집을 오게 됐단 말이야? 설령 어떤 이유에서 시집을 와야 했다고 쳐도 왜 그 상대가 내가 아닌 셋째란 말인가? 불공평하다! 불공평해도 너무 불공평하다!’
주종과는 한동안 마음을 추스르고 나서야 겨우 이 일을 떠올리지 않게 되었다. 이제 좀 속이 편해지려고 하는데 오늘 또 엽연채를 보니 가까스로 되찾은 평온함이 산산이 조각나 심장을 쥐어뜯기는 것처럼 마음이 쓰라렸다.